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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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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4절.
1절-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면을 더듬어 본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받아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그 신정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마음대로 인간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노아에 대해 짧게 기록된 역사이지만 이를 통해 통치적인 이스라엘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6장에 간단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말이 있고, 이후로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고 다른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고 되어 있지요?
통치적인 이스라엘에서 보면 솔로몬 이후에 그 아들 르호보암과 솔로몬의 심복 여로보암이 각각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남조는 다윗의 혈통 르호보암이고, 북조는 여로보암이 통치를 했지요.
그 이후에 북조는 사마리아 왕궁에서 많은 살인극이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이질 혈통으로 내려온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지요. 명칭적으로 제도적으로 호칭적으로 분명히 북조도 이스라엘입니다. 한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북조 그들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들도 분명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이스라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이요. 그래서 그들도 명칭적 이스라엘로 살았고, 호칭적 이스라엘로 살았고, 종교적 이스라엘로 살았고, 제도적 이스라엘로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를 박대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를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주어진 기존 율법이 있고, 또 그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피동 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피동 되지 못했다고 하는 여기에서 율법만 지키는 것과,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피동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이 다른 이종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경전은 인간의 행동을 조정하고 있고 인간의 수양 면을 권장을 하고 있으면서 이를 위해 ‘이렇게 이렇게 행하라’ 하며 도덕성을 가르치고 있지요. 그리고 ‘네가 죄를 지었느냐? 그렇다면 그 죄의 속죄를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선행을 해야 된다. 이렇게 하면 너의 죄가 속죄가 된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는 속죄의 의미에서 이런 일을 한다. 이렇게 하면 속죄가 된다’ 하는 식으로 믿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죄에 대한 대가지불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죄이던 본죄이던 그 대가를 자기 스스로 지불할 것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만한 가치도 없고, 죗값을 지불할 능력도 없다는 겁니다.
죄라 할 때 성경에 보면 원죄가 ‘있고 자범죄가 있는데, 인간이 볼 때는 큰 죄고 작은 죄고’ 하는 거지만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면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죄에 대해 스스로 대가지불을 해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피, 아니면 나의 육체, 아니면 나의 자녀를 다 바친다고 해도 속죄가 되지를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수양의 기름이나 수만 마리의 양으로도 대가지불이 안 된다고 그랬지요.
우리 인간은 인격자요 영육이 결합된 인간입니다. 그리고 활동성이 주체성으로 살고 있지요. 물론 우리 인간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선행도 할 수 있고, 종교적 수양도 할 수 있고, 철학적 사색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선행으로 네 죄의 대가를 지불하라. 수양(修養)을 해서 네 죄에서 해탈하라’ 라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인간 편에서 보면 이게 상당히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말은 지옥에 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죄의 대가지불을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너는 이런 식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하며 이를 위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말을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똑똑한 자들, 명철한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이 성경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 타당성이 있게 들릴 수도 있었지 않았든가 그 말이요. 그러나 이제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깨닫고 보니까 그들의 말이 합리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어리석게 들린다 그 말이요.
그들의 말대로라면 도덕적으로 수양적으로 고행적으로 몇 가지를 해야 죄가 다 속해지겠느냐 그 말이요. 만일에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못했다면 한 가지 못한 그 죄로 인해 지옥에 가느냐 그 말이요.
우리가 성경에도 보면 ‘율법을 지켜라. 계명을 지켜라. 양심을 지켜라’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지키라고 하는 이것이 죄의 대가지불을 하라는 의미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시대론을 주장을 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을 무죄시대라고 하며 이 무죄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있었다면 천국에 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양심시대가 있는데 이 양심시대는 타락 후부터 율법을 받기 전까지라고 하며 이 양심시대에는 ‘율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양심만 바로 잘 지키면 영생이다,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죄를 지은 상태인데 죄 지은 사람이 어떻게 양심을 바로 지키겠습니까?
또 이 양심시대를 지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부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를 율법시대라고 하면서 이때는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은혜시대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이제는 율법을 안 지켜도 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주장을 한다 그 말이요.
물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고 하는 이 말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타당한 것으로 들리지요? 그런데 이 말을 되새겨보면 율법은 안 지켜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맞으나 ‘성경을 안 봐도 된다. 성경을 안 깨달아도 된다’ 하는 식이라 그 말이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가만히 보면 구원을 말하면서도 구원을 모르는 자가 많고, 영생을 말하면서도 영생을 모르는 자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범죄 전 무죄상태의 인간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새생명으로 중생된 인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인데 영은 무형적 실유성이고, 육체는 물질적 유형적 실유성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개별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부활 후에는 영육 복합체가 아니라 단일체가 되는 겁니다. 이성과 양심, 영과 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단일실체로 영체가 되는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형이지요? 따라서 어디까지나 지음을 받은 존재요 모형이기 때문에 원형이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은 아담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의 그 상태로 천국에 갖다 놓아봐야 살지를 못합니다. 혹 생명과를 따먹었다면 모르지요.
아담의 무죄상태의 때는 생명과도 안 따먹고 선악과도 안 따먹었기 때문에 그건 의인이 아니라 무죄인이지요. 무죄인라고 해서 의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의인은 의를 행해야 만이 의인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무죄상태로 천국에 갈 수가 있겠느냐? 무죄로 천국 갈 수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에게 타락을 혀용을 했을까? 무죄상태로 천국에 갈 수가 있다고 한다면 타락을 허용치 않았을 것 같단 말이요. 그런데 혀용을 했단 말이요. 그러니까 무죄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할 것을 몰라서 방치해 둔 것이 아니지요. 주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예정 가운데에 아담의 타락의 허용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말이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기본 원 선이고, 그 다음에 예지는 복선이고, 인간의 실행은 재 복선이 되는 겁니다.
그런고로 모든 역사는 예지 예정이 아니라 예정 예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았기 때문에 그 예정대로 간다 그 말이요. ‘당신이 안 정해 놓았는데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하는 이거는 예지 예정이기 때문에 그거는 말이 안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실패가 되는 거지요. 결국 선악과 문제도 ‘인간이 따먹을 줄을 하나님은 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놨다’ 이렇게 된단 말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은 아니지요.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요 무소불능하신 분이시니 안 봐도 미래까지 다 아시는 겁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인간의 구원의 서정 중에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말이요. 이런 과정의 하나로 아담에게도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히기 위해서 타락을 허용한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중생이 된 영은 진리와 영감이 결합적으로 내재해 있으면서 점차적으로 구속을 입히는 작업을 계속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에 짐승을 잡아가지고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지요. 이런 게 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모형계시 상징계시로써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없이 인간이 그리스도의 기본구원은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기본구원을 입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을 수 있는 이것도 하나님의 예정에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부활의 권능을 입지 못하면 생명의 부활은 없습니다. 또한 생명의 부활을 입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신령계에 갖다 놓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지 못하면 이질적인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곳은 깨끗한 곳이요 완전한 곳으로서 도덕적 선행이나 종교적인 수양을 가지고 들어가지를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고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이나 구원의 방편은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다만 선후의 차이가 있고, 시대의 차이가 있고, 계시 현현의 차이가 있고, 계시 각성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하나님의 계시의 양이 더 많아졌다고 해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더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시대 때에도 조명적 영감의 감화와 각성적 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구원을 충분히 이루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시대와 사도바울의 시대는 몇 백 년의 차이가 있지만 다니엘은 구원을 충분하게 이루어 갔습니다. 현재 우리보다도 더 구원을 잘 이루어 간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또 아브라함 역시도 성경 66권을 기록하기 전, 성문계시 기록완성 전에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많이 구원을 이루어 갔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이 돼 집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을 닮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느냐? 참된 증인을 얼마나 닮았느냐 그 말이요.
구원을 이루는 데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은 차별이 없습니다. 만일 시대에 따라서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인류 초기에 난, 사람과 인류종말 직전에 난 사람과는 엄청난 구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시대적인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공평하시고 공정하시기 때문에 이룰구원의 차이는 자기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 구원은 다른 이방종교의 경전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속죄해 주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네 속죄문제는 사람 되신 예수님께서 완전히 담당을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선행이나 선심이나 수양을 가지고 속죄를 하지 말라는 거지요. 안 된다 그 말이요. 죄를 지었으면 죗값은 사망뿐입니다. 속죄가 없어요.
성경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 액면적 문자적 그대로 하면 성경에 맞느냐? 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다른 이방종교의 경전처럼 문자적 액면적으로만 보고 말을 한다면 성경을 모르는 자라 그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무엇을 바쳐서 자기 죄를 속죄를 했느냐? 그들이 드리는 소나 양이나 짐승이 피로써 속죄가 되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했습니다.
속죄제는 수컷을 드리고 속건제는 암컷으로 드리는데,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인양성 결합으로 된 예수님께서 너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상징적 모형적으로 말씀하는 것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는 ‘너의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이고, 신약시대는 ‘네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원리는 똑같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죄의 대가지불을 우리 스스로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보면 자기가 자기의 죄의 대가지불을 한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볼 때에 그게 잘한 것으로 보여집니까, 어리석다고 보여집니까? 어리석다고 보여지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요.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면 인간은 실패로 살 수밖에 없던 나였지만 성경에서 발견을 했는데 우리가 이 성경을 무시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성경은 기본구원만 말해주고 있느냐? 나는 보다 더 좋은 진리의 보배를 알고 있느냐 그 말이요. 기본구원만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니지요. 진리의 보배를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본구원만 잘 알아도 성경을 이종교에서처럼 경전시해서 보고 헛된 짓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경전시하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계시 형식계시 형상계시 은밀계시 의지계시 등을 깨달아서 배우면 지혜 있는 자 명철한 자가 되고, 총명한 자가 되고 광명한 자가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어떤 어리석은 짓을 했는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과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430년이 임박이 되었습니다. 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로 통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제 그 기간이 다 되어서 애굽에서 떠나갈 기약이 임박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농토를 마련하고 확장을 하고 빌딩을 짓고 애굽의 백부장 십부장 반장노릇을 하며 살 판이 났다 그 말이요. 떠날 기한이 임박을 했는데 그렇게 사니 살 판이 났다 그 말이요. 떠날 때가 됐는데도 그렇게 애굽에 붙어서 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 말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건설에, 목축에, 기술에, 정치에, 교회에 성공한 사람이냐, 실패한 사람이냐? 오늘날 어리석음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애굽의 공기, 애굽의 식량, 애굽의 물을 먹으니까 영생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건설을 하고 확장을 하고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그 말이요.
우리는 땅에서 하늘의 운동을 할 자입니다. 하늘에서 영원히 살 그 자로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땅에 사는 동안에 땅의 운동을 하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자기 만들어진 대로 성경은 깨달아지기 마련이지요. 양을 잡아 속죄를 하라는 말은 문구상 문맥상으로는 땅의 일 같으나 이것은 하늘의 일을 땅에서 하라는 겁니다.
몰라서 죄를 짓는 자는 바보이지만 가르쳐줬는데도 죄를 짓는 자가 있다면 이거는 어리석은 짓을 두 번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바보 중에 큰 바보가 아닐 수가 없지요. 성경을 보고도 어리석은 짓을 하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다 그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자신의 재세목적이 무엇이냐? 본질적 목적을 이탈한 자는 모두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땅에서 주어진 사건을 통해서 하늘의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보니 땅의 것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땅에다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은 일에 성공 실패를 떠나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겁니다. 반석 위에 건설을 해야지 모래 위에 건설을 하면 되겠느냐 그 말이요.
나무와 짚과 풀로 짓는다는 것은 가견적인 불타질 건설을 말을 하는 것이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다는 것은 불타지지 않는 건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불타지지 아니할 것을 건설해 가야 되겠다 그 말입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세상에서는 자기의 죄 땜을, 속죄를 어떤 고행으로, 어떤 봉사적인 일로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 말을 솔곳이 듣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 만이 나의 속죄가 되지’ 하는 그런 식으로 잘못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바로 깨달아야 할 텐데 하나님 앞에 죄를 바로 깨닫지를 못하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어떤 노력으로 속죄를 하고 살려는 자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해서,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서 저희들에게는 죄의 값을 물어줄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죗값은 주님이 다 감당을 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닫고 삽니다.
그리고 이 재세기간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가야 할 삶인지 바른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복된 자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사람을 내 속에 만들고, 영원한 부요성을 내 속에 만들고, 이렇게 저희들이 재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철두철미하게 믿음생활 바로 하고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는 명철하고 총명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늘 저희들에게 성경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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