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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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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4절.
1절-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
기도 올립시다.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만들어지며 살 수 있는 은혜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누리고 ‘어떻게 하면 편안히 살까’ 그런 소원 목적으로 살고 있지만 저희들은 어찌하든지 한 인생이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우리의 몸속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어차피 천국에 갈 저희들인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 기쁨으로 당당하게 잘 만들어져서 들어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귀한 은혜 주시고 큰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이제 저희들에게 말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명철한 지혜와 총명 주시고, 모든 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의를 이루어 갈 줄 아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경에 대해서 좀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본문 이 에스라서는 구약의 역사계시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66권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란 말은 우리말로 거룩한 경전이라. 해석을 한다면 ‘구별된 책이라. 구별된 글이라. 구별된 경전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외에도, 기독교 외에도 다른 종파에서도 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며 보는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이라든지 몰몬경이라든지 코란경이라든지 등등 있다 그 말이요. 그들은 성경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책처럼 동동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자는 이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종교와, 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책과 똑같이 경전시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종교운동 종교문화 종교건설을 눈부시게 크게 이룩한 종교 운동가도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신학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성경을 모르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자요, 또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대로 성문적으로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해도,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종교활동이라든지 종교 문화활동이라든지 종교 예술이라든지 종교부흥을 크게 했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거니’ 자타가 그렇게 알고 있으면 이건 스스로 위안제 마시는 겁니다. 큰 잘못이라 그 말이요.
우리가 근본적으로 성경을 알아야 되겠지요? 또 다른 종교의 경전과 똑같은 경전으로 알고 있으면 안 되고.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종교의 경전은 계시가 아닙니다. 이종교인들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성경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전 시 한다고 그랬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이종교의 경전과 이 성경과 전혀 다른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들의 경전은 계시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가 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원문은 성경 기자들이 히브리문자나 아람문자나 헬라문자로 기록을 하였는데, 그 용어 역시 인간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말을 가지고 기록을 한 겁니다. 성경을 기록할 그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몇 단어나 됐을까? 우리 한국말은 단어가 몇 만 단어입니까? 한 4, 5만 단어 되나? 영어는? 몇 십만 단어가 되지? 3, 4십만 단어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신구약 성경의 단어가 몇 단어가 되겠느냐? 아마 20만 단어도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단어보다 상당히 적지요. 어쨌든 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그 단어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다 그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에게 기록영감의 감화를 입혀서 기록케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주후 2000년대가 되면 전자제품이라든지 컴퓨터 등의 전자기기가 많이 나오고, 비행기라든지 기차라든지 이런 것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아셨을까요? 그런데 아셨다면 왜 성경에 비행기라는 그 말을 안 썼을까 그 말이요. 성경에 비행기라는 말은 없어요. 성경에 컴퓨터라는 용어도 없어요. 그런데 왜 안 썼을까 그 말이요.
그러면 불과 몇 십만 단어를 가지고, 20만 단어도 안 되는 이걸 가지고 그 때의 그 존재와 활동, 그 때의 사람들의 성분 성격 또 감정과 느낌 이런 것을 기록으로 충분히 나타낼 수 있을까? 그리고 무형적 활동, 또 유형적 활동, 또 마음의 움직임 이런 모든 종류의 활동을 축소를 시켜서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걸로 그냥 다 나타낸 것이겠느냐? 참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 당신의 하시는 그 사역성 설계성 계획성을 기록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제한된 인간의 용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의 것을 다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이 된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쓰는 단어를 가지고 신령계도 나타내시고 물질계도 나타내시고, 감축하지 않고 다 나타내셨습니다. 이미 하신 것도 나타내시고, 앞으로 하실 것도 나타냈습니다. 완전히 기록해서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사역적 종별적으로 무한의 세계를 글자 자체로서는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런 면을 우리가 전제로 하고 본다면 이 성경은 그 때 그 시대의 용어를 가지고 기록을 한 거지만 그 때 그 시대의 용어의 뜻 이상으로 무한한 뜻이 담겨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전학적으로나 원어학적으로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신령계의 무한한 계시성이 들어있다. 아주 심오한 뜻이 한 가지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많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 당시의 용어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예수님을 ‘인자’라 할 때 우리 한글로는 ‘인자’라 쓰고 그 뜻은 ‘사람의 아들이라’ 그렇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냐? 인자가 그 뜻 만이냐? 그게 아니라 그 말이요. ‘인자’라 그럴 때는 또 인성을 말하고 있으니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진실’이라 그러면 이 말은 일반적으로 거짓이 아니고 참을 말하는데 우리가 성경으로 볼 때는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다 그 말이요. 말씀 속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단순히 학적으로 대지를 나누고 소지를 나누고 소소지를 나누고 이렇게 하면 허점이 많아진다 그 말이요.일반 공부는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대지 나누고 소소지 나누고 문단을 나누고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 말이요. 이 성경에 기록된 한 마디의 말씀 속에는 이 우주를 다 집어넣은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한 계시가 인간의 단어에 의해서, 또는 활동에 의해서 감소나 축소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특수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무한히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왜 여기는 이 단어를 썼을까?’ 하고 단어적으로 생각을 말고 그 단어의 앞뒤로 보아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여기에 이 단어를 쓰셨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아야 한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이방종교인들의 경전은 그런 게 없다 그 말이요. 계시가 없다 그 말이요. 그리고 성경 외에 다른 경전은 신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단어 속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구원사역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현재적인 구원도 있고 과거적인 구원도 있고 미래적인 구원도 있는데, 이방종교의 경전에는 그런 게 없어요. 일반서적에도 그런 게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만 있다 그 말이요.
‘과거적 구원’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 예정 계획 설계 창조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걸 과거적 구원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구원’이라는 용어를 안 붙이고 딴 용어를 붙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구원이라고 붙이는 것이 제일 좋다 그 말이요. 왜 그런가 하니 성경에 보면 ‘너희들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서부터 나온다’ 그랬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 예정 계획 설계 창조 이런 것이 과거적 구원으로 들어간다 그 말이요.
현재적 구원은 진리와 성령의 영감으로 역사하시는 게 있고, 환경과 사건을 동원하심이고, 또 내게 오셔서 감동으로도 깨닫게 하시고 권고하심이 있습니다. 또 미래적 구원이 있는데, 물론 현재적으로 안 믿는 사람에게는 미래적인데, 1차적으로는 기본구원이 되고, 2차적으로는 성화구원이 되지요. 이미 믿는 사람에게는 성화구원이 된다 그 말이요. 앞으로 구원을 많이 이루어가야 된다 그 말이요. 그래서 미래적 구원이라.그리고 영원한 통치성과 지배성과 활동성과 사용성과 느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성경 속에는 다 들어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먹고 마시고 잘 사는 이것이 인생의 큰 목표요, 인생의 삶으로써 전부입니다. 그렇지요? 제일 크게 본단 말이요. 그러나 우리 기독자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먹고 마시고 사는 이것은 거론할 것도 못 되는 겁니다. 2차적인 문제요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성화구원을 잘 이루기 위해서 일도 하고 장사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그렇다 그 말이요. 구원을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구원이 제일 큰 걸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구원을 위해서 사는 걸로 되어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잘 먹고 잘 사는 이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이 성경말씀 외에 다른 책이나 경전을 보고는 성경처럼 깨달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이라고 붙여진 것은 인간의 용어로 붙여진 겁니다. 경전은 인간이 행동적으로 경전의 내용처럼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겁니다. ‘하라’ 하면 하면 되는 거고, ‘하지 말아라’ 그러면 안 하면 되는 거요. 그걸로 다 된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경전과 다르기 때문에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해도, 종교의식과 제도를 다 지켰다고 해도 되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성경에 보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그 말씀대로 다른 신을 안 섬기고 하나님을 섬겼고, 우상을 안 만들고 부처 같은 그런 거 안 만들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 다 잘 믿은 거냐? 성경대로 바로 한 거냐? 그게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런 우상은 우리가 섬기지 말아야 하고 우상은 만들지도 말아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격자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경전으로 착각을 하지 말아라. 또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것만 지키며 살았지 인격자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우상을 안 섬겼더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그 말이요.
성경은 하나님과 만나자는 약속이요 언약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인격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순종으로 들어가야지요. 하나님을 안 만나려면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그런 거 아닙니까? 성경을 안 보고 못 깨닫고 예수 믿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인격자 하나님은 못 만난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글로 써서 편지를 붙이면 사람이 그걸 받아가지고 읽지요. 성경은 단순히 그런 식이 아니라 그 말이요.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다음에 깨닫게 되고, 마음에 충격이 오고 은혜가 되고. 이렇게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이게 설교라 그 말이요.
설교자가 성도의 중생된 영은 찌르지 못한 채 논리적으로 설교학적으로 강연학적으로 딱딱 맞춰서 대지 소지 소소지, 뭐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딱 짜서 설교를 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전달한 것이겠느냐?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다 그 말이요. 경전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해도 계시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말이요.
예를 들어서 사람에게 거짓말한 죄도 없고 미워한 죄도 없이 살았다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훌륭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런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 안 지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너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 그 말이요. 사람이 만들어졌느냐? ‘사건을 잘 처리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네가 바로 만들어졌느냐? 인격적으로 만들어졌느냐’ 그게 문제란 말이요.
사람 만들어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사람 안 만들어진 사람 참 많습니다. 학박사라도, 아무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도, 높은 자리에 있어도, 돈이 많아도, 사장자리에 있어도 사람이 안 만들어진 사람이 참 많다. 공부를 우등생으로 잘 했는데 사람이 안 만들어진 사람이 많다. 아무리 법을 가지고 다스려도, 법을 조목조목 따질 줄은 잘 아는데 자기가 인격적으로 안 만들어진 사람이 많다. 그 면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어떤 부분 면에서는 전문적인데 사람이 인격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그 어디다 쓰겠느냐? 사람이 어떤 한 부분적인 면에서 그 면만 전문이 됐지 사람이 안 만들어져 놓으니까 돈에 펑펑 넘어갑니까? 그 무슨 짓들이냐 그 말이요. 이렇게 되면 사람이 많이 배웠다는 그 면이 추해지고, 저질적이 돼버리고, 속이 들여다보이게 됩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만 그 자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는 하나도 안 지었는데 사람이 안 만들어진 사람이 많다.
사람 바로 만드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어른을 만났을 때에 그 관계성, 아이를 만났을 때에 그 관계성, 같은 또래를 만났을 때에 그 관계성이 그 때마다 정말 하나님이 말씀대로 바로 돼 있으면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 보기가 드물어요.
공부를 많이 했어도 인간관계적으로 멍청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대인관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인관계를 짓기 위해서 돈을 함부로 쓰고, 못된 것만 먹고, 사람을 해치는 것만 먹고. 그것도 사람이 안 된 거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인류의 역사와 인류의 시조가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것은 ‘인간은 언제부터 태어나서 발전해 나가고, 얼마나 번식해 나가고, 인류의 종족이 얼마나 흘러나왔느냐’ 하는 이것만 단순히 가르쳐 주려고 성경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안 맞는 게 많이 있어요. 우리가 마태복음에 보면 ‘여호사밧이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왕 사이에 빠진 인물들이 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마태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기록을 했느냐? 그걸 기록케 한 성령님이 영감으로 마태를 감화시킬 때에 그걸 몰라서 빠뜨리고 그렇게 기록케 했느냐?
그리고 벨사살과 느부갓네살 왕 사이에는 인물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벨사살 왕 다음에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 나오니까 ‘그럼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선친인가’ 하는 그것도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이 역사서라고 해서 단순히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된 건 아닙니다. 이 성경말씀은 역사성을 띤 역사적 계시서이지 역사책은 아니라 그 말이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기 위하여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로써 활동하게 한 것이 기록이 된 겁니다.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존재를 동원시켜서 그 사실을 기록케 해서 남겨서 깨닫게 하려니까 사건을 일으키고 존재를 동원시킨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의 영감의 감화라 그 말이요.
다른 일반 책은 그게 아니지요. 많은 역사 중 좋은 역사 나쁜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교훈의 가치가 될 만한 것만을 뽑아서 기록한 것이 세상역사라. 그러나 성경은 일어난 역사 중에서 교훈이 될 만한 것을 뽑아서 기록한 아니고 기록목적을 두고 역사와 사건과 존재를 일으켰다 그 말이요. 일으켜서 그 다음에 기록케 해서 남겼다 그 말이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존재나 활동이나 사건들은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의 영감의 감화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학교의 교과서라든지 역사책이 있는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말이요.
계시를 기록케 하려고 활동된 것 중에 성경에 빠뜨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교양서적과 도덕서적과 성경과의 다른 점은 바로 그 점입니다. 다른 역사서는 성령의 활동의 감화로 움직인 게 아닙니다. 일반서적은 일반역사가 있은 후에 교훈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만 골라서 기록한 것이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골라서 기록한 게 아니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필요하고, 성경이 필요하니 사건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귀나 까마귀 뱀 등을 다 등용시킨 겁니다. 이것을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라고 한다.
이제 이렇게 활동을 해서 그것을 기록한 것을 기록영감의 감화라고 합니다. 아까는 활동영감의 감화이고, 이제는 그걸 기록케 하는데 아는 것만 기록케 한 것이 아니고 활동영감의 감화로서 활동된 것은 전부 다 기록영감의 감화로써 기록이 되었다 그 말이요.그런고로 이 성경은 그 시대의 사건을 개인적인 용어로 기록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방언으로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쓰는 용어와 문자로 극히 제한된 단어를 가지고 기록을 했는데 철학자들이나 국문학자들이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학자들을 동원해서 기록케 한 것이 아니라 기록영감의 감화를 입힌 사람을 동원시켜서 기록을 했다 그 말이요.
성경을 일반적으로 깨닫고 가르친다면 자칫 잘못하면 영적인 면에서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게 되는 심판거리가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단순히 골목길에서 사람 죽이는 그것만 살인으로 알지 말고 설교하는 자가 강단에서 성경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이 면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 말이요.
활동영감의 감화 그 다음에 기록영감의 감화가 있는데, 성경은 글 잘 쓰는 자를 뽑아서 기록케 한 것은 아니다. 학자 문학자를 들어서 한 게 아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깨닫는 것도 인간의 머리로 깨달아지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성령의 감동 감화로 깨닫는 것이다. 이치가 그렇다 그 말이요. 성경을 기록케 하기 위해서 활동영감의 감화로 사건 환경을 일으켰지, 그 다음에 기록영감의 감화로 기록케 했지, 그러니까 그 다음에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도 성령의 감동 감화 없이는 안 된다 그 말이요.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기록한 것이냐? 모두 다 나를 위해서 기록해 놓은 겁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나를 위해서 기록케 하셨다.
이 성경은 4000여 년 동안 기록이 됐단 말이요.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성경도 안 보고 내동댕이치지요? 그건 심판이지 뭐.성경을 깨닫게 하는 영감을 각성적 영감이라고 하는데, 조명적 영감의 감화를 받아야 깨닫는다. 성경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세상이 뭔지 알게 되고 사람이 점점 달라져요. 사람이 고상하게 달라져요. ‘잘 먹고 잘 입고 높은 집에서 살고 하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게 됩니다. 깨닫고 보니까 희한한 세계가 다 보인다 그 말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낸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아이들’이라는 말은 나이 어린 아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자를 말합니다.
나이 어린 아이를 흔히 말하는 대로 ‘아이들은 겸손하고 단순하고 어른을 잘 의지한다’고 하면서 여기서의 아이를 그런 의미로 알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아이들의 특징은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 면은 어른은 못 따라갑니다. 누차 말씀드립니다마는 성경은 경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활동적 영감의 감화로 사건 환경이 되어졌고, 그 다음에 기록영감의 감화로 기록이 됐고, 그 다음에 조명적 영감의 감화로서 밝아지고, 각성적 영감의 감화로서 깨달아진다 그 말이요.
이 에스라서는 뭘 가르치는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이방나라에서 포로로 살았다. 그 다음에 스룹바벨이 돌아오고, 학개 에스라 같은 선지자가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하는 이것이 전부냐? 성경은 인간이 쓰는 용어로 썼기 때문에 쉽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무한히 깊고 어렵다 그 말이요. 성경은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그 목적이 뭐냐? 그 목적은 당신의 백성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 즉, 구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도리를 찾고 구원도리를 깨달아야 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망했으며, 왜 포로 되었다가 귀국령이 내려져가지고 귀국이 되었는가? 왜 그렇게 됐는지 그 이유가 성경 구구절절 속에 가득 담겨져 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 선민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유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말이 있었지요. ‘70년 만에 귀국을 할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고, 또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 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해방이 된다고 예언을 했다 그 말이요.
그래서 1차 포로에서 606년 여호야김 때에, 바벨론이 망하기는 538년에 다리오 왕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메대 파사가 나오고, 이스라엘 귀국 후에도 파사 메대로 또 나옵니다. 포로 된지 70년이 차면 해방이 된다고 했는데 다리오가 68년에 정복을 했습니다.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 왕에 의해서 해방이 된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왕도 잘 맞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고 하면 이사야가 예언한 게 안 맞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도 틀리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면 성경이 틀린 거냐?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로 통해서 ‘고레스 왕에 의해서 70년 만에 귀국하리라’ 했고, 또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 만에 포로된 것이 풀려서 나온다’ 그랬단 말이요. 이사야는 웃시야 왕 때 예언을 했고,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왕 때 풀려 나온다’ 그렇게 예언이 됐단 말이요. 그러니 실제의 역사와는 안 맞는단 말이요.
그러나 한 사람이 예언을 했던, 열 사람이 예언을 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 그 말이요. 그러면 이게 무엇을 말해주느냐? ‘예언이 맞는다. 안 맞는다’ 이 말보다도, ‘70년 만에 돌아오리라. 70년 후에 돌아오리라’ 한 것이 ‘맞았다. 안 맞았다’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성을 말해준다 그 말이요. ‘나는 거짓말을 아니하는 자다’ 하는 이걸 보여준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계약선포의 주권자요 실행자요,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준다 그 말이요.
첫째는 ‘나는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기로 약속이 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대로 이행한다. 네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킨다’ 그 말이요. ‘못된 짓을 하니 안 지킨다. 못 준다’ 그게 아니고 ‘너희들이 독생자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너희들에게 독생자를 준다’ 그 말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내가 계약선포 해 놓은 것은 봐주는 게 없다. 그대로 밀고 나간다. 너희들이 아무리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아 죽여도 나는 너희들에게 그리스도를 준다.’ 그러니까 기본구원은 준다 그 말이요. 그러나 건설구원은 못 봐준다. 성화구원에 들어가서 못 봐준다. 그러니까 이 성화구원 건설구원에 들어가서는 인간이 무지무능하다고 해서 봐주는 게 없다 그 말이요. 개인의 사건이라든지 심판이라든지 이런 것은 막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성령님의 영감의 감화 없이는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경을 깨닫고 가야 되는데, 성경을 손에 들고 깨달으려고 할 때에 마음에 자극이 오고 회개를 하게 되고 바로 살고자 하면 더욱 많이 깨닫게 해 주고 하나님은 그 길을 가게 해 줍니다. 성령님께서 역사를 그렇게 해 주는 겁니다. 성화구원에서는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나 아무리 성화구원이라도 자기가 안 깨달으려고 그러면 성령님도 어쩌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화구원에서 하나님은 계약선포 계시자로서 밀고 나가는데, 그대로 밀고 나가버리는 겁니다. ‘아이고, 못 깨달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덜 믿었습니다’ 그게 없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계약선포 해 놓은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은 안 하십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십니다. 거짓이 없으신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 자에게는 불행이겠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그 자에게는 한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전지전능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제 저희들이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예수 믿지 말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된 축복으로 계약된 선포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생전에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각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이 축복을 원없이 한없이 후회없이 받고 갈 줄 아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자로 살아가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자극이 되지 않고 지나가는 말로 듣고 있다가, 성경을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것도 아니고 많이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영부영 세월만 넘기다가 성화구원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없는 진노의 심판으로 들어간다면 그 때는 이미 늦은 줄 압니다.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우리 생전에 우리 모두 잘 이루어가는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인 줄 압니다. 자기의 할 일을 내버리고 딴 데 가서 엄한 짓 하지 않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늘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고 우리를 권고하시고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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