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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하14: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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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1.22 http://www.john316.or.kr |
열왕기하(32) 잘 나갈 때 잘하십시오
(왕하14:1-16)
북 이스라엘의 12대 왕 요아스 제 이년에 남 유다의 8대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남 유다의 9대 왕이 되었습니다(1절). 아마샤는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9년을 다스렸습니다(2절).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만 다윗과는 같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했지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무속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3-4절).
아마샤는 집권 초기에 부친 요아스를 암살한 세력의 견제로 왕권이 많이 흔들렸지만 정직한 신앙을 바탕으로 외적으로는 국력을 신장시키고 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해 마침내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지만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5-6절). 그처럼 정국이 안정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남부 변방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한 에돔 정벌에 나서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에돔의 수도인 셀라를 정복해 이름을 욕드엘이라 붙였습니다(7절).
에돔 정벌 후 용병으로 왔던 북 이스라엘 군사들이 돌아가면서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삼천 명을 죽이자(대하 29:13)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8절).” 아합 이후 남 유다는 군사력의 열세로 북이스라엘에 눌려 지냈는데 에돔 정벌을 계기로 아마샤가 교만해져서 교만한 어투로 남북회담을 제안했지만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은 그 말을 회담제의가 아닌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요아스 왕이 아마샤 왕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했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9절).” 이 비유에서 레바논 가시나무는 아마샤 왕을 상징하고 레바논 백향목은 요아스 왕을 상징하고 레바논 들짐승은 요아스의 군사들을 상징합니다. 즉 가시나무(아마샤 왕)가 교만하게 백향목(요아스 왕)에게 딸을 달라고 요구해서 레바논 들짐승(요아스의 군사들)에 의해 남 유다가 짓밟힌다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와 함께 요아스 왕이 더 이상 교만한 태도로 망하는 길로 가지 말고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마샤 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아스 왕이 군사를 몰고 와서 두 군대가 벧세메스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11절). 그 벧세메스 전쟁에서 유다 군사들이 패배해 각기 장막으로 도망쳤습니다(12절). 역대하 25장 20절에 의하면 아마샤의 패배는 에돔 신을 섬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지만 에돔을 정복하고 승리에 도취한 아마샤의 교만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벌어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전쟁은 남북분단 후 벌어진 첫 남북전쟁이었습니다. 그 <벧세메스 남북전쟁>에서 요아스 왕이 아마샤 왕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군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과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13-14절). 그 후 요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의 13대 왕이 되었습니다(16절).
< 잘 나갈 때 잘하십시오 >
본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란 교훈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아마샤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잘 통치하다가 에돔 정복 후 바로 에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고 교만에 빠져 결국 비참한 나락에 빠졌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기에 공든 탑을 세웠을 때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잘되고 편할 때 더 하나님께 매달리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성공했다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큰 패배가 기다리지만 성공했어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큰 성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은 잘 나가는 부흥사였지만 그는 최대로 잘 나갈 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최소화시켰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고 열정이 넘쳤으며 자기 확장의 꿈과 비전도 컸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기 존재를 희미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시험은 보통 큰 시험이 아니지만 세례 요한은 그 시험을 이겨내고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초라해졌습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위대성을 잘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처럼 늘 겸손한 삶을 훈련하고 자리는 높아져도 자신은 낮추십시오. 자신을 낮추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람이나 무능력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이란 사양하거나 몸을 사리거나 자꾸만 움츠려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사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 감당하기에 벅차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사명과 직분을 감당하다가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 일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 사명에 충실한 것이 바로 진짜 겸손입니다. 사람은 못 나갈 때보다 오히려 잘 나갈 때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할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열심히 살아 성공하되 성공했을 때 잘하십시오. 그처럼 잘 나갈 때 잘함으로 더 큰 축복과 성취를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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