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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2: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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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 12월29일 http://dabia.net/xe/sermon/728823 |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2:10-18, 성탄절후 첫 주일,
2013년 12월29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성탄절후 첫 주일인 오늘 설교 제목은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 2:18절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따온 제목입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서 ‘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마귀에게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마 4:1-11절이 이를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사십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기도만 하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나타난 마귀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십일을 굶었으니 예수님의 눈에 돌덩이가 실제로 떡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또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법정에서 받은 재판과 십자가 사형 판결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대답의 실체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는 수학 공식과 같습니다. 수학공부에서 직각 삼각형의 피타고라스 정리(a2+b2=c2)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서도 예수의 시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교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사죄, 구원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없으면서 이런 교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의 근본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하지 않거나 막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교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우선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왜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해야만 했을까요? 그분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니, 그냥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단칼에 없앨 수도 있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도 말 한마디로 사라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도 없고, 전쟁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시기와 질투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초능력이 그분에게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사람들이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걸까요?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곤란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소에 이런 질문을 하셨을 겁니다. 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런 도전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믿기만 하면 해결돼, 또는 성령을 받아야만 돼, 하는 대답을 하셨나요?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예수의 고난과 우리의 구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한 채 믿을 수 없고, 알지 못한 채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웁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무질서하고 불안하고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똑같은 문제로 고민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히 2:8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만물이 복종하고 있지 않다.’는 이 진술은 인간 실존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우리는 만물과의 싸움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암에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어린 자식들이 왕따 당할 염려도 하는 등, 구원받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립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히 2:15절에 따르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는 이 진술은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걸 실제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거기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초대형 건축물을 만든 사람들은 그걸 통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만 매달리는 행태도 역시 그 밑바탕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초연하게 대하는, 소위 도사 연하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도사들은 일단 드물고, 그런 경지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죽는 순간까지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깊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 힘이 왜 그리 막강할까요? 왜 죽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14b절에서 죽음의 세력을 마귀가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존재론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건강식품을 취하고, 의료의 도움을 많이 받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도 죽음의 세력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 운명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의 세력,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에 따른 노예 상태라는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살아있는 것만을, 화려한 것만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 성공 신화, 웰빙을 부추기는 상품들에 둘러싸인 채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입니다. 설령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그건 단지 드라마일 뿐이지 실존적인 경험은 되지 못합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현대인들은 아래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죽음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끝없이 자신의 삶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수명을 늘리고, 복지를 향상시키고, 마음 수련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생의 허무주의에 깊이 빠지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세력이 마귀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문제도 다르게 대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직접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본문 1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멸하셨다고 했고, 15절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스스로 극복하거나 거기에 완전히 종속당하는 게 아니라 마귀를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예수님이 실제로 마귀를 멸하셨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4절에서 ‘죽음을 통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게 듣기에 따라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를 멸했다는 건 마귀를 굴복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려고 했던 이들을 죽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인 마귀를 멸했다는 게 말이 될까요? 말장난은 아닐까요? 설교 앞부분에서 말한 대로, 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해야만 했을까요? 속 시원하게 말씀 한마디로 다 해결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우리는 모릅니다. 의학이 이렇게 발전했는데도 선천적인 장애인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신학, 철학, 과학이 발달하면 이 모든 비밀이 다 밝혀질까요? 조금 가까이 갈지는 몰라도 완전하게 밝혀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 밝혀진다면 바로 그게 성서가 말하는 종말이며, 예수 재림으로 이뤄질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분적인 대답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합니다.
여기서부터 설교를 좀더 세심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오히려 구원의 길이냐, 즉 우리를 살리는 길이냐에 대한 설명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마귀에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서 있다는 건 아닙니다. 마귀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죽음도 큰 틀에서 하나님 통치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우리와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14절이 그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님은 초능력을 행사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육체적인 한계를 그대로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칠 정도로 죽음에 대한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난과 죽음에 맞서야만 했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입니다. 거기서 인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과 똑같은 육체적 운명에서 살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역할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모든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사죄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야만 대제사장으로 참된 구원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맡으신 대제사장의 역할을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천군천사를 데려다가 악을 싹쓸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돕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18절이 그걸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시어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죽음을 통해서 죽어야 할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사들이 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사들이야말로 초능력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초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고 고난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돕습니다. 이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핵심입니다. 불교의 석가는 천수를 다 살면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중생들에게 각자의 내면적인 구원의 세계를 찾아 용맹 정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훌륭하신 선생님이십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친 게 아니라 그냥 낮아진 겁니다.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의식화시킨 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운명을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래야만 육체적인 한계 안에서 시험받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실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대답을 이미 생각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 이후로 아무도 홀로 시험받거나 고난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우리는 아무도 홀로 죽지 않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죽는 순간에 임종을 지키려고 그 자리에 온 가족들도 슬퍼하기는 하겠으나 실제로는 죽을 사람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임종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나 없으나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죽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죽음은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혼자 통과해야 할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그 순간의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2천 년 전 세상에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며칠 전에 성탄절을 보냈지만 아직도 성탄절 절기입니다. 단 하루, 아니면 몇 주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성탄절 절기로 채워져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영광을 떠나 어둠의 현실인 이 땅으로 오시어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후 첫째 주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탄절의 본질인 성육신 신앙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더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받고 고난을 당하셨으니 여러분 인생에서 시험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두려울 때도 있겠지만 거기에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으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 그 순간에 하나님이 비밀한 방식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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