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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7: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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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 12월22일 http://dabia.net/xe/sermon/727277 |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7:10-16,
대림절 넷째 주일,
2013년 12월22일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요즘 한국사회가 양측으로 나뉘어 유달리 시끄럽습니다. 가장 크게 충돌하는 문제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 문제로 기독교계도 입장이 크게 둘로 갈렸습니다. 비교적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보수적이고 체제 안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교회가 정치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양자 각각 일리가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적 전통에 서 있다면, 후자는 제사장적 전통에 서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성경이 대개 신앙적인 용어로 기록되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과격한 정치적 발언을 한 선지자들도 많습니다. 이사야도 그런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사 7:10-16절은 이사야 선지자와 아하스 왕의 논쟁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다툼입니다. 이런 다툼이 벌어진 이유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당시에 근동의 국제정세는 아주 복잡했습니다. 앗수르가 절대적인 패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를 대항하려고 아람(시리아)과 이스라엘(에브라임)이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그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유다는 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요즘도 서로 국가 이익에 따라서 군사동맹을 맺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 7:2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 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유다가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전쟁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전략 요충지를 점검하고, 앗수르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볼 때 앗수르 군을 불러들이는 일은 잘못입니다. 앗수르 군이 일시적으로 유다를 도와줄지 모르나 결국은 유다를 속국으로 삼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늑대를 막으려다가 오히려 사자를 불러들이는 격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정말 심각한 문제로 삼은 것은 아하스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면서 이사야와 아하스의 다툼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여기서 징조는 하나님이 앗수르의 도움 없이도 유다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식으로라도 왕의 마음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깊은 데’는 지진과 같은 현상이고, ‘높은 데’는 천둥이나 번개 같은 현상을 가리킵니다. 고대 시대에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현존을 보증하는 실증적인 징조들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이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가서 히브리 민족을 구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히브리 민족이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 징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로 돌아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몸이 순식간에 나병이 걸렸다가 치료되는 현상이었습니다(출 4장).
이사야 선지자의 제안을 들은 아하스 왕은 1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겉으로만 보면 징조를 구하라는 이사야의 말이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진술이 오히려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하스의 말이 불신앙적입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묻는 일을 하지 않고 무조건 앗수르 군대를 불러오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건한 포즈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세속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사야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부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아하스 왕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사야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틀릴 때도 많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많습니다. 아하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을 대적하려면 실제로 앗수르에게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과 비슷합니다. 현재 남한에는 미국 군대가 60년 이상 주둔하고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남한 혼자만의 힘으로 북한을 맞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사야도 아하스의 외교 정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아하스가 하나님보다는 앗수르의 군사력에 더 의존해서 정책을 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아하스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하스의 마음은 이미 닫혔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은 선지자로서 아하스 왕을 책망하고 경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다윗의 집은 아하스가 속한 다윗 왕조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을 고달프게 했습니다. 주변의 제국들 틈에서 눈치를 보다가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일부러 나라를 말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자신들의 능력이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왕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징조를 구해보라는 말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 신앙의 토대가 허물어졌습니다. 이사야의 책망 중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을 다윗 왕조가 괴롭힌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거나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자신만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이사야의 심정이 어떤지가 거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하스가 하나님 신앙에서 이제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 겁니다. 이사야의 말을 듣고 아하스를 비롯한 다윗 궁의 고위 정치인들은 이사야를 미쳤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국제 정세를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져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에게 이사야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주실 징조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탁을 받은 선지자는 왕이 듣기 싫어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탄생 고지에 대한 마태복음 기자의 보도에서 다시 인용되었습니다. 오늘 제3독서인 마 1:18-25절에는 주의 사자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 앞에 나타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약혼은 하였으나 동거하기 전에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혹스러워하던 요셉에게 주의 사자는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에 의한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처녀 잉태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이사야의 본문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정녀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고, 다른 한쪽은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한쪽은 처녀 임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쪽은 거기에 아무런 성서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의 입장도 서로 다릅니다. 칼 바르트나 톰 라이트 같은 신학자는 비교적 옹호하는 입장이고, 판넨베르크는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 본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 7:14절에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알마’입니다. 알마는 처녀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알마가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처녀라는 뜻의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 임신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믿는 사람들은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사람을 향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기본적인 입장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그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떤 근원적인 진리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임신이 가능하다 아니다, 하고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동정녀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이름인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교회 출석이 어느 정도 되는 분이라고 한다면 이 단어와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쉽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 우리에게 확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습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확신이 들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모든 걸 놓치고 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구원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런 표현이 상투적이어서 시시하게 들린다 해도 저는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말은 한번 들어서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빠져 있으며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와 죽음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지식이나 인격의 차이와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연민이 강합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높이려고 합니다. 거꾸로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이 크게 상처받았을 때 나타나는 반작용입니다. 성서는 바로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보적인 기독교 교리를 단순히 종교적인 것으로 폄하하면 곤란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와 죽음은 인간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는 가르침입니다.
그걸 일상적인 경험으로 바꿔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인간 수명을 50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서라도 50년의 수명을 얻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50년은 영원한 시간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가 되신 분들은, 또는 정신적으로 일찍 철이 든 분들은 젊은 시절의 그 열정들이 부질없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를 확대하려고,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려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한여름 장마철의 잡초와 비슷합니다. 찬바람이 부니 모든 것이 멈추고 맙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무상하고 잠정적인 삶에서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이 시대는 임마누엘 신앙 없이 작동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못할 게 없는 듯합니다. 옛날에 하나님께만 기대할 수 있었던 것들을 지금은 실제로 사람이 다 합니다. 1천 년 전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신(神)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웬만하면 자가용을 굴리고, 냉난방이 구비된 집에서 살고, 웬만한 병은 의사들이 고치고, 냉장고에 먹을 게 가득합니다. 스스로 신적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임마누엘 신앙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을 종교적인 장식물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일로 인해서 쉽게 흔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 소식을 들은 유다 왕 아하스와 그 백성들의 마음이 풀처럼 바람에 흔들린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징조가 아니라 앗수르의 군사력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설교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제2 독서인 롬 1:4절에서 바울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임마누엘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대해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임마누엘과 똑같은 뜻입니다. 부활이 그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부족한 게,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쫓기지도 않고 누굴 쫓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화가 가득합니다(롬 1:7). 거꾸로 임마누엘 신앙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참된 만족, 즉 영적인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의 은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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