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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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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에 관하여
말씀: 요한 1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출34:6, 시86:5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아가페적인 절대적인 사랑)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에로스적인 연합하는 사랑)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필로스적인 형제사랑)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내용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관념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사랑의 관념을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인 (仁) 이나 자비로 해석하고 있다 .
맹자는 <측은(惻隱)의 마음이 인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으로부터 사랑이 전개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실한 우정을 가리키고, 비(悲)는 불쌍히 여김과 인정이 많음을 뜻하며, 거의 비슷한 심정을 나타내므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한 개념의 합성어 <자비>로 쓰고 있다.
공자의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라는 가르침에서도 나오듯이, 남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지만, 남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면, 자기가 남에게 품고 있던 차가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적인 지혜의 발로이며, 남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한 전제가 됨으로써 서로 상대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위로하는 사랑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전 “사랑”에 대하여 부분)
동양의 사상에서는 사랑의 절대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공자나 맹자나 불교의 사랑에 대한 관념은 남을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할수 없음과 그 실천 의지와 연관하여 연약한 인간에게는 인이나 자비와 같은 감정의 발로로만 표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사랑의 한계성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4:7) 이 말의 의미는 요한 일서 4:10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의 절대적인 입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까지도 사랑하사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독생자 예슈아를 이땅에 보내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증거로 삼으셨다.(요일 5:9)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께서 예슈아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 주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극치로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차원에서 나타내는 사랑이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차원도 아니요 이성적 논증으로 표현하기도 부족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천국의 사랑이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보내심을 입은 예슈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죄를 대속하여 주심에 대하여 성경적인 지식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에게 직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존경과 무한한 감사를 보냄이 마땅하다. 그리스의 철학적인 사랑의 정의를 살펴 보면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아가페․필리아라는 3 단어로 나타내진다. 이것은 사랑의 본질적인 세 위상을 각각 가리키고 있다. 에로스는 정애(情愛)에 바탕을 둔 정열적인 사랑인데,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는 종종 광기를 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합일하여 진실재(眞實在)에 융합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사전 “사랑” 부분에서)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정의를 아가페적인 희생의 사랑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성경적인 근거로 볼때는 이 세가지 사랑의 종류를 하나님은 다 표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표현을 살펴보면
첫째는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현은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본위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일방적인 사랑으로서 상대의 반응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상대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으로 예슈아(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화목제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증거이다.(요일 4:10) 이 사랑은 인간이 가질수 없는 사랑이며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사랑으로 우리에게는 과거적인 입장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나님의 높으신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다는 것만으로 사랑의 표현은 충분하다
둘째는 필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친구를 위한 사랑으로 친구간의 우정을 근거를 둔 사랑으로 예슈아께서 이사랑도 헌신과 희생을 요구 하고 있다. (요 15:12-13) (요 15:12) 예슈아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표현하시고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계시록에 나오는 가장 칭찬 받는 교회는 필라델비아 교회이다. “필라 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요한 일서에서는 형제 사랑에 대하여 모든 장을 메우고 있다. 그만큼 교회에서는 형제 사랑이 강조되고 있고 이 사랑 역시 자기 헌신의 정신을 두고 있다. 이 사랑은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하고 실천해야하는 현실적인 사랑이다.
셋째는 에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하나로 연합하고 결합하려는 갈망을 가지려는 사랑이다. 인간의 차원에서의 이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사랑의 결실은 결혼을 통해서 결합하거나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랑도 역시 감정의 발로로 통하여 나타나지만 이것은 목적을 위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에서는 이 표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아가서” 이다.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 것은 예로스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아가서에서 가장 사랑의 적절한 표현은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속하였다” 이 말은 서로의 결합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 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겔 37:17)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보로 삼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되는 온전한 연합(결합)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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