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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4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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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부름받은 사명자
본문: 이사야 49:1- 7 * 찬송 323장 (통 355장)
미국 아이오와 주의 제일침례교회에 다니는 린퀴스트 씨는 88년간 한 교회만 출석을 했습니다. 천국에 갈 때 까지 한 교회만 다녔던 그녀는 주일을 비롯한 절기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니던 기간 동안 교회의 목사님은 15번이나 바뀌었고, 그녀가 들었던 설교는 총 8천 번이 넘었습니다. 그녀는 4천 번의 기도회에 참석을 하며 2만 9천 번이상의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50년 이상을 주일 학교 교사로 헌신을 했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면서 매우 많은 어린이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그로부터 매우 많은 아이들이 자라서 목사님이 되었고 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린퀴시트 씨의 삶은 매우 평범했습니다. 그러나 충실했습니다. 열매를 맺는 삶은 특별한 헌신과 결단이 요구되는 삶이 아니라 맡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삶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 권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통증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일꾼된 자는 “나는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생명이다”라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사명적 인간이라 합니다. 회사의 조그만 심부름꾼이 소사입니다. 몰래 보낸 심부름꾼이 밀사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이 천사입니다. 특별한 심부름꾼이 특사입니다. 급한 심부름꾼이 급사입니다. 임금의 심부름꾼이 칙사입니다. 공적 심부름꾼이 공사입니다. 심부름 받은 신하가 사신입니다. 심부름 받은 제자가 사도입니다. 심부름 받은 사람이 사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심부름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주를 위해 죽고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가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생 시절 그가 22세 되던 때에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에게서 대답을 듣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20:24)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6, 17)
오늘 이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사명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달려갈 길입니다. 둘째, 주 예수께 받은 것입니다. 셋째는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 전파’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사명이 다른 것 같지만 목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보다 거룩이란 말을 더 좋아하고, 재미보다 사명이라는 말에 더 흥분합니다. 가족이 사명이며, 직장이 사명이고, 교회가 사명입니다. 그곳에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죄송한 마음으로 달려가고 또 달려갑시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유일한 확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오직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는 성령만이 부르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습니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예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은 소명을 낳습니다. 역사상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한 소명을 위해 부르셨다는 믿음으로 사명의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화재의 불길로부터 구조되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영국 교회에 ‘개혁’이라는 소명을 위해 주께서 자기를 살리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이 진정으로 소명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질 때,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잠재력에 불을 붙일 수 있으며 삶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두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 선포이며 우리를 향한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할까요?
첫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입니다. 성도들은“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 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1절).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사명자는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힘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셨다’고 노래합니다(4~5절). 사명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명을 감당하도록 힘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바랍니다.
셋째, 성도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어 땅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셨습니다(6절). 성도의 사명은 다양하지만 모든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수고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빛 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출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부름 받아 맡긴 사명에 충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 제자됨의 사명과 책무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사명이라도 충성을 다하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전파에 힘쓰고,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게 하옵소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오늘도 생명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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