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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딤후2: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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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비교의식을 버리라
디모데후서 2장 20∼21절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덩굴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게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거죠.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았고 나무에서 추락했습니다.그런데 하필이면 떨어진 장소가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호랑이가 나무꾼을 떨어뜨리려고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았습니다.마침 한 농부가 무더운 한여름 날씨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아도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겠는가?”하고 팔자타령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이 농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만족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이웃과 비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자기 교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방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니까 행복하지?” 그러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대학에 다니면 뭐해요. 지방대학교인데요”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한 청년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 다니면 뭐해요. S대도 아닌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S대에 다니는 청년을 붙들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S대에 다니는 청년은 “S대에 다니면 뭐해요. 학과가 좋지 않은데.”
얼마 후 그 목사님은 S대에서 좋은 학과를 다니는 청년을 만나 물었습니다. “넌 정말 행복하지?”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과에 있으면 뭐해요. 수석도 못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 한 계단 올라가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우리 위에 또 다른 계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비교의식은 우리를 끝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쉴 새 없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의식이 우리 가운데 너무 만연돼 있어 우리는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넓은 집, 큰 차, 학벌 등 우리는 남보다 조금 더 낫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사람도 비교의식 속에서는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을 항상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교의식이야 말로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압사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 각자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에서 우리는 큰집에 많은 그릇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등. 질그릇보단 나무그릇, 나무그릇보단 은그릇, 은그릇보단 금그릇이 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가치 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비교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각 그릇들은 그 재질에 맞는 용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질이 아니라 그릇이 깨끗한 가입니다. “나는 금이다”“ 넌 은이다”식의 싸움은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2. 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말하면 사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을 때는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릇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금그릇이라도 그 속에 오줌이 있다면 그것은 오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라도 귀한 보약이 담겨있다면 주인은 그 그릇을 소중히 다룰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비교의식 속에서 오늘도 낙담하며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려고 치열하게 싸우지만 그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비교의식을 벗어날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있는 모습 그대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교의식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한 남자에게 애완견과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보니 주인이 개만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에게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귀도 사랑받겠다고 결심하고 주인 앞에서 꼬리쳤지만 주인은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개처럼 앞발을 들어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주인이 피하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큰 혀로 개처럼 주인의 얼굴을 핥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 옆에서 종종 걸음을 치며 까불다가 그만 주인의 발을 밟았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지팡이로 나귀를 후려치며 마구간에 묶어두었습니다. 개는 개의 길이 있고 나귀는 나귀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떡만 크게 보면 어느새 인생의 겨울이 됩니다. 반면에 무슨 선물이든 감사하고, 무슨 자리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 새 축복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것입니다. 남의 일은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고, 남의 선물이 커 보이지만 크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물을 잘 활용하면 그는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광야의 삶과 먹을 것이 조금 더 넉넉했던 애굽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광야의 삶이 노예로서 누리는 애굽의 배부름과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불평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귀중한 자산은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저렇게 큰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집이 커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집이 작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교의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첫째, 불행하게 됩니다.
마라를 지나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양식이 부족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애굽기 16:2∼3)
그들의 불평은 홍해 앞에 설 때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할 때도 계속됐습니다. 결국 이 불평과 원망의 무리는 시체가 되어 광야에 뉘어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빼앗기고 맙니다. 비교하면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면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성하고 있을 때, 하루는 누군가가 책을 한 권 보내 왔는데, 그 당시 스테반 빈센트라는 사람이 남북 전쟁을 노래로 하여 쓴 "존 브라운의 시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미첼 여사는 그 작품의 훌륭함에 비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빠져, 쓰다만 자신의 원고를 옷장 안에 6개월 동안 쳐박아 두고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사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저런, 이것은 당신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성공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측량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위에서 노력하시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도록 하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름하기 전에, 남이 갖고 있는 능력만을 먼저 보고 그 때문에 쉽게 실망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조금 못하거나, 여러 가지 활동에서 부족함을 보이면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너는 못하니 하는 식으로 꾸지람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고무하기보다는 위축하게 하거나 용기를 잃게 하기 쉽습니다. 남으로부터 타산지석의 교훈뿐만 아니라 좋은 장점을 본받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남과 자신을 비교만 하는 것은 자신의 성공요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 자기 자신이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셋째, 우월감과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심, 열심...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실 때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고 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시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그는 12제자 중에서도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더 드러나 보입니다.
참말 그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포기) 열심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찬에서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을 예언하시자 완강이 부인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충성했던 베드로, 그는 어쩌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동료인 요한을 보았을 때 슬며시 그와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못 박혀 순교할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요한이 어찌되든 그것이 너 베드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 베드로는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완수해야겠다고 열심을 다하여 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베드로와 같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경험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한 일을 계획할 때 혹은 직분을 맡을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낫다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 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를 사랑합니다."하고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구속하신 주의 자녀입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챨스 스펼젼 목사가 한번은 형편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죽을 쑨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마음이 겸손해져서 주께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무에서도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형편없는 설교를 축복해 주십시요" 그는 한 주간 내내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 기도을 했습니다. 한밤중에도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은 지난 주의 엉터리 설교를 보상하려는 마음으로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도 굉장히 칭찬했고 그 자신도 굉장히 흡족해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이 두 편의 설교의 결과흫 한번 비교해 보아야 하겠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랄 만큼 달랐습니다. 첫 번째의 엉터리 설교를 통해서는 41명이나 주님을 영접했지만, 두 번째의 그 멋진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넷째, 낙심과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람을 한번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태어난다"는 말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태중에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에 의존한 삶을 살았지만 태어난 날부터는 자신의 코와 입을 통해 공기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스스로의 힘으로 공기와 영양분을 섭취하는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제 아들 중에는 학창시절에 상장이라고는 비슷한 것이라도 받아 본적이 한 번도 없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녀석은 우등상은 물론 개근상이나 정근상 같은 것도 없었죠. 그런데 그 동생들은 그 아들과 다르게 모든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고, 우등생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집 사람이 저에게 "어떻게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 저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라고 형과 동생들을 비교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교 때문에 그 아들은 가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실의에 빠지곤 했다고 합니다. 그때 저와 그 아들에게 위로를 준 것이 바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을 거북이라고 생각하고 "거북이처럼 부지런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토끼를 따라 잡을 수 있다"며 그 아들을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기 전까지는 저도 이 이야기를 통해 상당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을 갖게 된 후부터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뭍에서 뛰어다니는 토끼와 물에서 사는 거북이가 달리기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지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공평하게 되기 위해서는 거북이는 근처의 섬까지 헤엄쳐 갔다 오고 토끼는 토끼대로 산까지 달려갔다 오는 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공정한 달리기 시합을 붙여놓고 중간에 토끼가 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가 이길 수 있다고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중간에 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몰래 지나쳐 가야 한다는 비겁한 논리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만 봐도 잊지 않고 다 외우는 동생들과 그렇지 못한 아들을 "공부"라는 경주에서 비교하는 것이나 천하장사 씨름선수와 저를 "씨름판"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것, 그것은 모두 불공정한 시합을 사람들 사이에 붙여놓고 그릇된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시합에서 뒤 처지는 사람을 점점 더 심약한 낙오자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절대 그릇된 기준으로 사람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유하고 건강하고 약삭빠른 사람들보다는 죄인과 병자들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불공정한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경쟁논리에 끌려 다니지 않고 각자의 소중한 색깔과 향기를 내며 사는 것, 나보다 남을 높여 주기를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 얻는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헝거리 정신>으로 잘 알려진 영국 경제학자 찰스 핸디는 최근 그의 책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에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29명을 분석하고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등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남을 따라하지 말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자신을 믿고,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아무도 가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가라"
다섯째, 감사를 잊고 불평과 원망을 낳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동생이 집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동생과 비교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일입니다. 가끔 아들 녀석이 손을 삐죽 내밉니다. 그 손에 백 원짜리 동전 한 두 개를 쥐어줍니다. 그러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달려갑니다. 한 번은 딸아이가 손을 내밀었는데 마침 동전이 없어 천 원을 주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그걸 알고는 툴툴거립니다. 왜 누나는 천 원 주고 자기는 200원 줬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200원을 주었다고 생각했을 땐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누나에게 천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심통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옷 한 벌이라도 걸쳤으니 감사해야 하는 데 옷 두 벌 있는 사람을 보고 나면 감사함은 불평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나가 받은 돈이 얼마인가 궁금하십니까? 누나가 받은 돈이 내가 받은 돈보다 적으면 거기서 희열을 느끼십니까? 내가 받은 돈보다 많으면 침통해지십니까? 어떤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과 비교해 얻은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비교해서 얻은 행복은 생명이 짧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금세 불행으로 바뀌고 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평가하십시오. 상대평가를 하지 말고 절대평가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존귀히 여긴단다. 내가 너를 보배롭게 여긴단다. 너는 복 있는 사람이란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놀고 섰는 사람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 씩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는데 삼 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육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구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똑 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주자 먼저 온 자들이 집주인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주인과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므로 불평할 수 까닭이 없는데도 남과의 비교의식으로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비교의식은 감사를 잃게 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여섯째, 소외감과 결핍감을 갖게 합니다.
고등학교 윤리책에 보면 '상대적 결핍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생활의 기본적 필수품을 획득할 수 없어 최저의 생활수준도 유지하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의 상태가 아니라, 타인들과 비교함으로써 갖게 되는 심리적 결핍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상대적 결핍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일곱째,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됩니다.(고후10:12)
자기와 다르다고 쓸데없다 하거나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보라 네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4)
결국 비교의식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들을 가져다줍니다. 낙심, 열등감, 원망, 우월감, 비판 등은 모두가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만 홀로 외롭고 고달프게 숨이 차도록 힘든 고생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없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비교의식에 쌓여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역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사명의 사람인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맡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한 사도 바울의 비장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면서 한 비장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살았기에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흐뭇한 평가를 자신에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쓸데없이 앞뒤좌우 바라보고 비교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5)
인생을 살면서 누구와 비교할 때 불행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 삶 또한 모두 다릅니다. 꽃의 색깔과 향기가 다르듯 인생을 살아가는 모양 또한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좋아하는 꽃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장미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이름조차 모르는 들풀을 좋아합니다. 어느 꽃이 일등이라고 정답을 말할 수 없듯이 우리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이렇듯 비교하면 '다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름'은 '틀림'이나 '모자람'이 아닌데,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불행의 싹을 키우고 맙니다. 딱 한 가지, 비교해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장이라고도 말합니다. '비교'는 자신의 발전과 성장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교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타 회사와 내 회사를 비교하여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점은 고쳐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장과 도전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경우 외에는 비교의식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복을 따라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맡겨주신 직분에 충실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원합니다. 주께서 제게 주신 직분과 은사를 깨닫게 하시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소서. 어려움이 다가올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게 될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비교의식을 피하라(고전 12: 14- 25)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서울대 학생들의 상담중에 가장 많은 상담 내용이 열등감의 문제라고 합니다. 탁월한 학생들이지만 더 우수한 학생들과 비교하다가 만성적인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은 불행하게 사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결과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열등감의 큰 문제는 자신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맙니다. 반대로 비교함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후유증은 우월의식입니다.
21절에는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구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과장되게끔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독특한 걸작품이라는 창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식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은사를 따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진 적이 있으면 이야기 해보세요.
0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불평하고, 원망한 적이 있으면 이야기 해보세요 0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비교하다가...
어느 부부가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부인 친구 얘기가 나왔다.
"내 친구는 복도 많아, 지난번 아파트를 사더니 또 60평짜리를 샀다네? 그리고 신랑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당신은 그 신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 후 신랑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설날에 처가댁에 인사를 갔다. 식사를 하고 덕담을 나눈 후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집안 얘기를 하다가 네 집안, 내 집안, 비교하며 깎아내리기를 하였다. 이런 것들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이혼까지 이르고 말았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부모와 남의 부모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아내와 남의 아내를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집안과 남의 집안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내 직업과 남의 직업을 비교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존재입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나와의 비교는 발전용에만 사용합시다.
* 예화(2): 비교
중세에 어떤 수도사가 있었다. 하루는 제자들을 다 불러모았다. 그는 하얀 종이의 한 가운데에 선을 그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선에 손을 대지 말고 이 선을 가늘고 짧게 만들어 보아라!”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 한 제자가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는 붓을 들고서 스승이 그은 선 옆으로 더 굵고 더 긴 선을 여러 개 그었다. 그러다보니 스승이 그은 선은 상대적으로 가늘고도 짧아보이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가 많다. 그럴 때 그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근심과 염려가 쌓이게 되고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자리 잡을 틈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한 경우에 그 문제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그럴수록 기도의 줄을 더욱 더 굵고도 길게 늘려라. 감사의 줄을 힘껏 그어라. 믿음의 줄, 헌신의 줄을 더욱더 힘차게 그려라. 그러면 내가 가진 문제는 어느덧 간곳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부둥켜안고 혼자 아무리 씨름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내 마음을 그 문제에서 떠나게 하고 그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줄을 계속 그어나갈 때, 그 문제가 절로 해결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예화(3): 낮은 곳을 보라
페르시아의 사니아라는 시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인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돈이 없어 신발을 사지 못하고 맨발로 걸어다니게 되자 그만 처음으로 불평했다.
"나는 왜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 신발도 못 신고 다닐까" 그런데 그가 불평하며 걷는 그때 마침 다리가 없는 장애인을 만났다. 순간 그는 이렇게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감사합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에 비하면 신발이 없지만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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