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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

논문신학성경 고동엽 교수............... 조회 수 2647 추천 수 0 2014.01.14 22: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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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daum.net/ipssen/10737006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Ⅰ. 서      론

 

  1.연구의 동기와 목적


  성령을 다루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우리는 모두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하며 우리는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신앙 생활에서도 큰 유익을 줄 뿐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데 유익을 준다.즉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령은 신자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고 지속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주나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므로 피상적인 지식 가운데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20세기에 밀어닥친 최대의 충격파인 오순절 운동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기형적 이해와 논쟁과 혼란의 와중으로 들어가버렸다.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은 많은 혼란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성령에 대한 여러 해석은 무엇보다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기에 거기에 관해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2.연구의 방법 및 범위

 

  연구의 방법은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연구하여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성경에 대한 이해를 한 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특히 오순절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상반된 견해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범위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으로 한정하며,성령의 사역이나 은사의 부분은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Ⅱ. 성령의 본질

 

  1.성령의 어의

 

  구약에서 성령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루아하’이다.뜻은 ‘공기의 움직임’인데 쓰임에 따라 바람,호흡,생명력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루아하’는 389회가 나오는데 그 중 113회 이상이 바람을 가리킨다.‘루아하’가 바람의 뜻으로 사용될 때도 공기 자체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쓰여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활동의 한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이 구약의 일반적인 특성이다.이 바람으로써 ‘루아하’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자기 임의성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변혁하는 힘 또는 권세를 의미한다때로 ‘루아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도 표현됐다.이 때에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우상에게는 129회 그리고 하나님께 관련되어 사용된 횟수는 136회이다.

 

  종합해보면 하나님은 뛰어나게 ‘루아하’를 가지고 계신다.그는 숨을 쉬며,살아계시며,행동하는 하나님이다.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바람이 일어나며 ‘루아하’가 운동한다. 신약에서 성경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이다.이것은 바람이 불어서 공기가 흐르는 것과 같이 숨을 흡입하고 내뿜는 생명력을 의미한다프뉴마’는 삶의 다이나믹한 원리,그리고 생명력과  활동의 중심으로서 인간의 역동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수여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이며 인간의 루아하나 프뉴마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2.성령의 속성

 

  (1) 성령의 인격성

  성령은 누구이신가? 우리가 사도행전 1:8의 귀절만 생각하면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으로서의 능력이요,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으로만 생각하게 된다.그렇지만 성령은 그 이상의 살아계신 인격자이시다.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이 많으시고 지혜로우시며 온유하시고 굳세시며 신실하셔서 우리가 참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참 인격자이시다.성경에서 성령님을 말할 때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인칭대명사를 썼으며 또한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셨다.

 

  성령님을 인격으로 알고 믿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면,첫째 예배에 있어서 중요하다.둘째 성령의 바른 능력을 알기 위해서다.세째 인격자만이 인간의 사정을 알고 도와 줄 수 있다.성령님을 인격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령충만의 삶의 근윈이 된다.

 

  (2)성령의 신성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데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그와 동시에 성경은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의 신성을 확인하였다. 먼저 하나님의 영은 창조와 섭리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잉태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신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면 그는 하나님의 신,주의 성령,주 여호와의 신,예수그리스도의 성령,주의 영 등으로 불리워졌다.이 명칭들은 삼위일체와의 계시하고 있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한위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성령의 속성인 전지성,편재,전능,진리성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Ⅲ. 성 령 세 례

 

  1.성령 세례의 본질

 

  (1)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

  성령세례란 무엇일까? 성경가운데 ‘성령세례’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한국어로 성령세례라는 말은 영어의 the Bapti sm of the Holy Spirit를 번역한 말이다.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는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 라는 의미이다.

 

  올바른 성령세례의 의미는 언약에 참가함을 말한다.고전12:13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했는데,이를 보면 성령의 세례는 불신자로서 회개하고 믿어 계약 백성의 단체,즉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말한다.

 

  (2)성령세례의 성경적 이해

  성령세례는 신구약을 통털어서 성렬셀케와 연관지을 수 있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구는 모두 세례요한의 예언적 언급이고(마3:11;막1:8;눅3:16;요1:33),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행1:5),또 한 번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행11:16),마지막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고전12:13).

 

  ①복음서의 성령세례

  성령세례에 관한 연구는 세례요한의 말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왜냐하면 성령세례에 대하여 마3:11에 세례 요한이 최초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이 외에도 막1:8,눅3:16,요1:33에 나타나 있다.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이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의 사역이 될 것을 증거하며 오순절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문제되는 것은 불과 성령의 세례가 한세례인가 두세례인가 하는 것이다.본문을 자세히 관찰할 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은 두 세례를 가리키기 보다는 한 세례의 두 국면을 가리키는 것이다.그 이유는 첫째,전치사가 성령과 불 둘 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둘째,세례를 받는 사람들인 ‘너희들’이 요한의 세례의 대상도 되고 예수님의 세례의 대상도 되는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다.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두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세례의 두 국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그것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 받은  자의 죄악이 그것은  불로써 무엇을 태워서 깨끗하게 함과 갔다.

 

  ②사도행전의 성령세례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성령 부어주심과 교회를 통하여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누가복음은 예수의 지상사역면을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계속 일하심을 보이고 있다.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머리와 인도자이신 예수님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고 있다.바로 성령세례의 사역인 것이다.

 

  먼저 행1:5을 보면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사도행전 1:4-8의 강조점은 개인의 믿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에 있음이 분명하다.오순절의 성령세례를 신자의 개인적인 여사의 한 부분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교회가 새로운 한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번째는 행11:16에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했는데,사도행전 11장은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일어났던 일을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이다.그는 15절에서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임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여기에 처음 일어난 사건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③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

  고전12:13은 연구해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오순절에 관한 언급일리는 없다.왜냐하면 바울도 고린도 사람들도 그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사람들은 다같이 그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는 축복에는 참여하게 되었다.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고린도에 나타난 바울의 메세지의 의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되게 한는 것이다.바울은 이 한 절에서 “하나”라는 말을 세번씩이나 사용함으로써 고린도인들이 하나되어야 함을 좀더 깊이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한 성령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성령은 둘이 아니며 그의 직임도 두가지가 아니다.

  둘째로,모든 크리스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세째로,이 구절에 나오는 성령세례는 큰 결합요소이지 결코 분리요소가 아니다.바울이 쓴 목적은 분리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성령의 세례는 몇몇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부차적이고 결과적인 체험이 아니라,모든 사람이 누리는 최초적인 체험이라는 결론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근거들을 통해서 성경의 세례는 선물이며 또한 최초적인 축복이며 주를 믿는 자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었다.

 

  2.중생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1)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다.특히 날카롭게 신학적 대립을 하고 있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성령세례에 관한 학설들은 먼저 중생시기를 기점으로 양분됨을 알 수 있다.오순절주의자들과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 오순절 전에 예수를 믿고 중생한 후 그 다음 단계로 성령세례를 받았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토레이는 가장 최초로 성령세례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정립한 학자이자 목회자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보다 이 성령의 세례라는 한 개의 사실에 대하여 여러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되는 사실은 이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그 받는 자 스스로가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잇는 뚜렷한 체험을 가진 것이다.이른바 중생과는 명확히 구분되고 분리되는 성령의 역사중의 하나이다.성령의 세례는 언제나 복음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과 항상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우리가 성령의 세례가 무엇을 위함인지 주목해 본다면 성령의 세례는 능력과 봉사의 능력을 부여해 준다”고 했다.

 

  영국의 오순절주의자 바삼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결과 방언이 나타나 여러 세대에서 기독교 부흥을 일으켰다”고 강조하면서 “성령세례는 중생회심에 따라오는 두번째 은혜의 역사”라고 했다.   D.M.로이드 죤스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하며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고 있다.그는 “성령세례가 중생할 때에 모든 사람에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을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또한 분명히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되고 만다.중생은 무의식적이며 비체험적이다.그러나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체험적이다.사도행전 2장을 보라.그것은 체험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 체험적이어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그들에게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도 “중생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체험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체험이다.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일정한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개별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 주장하였다.

  성령세례에 대한 웨슬레안의 견해도 중생후 2차적 체험을 말하는 점에서 오순절 주의의 주장과 동일하다.웨슬레는 이차적인 성결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부르는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하였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과 웨슬레안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이미 중생했다고 믿는 점과 사도행전 3장과 19장,그리고 중생과 성령세례의 목적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세례를 중생후 이차적으로 받는 어떤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하고 성령세례의 영속성을 주장했다.

 

  이들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장단점이 있다.장점으로서 그들은 현재 실현된 실재로서의 성령의 임재를 강조한다.성령의 실재가 성도들의 생활 가운데서 큰 역할을 감당하며,성도들은 바로 성령안에 있으며 항상 성령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이다.단점으로는 첫째,성령의 세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동일시 생각한다.이 성령의 능력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둘째,성령세례를 받은 체험이 방언이라는 것이다.그리고 이들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세례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세례는 두번째 축복으로써 회개 이후에 경험한다는 것이다.

  결국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의 문제점은 전체 성경보다 어떤 특별한 성구에 집착하는 것이다.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조건을 제시함으로 성령을 예수믿는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노력으로 받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2)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하게 보는 견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도 일리는 있다.하지만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스토트는 성령의 세례를 성도가 거듭남에 있어서 최초적 은사요 보편적 은혜라고 하면서 물세례는 「구원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그 「실체」라고 하였다.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을 터인데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은 성령세례의 최초성에 맞지 않는 예외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달라스 신학교 학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인 죤 월부어드 박사는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뚜렷한 특징이다.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순간적이고 동시적인 역사이며 세례는 가끔 성령의 충만과 동일시되고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할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성령세례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요3:5의 말씀을 보면 중생시키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중생고 성령세례는 같은 사역이다.고전12:3을 보면 이 말씀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마태복음16장의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이다.이로 보건대 어떤 별스러운 은사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를 주시라’ 믿는 믿음은 성령을 받은 가장 좋은 증거이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자들은 오순절의 성령체험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바르지 못하다.왜냐하면 이렇게 먼저 구원받고 나중에 성령세례 받은 것은 오순절 전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이지 신약시대에 계속되는 일반적인 규범이 되는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생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문제를 신약시대와 그 다음에 온 시대와를 구분해서 생각함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이 문제는 다음의 오순절 사건을 다룰 때 더 깊이 이야기하겠다.결론적으로 오순절 이전에 이미 중생한 제자들에 있어서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단계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오순절 이후 오늘의 우리에게는 구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즉 오순절 이후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중생한 신자는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3.오순절 사건과 성령세례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앞에서 이야기했던 중생과의 관계,그리고 후에 이야기 할 성령충만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과연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가 첫번째 체험이냐,아니면 중생 후의 두번째 체험이냐를 논하게 될텐데 앞의 내용과 반복을 피하는 방향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1)오순절과 성령세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세례요한의 메세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세례요한의 사역과 오순절이 연관되어지는 것은 예언과 성취로 나타난다.세례요한에 의하면 메시야의 성령의 사역은 종말론적인 것이다.세례요한의 예언는 오순절에 성취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성취하신 사역의 대표로서 주어진 것이다.베드로의 설교(행2장)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예수의 죽음,부활,승천,성령세례 사건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이것은 예수의 죽음,부활,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세례 사건도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개인 성도의 경험의 한 모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해야 한다.

 

  고전15:45에서 바울사도가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말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살려주는 영은 곧 성령을 말함이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구절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하며 오순절 사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베드로는 요엘서의 “그후에”를 “말세에”로 고쳐 오순절 사건이 종말론적 사건임을 명백히 하였다(행2:14-21).둘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강조하고 오순절 사건과의 관계를 설명한다(행2:22-36).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약의 예언과 세례요한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보내주심의 약속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말하자면 성령께서 인격으로 강림하여 모든 사람위에 임하여 오심으로 구속사의 전경륜이 이제 단번에 성취된 것이다.

 

  (2)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에서 그 신학적 중심을 찾는다.그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첫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방언으로 말하게 한 것을 의미한다.   오순절주의에 있어서 오순절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반드시 사도행전2:4절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를 의미한다.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하면 오순절은 근본적으로 특별한 방법으로의 성령체험이다.회개 이후에 성령충만하게 되고 그 증거로서 처음에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나타나며 절대 복종과 믿음이라는 충만 조건을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이렇게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은 체험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방언만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라고 한다.윌리암 콜드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때에 우리들의 혀를 지배하고 있다는 표시로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우리 지체 가운데 가장 지배하기 어려운 혀를 지배하시게 된다면 우리들의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오순절 성령세례에 대해 말할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성령을 충만하게 영접하는 것이다.오순절 신학자 스킵스텔은 성령세례는 “한 개인이 초자연적으로,체험적으로,그리고 완전한 의식 속에서 성령의 능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이 말에서 보듯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분명히 본인이 알 수 있는 체험으로써 초월적 존재인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고(고후1:21),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며(엡1:13), 성령세례의 목적은 영생을 위한 중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령세례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첫째,일반적으로 오순절 사건은 중생과 분명히 다른 것이며 중생 이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둘째,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징조가 우선 나타난다는 것이다.세째로,성령세례를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후속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7개의 성경본문들 - 행2:1-4,2:38,8:4-25,9:1-19,10:-11:,19:1-7;막1:9-11 - 은 중생에 뒤이어 일어나거나,중생과는 다른 체험으로서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경의 바르지 못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가장 중요한 귀절인 행19장의 에베소 사건과 행8장의 사마리아 사건을 보기로 하자.

 

  먼저 행19장의 에베소 사건은 에베소 교인들이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세례요한이 예언한 대로(눅3:16)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일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따라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바울의 질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해하듯이 믿고 난 뒤에 둘째번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은 완벽히 믿는데 실패해서 믿기만 하고 성령세례를 못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냐 하는 그런 질문이 아닌 것이다.

 

  행 8장의 사마리아 사건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자들에 의하면 사마리아 교인들이 믿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나 이 사건은 중생한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이 사건은 유대기독교인과 사마리아 기독교인 사이의 무서운 분쟁을 막기 위하여 사도의 안수로써 그들의 회심이 순수함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의   물을 주는 것을 보류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일정한 전제조건이 충족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한다.그 대표적인 것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3)개혁주의자들의 견해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달리 오순절 성령세례를 “첫번째 체험”으로 보고 있다.그래서 여기서는 오순절 성령세례를 두번째 체험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인,오순절 세례전에 중생한 제자들의 문제를 주로 다루기로 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세례를 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구절은 고전12:13인데, 이 구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이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기에 넘어가기로 한다.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존 스토트는 중생후에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때문이었다고 말한다.이미 중생한 120명과,비신자로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은 3000명의 두 집단이 있는데 오늘날의 기준은 3000명의 집단이고,120명의 체험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며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은 오래전에 끝났다고 말한다.즉 오순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승천의 결과로서의 성령강림이며 예수의 구속을 위한 삶의 마지막 사건이라고 말한다.

 

  엉거 교수는 제자들의 문제를 ‘시대전환적 현상’으로 설명한다.즉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과한 구약의 성도들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이러한 시대전환적 현상은 오늘날에는 일어날 수 없으며 그 당시에만 일어났던 과도기적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성경과 두 견해를 통해 볼 때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이 문제는 그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오순절 사건은 구약(욜2:28;겔36:26)의 성취인 것이다.

  둘째,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성령의 부어주심은 단순한 충만의 사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 이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새롭게 열릴 성령시대,교회시대의 출발점인 것이다.

 

Ⅳ. 성 령 충 만

 

  1.성령충만의 의미

 

  성령충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정의해 보아야 하겠다.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많은 성경 본문들이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될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에 대하여 말한다면 편의상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있는 사실”로도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69)

  구약에서의 성령임재의 특징을 알아보면 첫째로,구약에서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즉 거의가 지도자들과 예언자들,한정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둘째로,구약에서 성령임재는 일반적으로 봉사를 위한 능력이었다.대부분 성령의 임재는 지혜와 특별한 기술과 큰 육체적 힘을 주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오순절날에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의 성령체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말로 기록되었다.‘성령의 충만’의 표현이 사도행전의 오순절과 그 이후부터 여러번 나타난다(행2:4,4:31,7:55,13:52).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실제로 사람이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을 시사한다.또한 성령충만은 예수믿은 후의 성도들이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그러므로 불신자와 성령충만은 무관한 것이다.

 

  이제 성령충만이 성경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성령충만은 사람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행6:10;7:55;11:24).

  둘째,성령충만은 어떤 특별한 사역을 성취하게 하시기 위해 일시적인 경험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행2:4,14-16;4:8,31;13:6-11).이 구절들에서 “충만”은 동작의 단회성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단순과거형으로 나타난다.

  세째,성령충만이 계속적인 경험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성경은 증거한다. 행13:52;엡5:18은 성령충만을 묘사하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시상과 현재시상으로 되어있다.이는 성령충만의 계속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위의 세가지를 종합해 볼 때,결국 성령충만은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성령에 굴복된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2.성령충만의 실제성

 

  (1)성령충만의 실제

  성령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지배는 성령에 대하여 믿는 자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순응하느냐에 달려있다.즉 이말은 믿는 자는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받기위한 조건으로는,

  첫째,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될 수 있도록 내맡기면 되는 것이다.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성령 충만해지지 못한것을 고백하여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둘째,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바라고 구해야 한다(요7:37-39).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충만함은,참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과,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받는 것이 필요하여 다른 모든것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세째,우리는 우리 전체를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권세에 바쳐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주여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당신께 바칩니다.내가 치루어야 할 댓가를 치루어 성령으로 충만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의 세가지 조건을 실행하면 곧 성령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우리의 심령이 충만해 지려면 우리가 걸어야 할 중요한 첫단계는 믿어야 한다.이것과 관련해서 우리의 믿음이 걸어야 할 다음의 세단계에서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다.먼저,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먼저 그를 믿고 모든 일에 그를 바라보기를 요구하신다.둘째로,우리의 주의가 한번 예수그리스도에 집중되면 그는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신다.세째로,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2)성령충만의 결과 

 

  첫째,성화의 삶이다.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며 성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그가 우리의 심령속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때에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는 것이다.

 

  둘째,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과 기쁨,화평과 절제 등을 통해서 성령의 지배를 보여준다.이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좋은 기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시는 초인간적인 성령충만의 열매들로써 성품과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풍성히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세째,관계의 변화이다.먼저,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한다.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그리고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며,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엡5:22-28).또한 엡6:1-4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며 마지막으로 엡6:5-9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네째,전도이다.성령충만의 결과는 다른 방면에도 많이 나타나겠으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한다.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그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그들의 영혼들의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섯째,은사의 체험이다.행2:38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한 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주심을 의미한다.은사주심은 성령님의 주관적 역사이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Ⅴ.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1.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하게 보는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개종과 회개를 뒤이어 오는 경험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신자는 성령을 전적으로 받아서 주를 위한 사역에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그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된 체험으로 보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시한다.

 

  고전12:13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추가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사건이다.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2:13절 후반의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를 신자 안에서 후속적 사건으로서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경험에 있어 단회적인 경험이요,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이며 성령충만은 예수믿은 후의 성도들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구별되는 제이차적인 세례로 보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신자들을 “완성된 신자”와 “미완성 신자”로 나누어 신자들간에 화합과 일치를 깨뜨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염려와 위험성이 크다.

 

  R.A. Torrey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로 똑같은 것인데 두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Torrey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충만하다”는 말이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성령에 의해 사용되어진 성경의 요어를 불확실하게 사용하실리가 없기 때문이다.성경을 보면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곳은 없다.하지만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은 나타난다.

 

  2.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3000명에게 성령이 임했다.그들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인 것이다.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고,단하나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며,반복도 상실도 없다.하지만 성령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며,계속적이고 영속적인 결과와 규범을 뜻하며,반복도 상실도 가능한 것이다.결국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충만은 반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충만에 관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엡5:18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해야 한다는 명령이 나온다.여기 나오는 동사의 네가지 유의점을 알아보자.

 

  첫째,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즉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다.이 글은 전 기독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즉,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세째,그 동사는 수동태이다.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중요한 조건은 무조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네째,그 동사는 현재시제이다.헬라어에서는 명령법이 현재형이면 그 행동은 계속적인 것이다.즉 계속적인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성령세례는 일회적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둘째,성령세례는 체험적으로 느낄 수 없으나 성령충만은 원할 때에 주시는 체험이다.

  세째,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명령이 없으나 성령충만의 명령은 나온다.

  네째,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성령충만은 그렇지 않다.성령충만의 명령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이다.

  다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지체가 되게 하지만(롬6:3-4;고전12:13) 성령충만은 말씀 증거와 봉사를 힘있게 하도록 한다.

  여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조건이 전혀 다르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나 받으나 성령충만은 개인적 죄에서 떠나 성령에게 전적으로 맡겨질 때 이루어진다.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은혜의 사역이요 성령충만은 은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의 증거로 보아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Ⅵ.결      론


  솔직히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비록 글의 방법이  전통적인 견해 즉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견해 역시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보면,

  첫째로,체험을 너무 무시한다.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오순절로부터도 가정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세째로,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네째로,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개혁주의의 견해에 몇몇 모순점이 발견되지만 따르게 되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크기 때문이다.물론 오순절운동이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을 깨트렸고,타락되는 교회를 갱생시켰으며 기존 교단의 침체와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뒤따른다.

 

  첫째,오랜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소위 성령세례적 은사와 방언에 의해서 유지된 적은 없다.그것은 방언과 은사가 아닌 보혜사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둘째,삼위일체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세째,체험을 너무 강조하므로 유치하고 천박하다.

  네째,체험을 강조하지만 자기네 것만 내세운다.

  다섯째,성령충만을 감격 일색으로 대치하려 한다.

 

  어느 쪽의 견해가 옳으냐 하는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자면 많은 연구의 땀을 퍼붓는 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왜냐하면 이 문제의 답은 ‘연구’보다는 ‘시간’에 달려있을테니까.아니 어쩌면 주님이 오실 그 때까지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게 굳이 한 쪽의 견해를 택하라고 한다면 내 좁은 지식으로 바라보고 연구한 결과 성경에 비추어 볼 때,비록 모순점은 있지만,좀더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견해 즉 성령세례는 곧 중생이며 성령충만과는 구별되어진다는 성령론을 택하면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고동엽의 예수 맑은숲 산책> http://blog.daum.net/ipssen


댓글 '1'

정민

2014.08.01 07:31:41

이글을 쓰는 본인도 잘 모르고 또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 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분명히 다름니다. 성령의 세레 즉 불세례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불세례로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천만입니다. 불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불과 같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주님의 역사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때에 나의 영혼은 성결함을 받습니다.

아직 이 체험이 없다면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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