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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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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1.18 http://www.john316.or.kr |
오기(5기) 있는 삶을 사십시오
(시편 102편 1-14절)
지난 목요일 현 권사님 심방예배 때 열왕기하 11장에 나오는 ‘제사장 여호야다’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야다는 유다의 8대 왕인 요아스가 40년을 통치하다가 신복들의 배반으로 죽기 얼마 전인 130세에 죽습니다(대하 24:15). 당시로서는 너무 고령이어서 잘못된 기록이란 견해도 있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여호야다가 7세 된 요시아의 왕정 복위 거사를 일으킨 때는 약 90세 때였습니다. 그 거사의 꿈은 그가 약 84세에 아달랴가 왕손들을 다 죽일 때 간신히 구출된 갓난아기 요아스를 성전에서 은밀히 키우면서 품었습니다.
나이 84세에 찬란한 꿈을 품고 6년의 준비 끝에 마침내 90세쯤에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하고 전략을 짜서 완벽하게 거사를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찬란한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찬란한 꿈은 치매를 막아주고 지혜를 가져다주며 건강과 장수의 축복도 줍니다.
지금 우리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와 홈페이지와 미션퍼블릭을 통해 문서선교 사역을 하고 있고, 네트영어를 통해 나눔의 모델이 되고 세계선교를 뒷받침하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온새기를 받고 있고 홈페이지에 게시된 설교들은 평균 만 명이 넘는 목사님들이 조회하고 있고 십만 명 이상 클릭한 글들도 많습니다.
설교파일도 현재 40세트를 완성했습니다. 가장 분량이 많은 이사야 설교파일은 일반 책 1300페이지 분량이고, 그 외에 창세기 1200페이지, 사도행전 1050페이지, 예레미야와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은 각각 95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설교파일인데 그런 설교파일부터 적은 분량의 설교파일까지 현재 40세트를 만들어 성경 전체 강해의 62%를 완성했습니다. 이제 2023년에는 총 4만 페이지에 달하는 성경 전체 설교 파일이 완성되고 2040년에는 영어로도 완성될 것입니다. 현재 3개의 파일만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재정이 준비되어 나머지 파일들도 순차적으로 혹은 세트로 출판되면 ‘천년 영향력의 꿈’도 결코 헛된 꿈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 동역자 중 특히 연로하신 분들은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받아 저희 문서선교 사역이 멋지게 성취되는 모습을 보시고 또한 네트영어를 통해 많은 선교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사를 돕는 모습도 보겠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물론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천국 가기 전에 아기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시므온과 안나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졌듯이 찬란한 꿈과 비전의 성취를 보고 싶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면 하나님이 그 소원을 이루도록 건강과 장수와 재정의 축복도 주실 것입니다.
그런 꿈과 비전을 심방예배 때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자연스럽게 권사님들의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 얘기들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알고 보니까 다 극심하게 어려운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은 문제와 상처의 연속이란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많은 상처를 겪습니다. 어떤 때는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친구나 교회도 위로가 되지 않고 하나님도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갑자기 성령님이 임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는 체험을 합니다. 그런 성령님의 은혜가 없다면 삶이 얼마나 고되겠습니까? 성령님은 선물(은사)을 주시기도 하지만 성령님 자신이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런 성령님의 임재와 위로로 기도하던 중에 절망의 고백이 희망의 고백으로 갑자기 바뀌는 장면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 고난 극복에 필요한 오기(5기) >
본문의 시편 기자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큰 고통을 당하고 마음속에 있는 고통과 상처를 시를 통해 토로했습니다. 본문 3-11절을 보면 그 상처와 고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연기처럼 덧없이 소멸하고 자신의 뼈가 숯 같이 탔다고 했습니다(3절). 그 상처와 고통으로 식욕까지 잃으면서 마음이 풀처럼 시들었고 몸도 말라가면서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4-5절).
또한 그는 당시 사람들이 부정한 새로 여겼던 광야의 올빼미와 부엉이처럼 되었고 고통으로 밤잠을 못 이뤄서 지붕 위에 짝을 잃고 외롭게 앉은 참새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6-7절). 또한 원수들이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고 조롱해서 심한 상처로 재를 양식처럼 먹었고 눈물이 계속 흘러서 눈물 섞인 물을 마셨다고 고백합니다(8-9절).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이 그런 고통에 던져졌다는 정죄의식 때문에 더 희망을 잃고 자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와 시들어지는 풀처럼 되었다고 고백합니다(10-11절).
이 시편은 <다윗의 시>란 표제는 없지만 그 분위기가 다윗의 시와 아주 유사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본문처럼 자신의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표현한 시편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상처를 딛고 위대한 성군이 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고난과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인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5가지 ‘기’로 시작되는 단어로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고 은혜를 재촉하고 위로를 가져다주는 최상의 도구입니다. 결국 고통과 상처는 기도하는 삶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도 상처와 고통 중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본문 3-11절에서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토로하자 바로 다음 12절부터 분위기가 반전되는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그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 환경의 변화 전에 자신이 먼저 변화되면서 입술의 고백도 달라지고 얼굴 표정도 달라집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고백과 기운이 사라지고 희망적인 고백과 기운이 펼쳐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응답 이상의 최상의 응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약 5년 간 형식적인 교인으로 있다가 그해 여름 수련회를 참석한 직후부터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반년 간 거의 매일 기도 중에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염없이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도를 마치면 매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휴지가 교회 의자 위에 수북이 쌓였는데 그렇게 기도한 후에는 늘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눈치도 없고 계산도 느리고 앞날을 챙기는 계획성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죄와 허물도 많습니다. 그래도 사고와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부족함이 없이 지켜주시고 채워주시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따라 살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가끔 “하나님이 그때의 기도를 기억하셔서 이렇게 붙잡아주시는 것 같다.”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기도 중에는 바르지 못한 기복적인 기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기도는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그런 기도들을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결국은 최상으로 들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잘못 구할 수도 있는 기도 내용보다 기도하는 삶 자체와 기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깨끗하고 겸손하고 간절하고 꾸준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내용까지 자동적으로 바른 기도로 보정해주시면서 최상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2. 기억하십시오
본문 11절까지 기도 중에 극심한 상처를 토로하던 시편 기자는 본문 12절부터 갑자기 절망적인 고백을 끝내고 희망적인 고백을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왜 그렇게 갑자기 절망적인 고백이 희망적인 고백으로 바뀌었을까요? 기도하면서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 그때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것을 기억해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힘들면 떠나지만 하나님은 힘들면 더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마다 좋은 기억을 많이 떠올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지금까지 지켜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현재의 고통을 비교적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유학할 때 처음 1년은 심한 외로움에 젖어 있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재정까지 없으니까 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뉴욕의 플러싱 하늘을 오가는 비행기를 보면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비행기를 타면 16시간이면 한국을 가는데...” 그처럼 외롭게 지냈지만 그때 성령님이 더 가까이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국일보 미주판 신문 광고를 보고 월세 300불에 3층 다락방 하나를 얻는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 9시 30분에 무작정 이사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그 집이 개척 절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 입구로 나가보니까 <보문사>란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신학생이 절에서 월세를 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고 눈치도 없는 모습입니까? 그렇게 살면서 지금까지 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때 스님이 잠깐 한국을 방문한 동안 그 집의 세입자 한 명이 대신 계약해서 그 집이 절인 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그 집에서 1층은 절로 썼고 2층 방 세 개에서는 각각 집주인 스님과 한 불법체류자와 줄리아드 음대에 다니는 한 노총각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3층의 다락방에서는 제가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혼자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가관이 펼쳐졌습니다. 3층의 다락방에서는 매일 기도와 찬송소리가 울려 퍼졌고 1층의 절에서는 매일 목탁과 염불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스님과 영성을 경쟁하거나 스님을 전도하겠다는 전투적인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 막된 사람이 아니기에 경우를 알고 예의를 지켜서 기도와 찬송소리를 줄여야 했는데 그때는 너무나 깊은 외로움에 젖어서 저절로 기도와 찬송 소리가 커졌습니다.
게다가 3층이 다락방이니까 얼마나 소리가 잘 울리는지 조금만 기도와 찬송 소리를 내도 1층까지 다 들렸습니다. 그 소리 때문에 1층에 모셔진 불상님도 많이 괴로웠을 것이고 스님도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처음 절을 방문한 사람도 그곳이 교회인지 절인지 많이 혼동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스님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도 점차 커졌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더 염려가 되었습니다. “저러다가 목탁이 깨지면 어떡하나?”
미안해서 소리를 최대한 줄였지만 조금 지나면 어느새 또 커졌습니다. 이국땅의 외로운 영혼에게 찬송과 기도는 유일한 힘의 원천이었기에 잘 억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3층에서 영적으로 눌러대자 몇 달 후 결국 스님은 그 절을 일반인에게 팔고 타주로 이사했고 저도 얼마 후에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눈치까지 없었던 가장 외로운 때였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가장 깊어진 때였습니다.
가끔 그때를 기억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고통과 상처가 심하면 과거의 은혜 받았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처음 구원받았을 때, 뜨겁게 눈물로 기도할 때, 순수하게 교회에서 사랑을 나누며 봉사할 때를 기억하고, 또한 길이 없을 때 신비하게 길을 열어주시고 삶의 위기를 삶의 기회로 만들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는 신비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기대하십시오
이제까지 지켜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의 필요도 준비해주실 것이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대한 기대로 발전합니다. 그처럼 이제까지 주님이 함께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주님이 함께 해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런 기대와 소망이 있으면 얼마든지 상처와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로울 때마다 더 가까이 찾아와주셔서 가장 외로운 기간을 가장 풍성한 기간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체험이 있으면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그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고난 중에 더 가까이 해주시고 우리와 우리 후대를 인물 되게 하시려고 지금도 준비하고 계신다는 찬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십시오.
4.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의 뜻과 소원을 하나님의 뜻과 소원에 맞춰 보정해가시며 우리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주실 것입니다. 다만 축복의 때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십시오. 본문의 시편 기자는 그 하나님의 때가 눈앞에 이르렀다고 고백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기도는 곧 응답입니다. 그런데 왜 가끔 기도응답에 회의를 품습니까? 하나님의 때에 대한 열린 시야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곧 응답이지만 그 응답은 사람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주어집니다. 그 하나님의 때가 최상의 때임을 믿고 그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축복의 때가 임박한 뚜렷한 전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가 깨지고 성령님께 온전히 붙잡혀서 그 영혼에 찬송과 감사와 눈물과 사랑이 넘치게 되는 때입니다. 또한 그때는 마음도 온유해지면서 비판하는 눈보다는 긍휼의 눈이 발달합니다.
요새 한국 교회를 보면 못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모습에 대한 적확한 비판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한국 교회를 불쌍히 보는 눈과 마음입니다. 또한 그런 잘못된 모습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좋은 교회와 교인이 되는데 힘쓰고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힘과 영향력을 열심히 키우십시오. 그처럼 마음을 낮은 골짜기처럼 만들고 힘써 내일을 준비하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5. 기뻐하십시오
지금까지 고난을 이겨내는 삶으로 기도하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삶을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축복의 때를 기다릴 때 아주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기다리면 찬란한 내일에 대한 확신이 커지면서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편 기자도 그 기쁨을 표현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본문 마지막 구절인 14절이 되니까 얼마나 분위기가 즐겁고 밝습니까? 처음에 그는 상심과 상처와 상실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후 하나님의 때가 곧 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마음속의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특히 “시온의 돌들이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는다.”는 말은 예루살렘의 회복 및 우리의 회복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릴 때 반드시 넘치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내일의 승리를 믿고 기뻐하십시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하나님이 다 알아주시고 반드시 손해 본 것 이상으로 넘치게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온전히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은 그저 믿어주며 살아야 할 대상입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아주시고 넘치게 보상해주실 하나님뿐입니다.
며칠 전에 사우나에 갔는데 한 노 직원이 씩씩거렸습니다. 평소에 항상 밝게 사는 분이었는데 그때는 험악한 상을 하고 씩씩거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아주 나쁜 놈 봤어요! 정말 못된 놈이에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거금이 든 지갑을 건물 앞에서 주워서 근처 파출소에 갖다 주고 경찰에게 자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는데 지갑 주인이 찾아간 후 고맙다는 전화 한 마디도 없이 입을 딱 씻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저씨! 세상이 원래 그래요. 대가를 바라고 좋은 일을 했다면 좋은 일의 의미가 반감되니까 그냥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고 잊으세요. 그러면 하늘이 알아주실 것입니다.” 설교조로 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란 말 대신에 “하늘이 알아주신다.”고 하자 비로소 그분이 하루 종일 속상했던 마음을 풀고 웃음을 회복했습니다.
나이 84세에 왕정 복위의 꿈을 품고 그 꿈을 마침내 90세에 이뤄내며 130세까지 살았던 여호야다의 이름의 뜻이 바로 “여호와께서 알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그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이 반드시 알아주신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살면서 어떤 시련과 상처의 순간을 만나도 흔들리거나 낙심하지 말고 최종적인 승리는 결국 신실한 성도의 것이 됨을 굳게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면의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 오기(5기) 있는 삶을 사십시오 >
한때 우리 한국 교회는 외적으로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진짜 중요한 내면의 가치가 많이 외면되었습니다. 진정한 축복의 최대 걸림돌은 내면의 외면입니다. 그런 부족한 점 때문에 요새 문제점들이 많이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을 겸손하게 자각하고 이제 외면의 축복에만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가치와 기쁨을 찾는데 더 힘써야 합니다.
지난주에 교회와 관련된 2가지 추문이 하루에 몇 천만 명이 방문하는 포털 뉴스 메인에 뜨면서 또 한국 교회가 치명타를 맞았습니다. 그런 보도가 한 번 나오면 무서운 조롱의 댓글이 달리면서 전도가 크게 막히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들의 교회에 대한 열심과 애정도 많이 약화됩니다. 그 2명의 주인공도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단 2명만 조용히 물러나면 그 문제는 점차 잠잠해집니다. 그러면 본인에게도 사는 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도 살릴 수 있습니다.
왜 그것을 못합니까? 자리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리를 버리면 자유를 얻습니다. 높은 자리보다 높은 자유가 더 귀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편정서보다 한 발짝 일찍 떠날 줄 알아야 자신도 살고 그때까지 쌓은 명성도 유지되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박수칠 때 떠나지 않으면 때로는 하나님이 강제로 데려가셔서 그의 명예를 그나마 유지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렇게 세상을 일찍 떠난 것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자리에 연연하다가 더 망가진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어진 힘을 잘못 사용할 때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 사람은 그나마 복된 사람입니다. 더 복된 사람은 힘을 잘못 사용했을 때 스스로 다윗처럼 깨끗이 회개하고 낮은 자리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복된 사람은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평소에 소리 없이 그 힘을 나누며 힘을 빼는 사람입니다. 이제 열심히 힘을 기르고 열심히 그 힘을 나누십시오. 특히 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고 후원하는 손길들이 되어주십시오. 주어진 힘을 잘 빼낼수록 영혼에는 기쁨과 행복감이 차오를 것입니다.
지금의 힘들고 안타까운 현실로 인해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세상을 바르게 하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도록 가정과 직장과 일터에서 이번 한 주간도 최상의 지혜를 발휘해 열심히 힘을 내어 사십시오. 무엇보다 기도하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뻐하는 ‘오기(5기) 있는 삶’을 통해 힘든 현실을 잘 극복하고 내면의 회복을 통해 외면의 회복과 환경의 회복을 앞서 견인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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