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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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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 12월15일 http://dabia.net/xe/sermon/725947 |
메시아 질문
마11:2-11,
대림절 셋째 주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운명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친족 관계였고, 예수님의 출생을 천사가 알려준 것처럼 세례요한의 출생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각자 활동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서로 견제하기도 했는데,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이런 관계는 훗날 초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세례요한 추종자들은 대세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흡수되었습니다. 교회가 세례를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양측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의 제3독서에도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합니다. 절대 권력이 비판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 요단강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기자는 마 3:1,2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도 요한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분이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몰아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전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삶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위협이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선포한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전적인 사회개혁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선포하다가 헤롯에 의해 괘씸죄로 걸려 지금 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기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도 어느 정도는 예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메시지가 한때 민중들을 각성시키기는 했으나 실제로 세상이 변화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자신의 거룩한 꿈을 실제로 성취할 있는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메시아사상은 그가 구약성서에서 배운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가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그 상황을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1:2,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실 그이’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민족이라 불릴만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기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메시아사상은 구약성경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사 35:1-10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사 35:4절은 이렇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리고 이어서 모든 장애인들의 치유와 모든 왜곡된 삶의 원상회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룰 세상입니다. 세례요한도 이런 메시아 전통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대망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는 주변의 강대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로마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나라를 완전히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신앙적인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하나님이 무능한 신이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민족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면서 자신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런 수난을 당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으로 노력했지만 유대민족의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만연할 때 전혀 새로운 생각을 한 선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와서 이 세상을 직접 통치할 순간이 온다고 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상에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메시아사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인생의 실패자들만이 꿈꾸는 망상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미래의 세상에서, 즉 피안의 세상에서 이루어보려는 부질없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회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없지 않으나 알고 보면 메시아사상은 훨씬 적극적인 세계관입니다. 삶과 역사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이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세상의 삶을 개량하는 정도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겁니다. 그런 변화는 단순히 연봉을 늘리고,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하고, 예술적인 감수성을 키우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세상을 가리킵니다. 어떤 교우는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하더군요. 그가 비관주의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 놓인 삶의 기쁨을, 존재의 기쁨을 잘 알고 있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뚫어보는 겁니다. 어른이 되면 소꿉놀이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하나님을 옳게 찾게 됩니다.
요한이 던진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라는 메시아 질문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징표를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확실하지 않으니 메시아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소문이 많았습니다. 엘리야,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물으면서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메시아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런 답변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에 부합됩니다. 앞에도 인용한 사 35장과도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파괴된 삶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시각장애인, 걷지 못하는 사람, 나병환자, 청각장애인들의 모든 장애가 회복됩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도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사건들에 대한 보도가 종종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린 사건도 세 군데나 나옵니다. 여기에 가난한 자도 포함됩니다. 가난도 장애처럼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기에 이런 일들은 일어나야만 하고, 일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희망의 연장선 안에 자리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도 그런 확실한 답변을 듣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시각장애인을 고치셨듯이 감옥에 갇힌 자도 석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읽으신 이사야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이라는 구절도 들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전통에 서서 활동하셨던 예수님이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당대의 의인인 요한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6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고, 루터는 예수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현대어 영어번역은 예수님을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각각 느낌의 차이가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복은 마 5장의 팔복에 나오는 것으로서,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실족 운운하신 이유는 당시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도 실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을 풀어내지 않은 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당신은 거짓 메시아가 아니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거짓 메시아가 많았습니다. 요즘도 메시아 연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무턱대고 우기거나 또는 그렇게 확신하는 이들은 유사 메시아입니다. 독재자들에게서 그런 일들이 흔히 일어납니다. 부모들도 자칫하면 자녀들 앞에서 메시아처럼 행동합니다. 이렇게 메시야 연 하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출몰하였기에 예수님도 그런 유에 속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로마 당국에 고발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실족한 사람들입니다.
실족은 그 사람의 인격이 비뚤어졌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어떤 사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이비 메시아로 단정한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유대인들의 메시아 희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에는 달라진 흔적이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개별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질문, 또는 반론은 예수를 믿는 않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증거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온갖 좋은 삶의 조건을 허락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왜 방관하느냐, 악을 왜 용납하느냐, 이 고달픈 삶에서 나를 당장 구원해주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하소연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시험에 드는 겁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게 바로 실족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이걸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아님)이라는 성격이라고 표현합니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교회력 성서일과 A년 성경묵상에서 ‘now-and-not-ye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메시아는 이미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가 초림의 예수님입니다. 그걸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창조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우리는 메시아가 다시 오시길 기다립니다. 다시 오실 이가 재림의 주이십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온갖 모순, 딜레마, 비밀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대림절 신앙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이라는 신학개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가 자기 사명에서 실패한 것을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비판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모를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더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음이 이미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죽음은 아직 아니지만 이미 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종말 생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메시아가 행하신 구원이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우리 현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금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요 17:3)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습니다. 폭력과 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여전히 온갖 불행을 부둥켜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음 아파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쓰고 투쟁하는 것은 좋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메시아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인정하신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뭐 이따위냐, 내 인생이 뭐 이리 안풀려,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니냐, 하고 실족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런 세상에 이사야의 메시아 희망이, 세례요한의 메시아 질문이 가리키고 있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가, 곧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순간을 지금 치열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대림절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제2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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