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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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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4장 1절-6절.
1절-6절: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
지난 삼일저녁에 이어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일반사람들은 사람 속의 어떤 정신, 무엇이 인간을 해치며, 어떤 것이 인간에게 나쁘고 자기에게 나쁜 건지 그걸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모릅니다.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는 이걸 몰라요.
이처럼 인간은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을 알아서 고치게 하려고 나에게 이 사건 저 사건을 주시고, 또 저런 인물 저런 존재를 동원합니다.
그러니까 내 앞에 누가 동원이 되든지 간에 그 사람이 내 눈에 나쁘게 보이는 게 있으면 ‘가람을 미워하는 그것이 내 속에 들어있구나’ 하고 발견을 해야 하고, 또 세상 육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저 사람 속에도 들어있으면 ‘아, 내 속에도 저런 것이 들어있구나’ 하고 그걸 빨리 발견을 하고 빨리 하나님의 뜻에 맞게 고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환경에 휘말리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속에 이런 게 들어있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병과 질고를 주기도 하는 겁니다.
사람이 환경에 휘말리게 되면 그 자는 죄를 짓게 되는 거고, 또 깨닫지를 못하면 그 사람은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죄를 짓는 겁니다. 일반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만이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이지만 우리 신앙인은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궁극적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그거는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삶속에서 누구도 안 만나고 자기 혼자 있으면서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없는 사람일까요? 믿음이 없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반드시 시험을 쳐봐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사건도 주고 사람도 줘서 만나게 해서 시험을 쳐야지요.
이런 이치로 볼 때에 중들이 저 산 꼭대기에서 공 드리고 사는 그게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이지. 자기는 선한 척하고 있고, 세상사람들이 볼 때도 굉장히 신선처럼 보이지요? 혼자 있으니 죄도 안 짓고, 갖다 주는 거 배 뜨뜻하게 잘 먹고 사니까. 우리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지요.
우리가 미움의 사람을 만나보기 전에는 자기 속에 미움의 성분이 들어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자기 속에는 분명히 미움의 성분이 들어 있음에도 자기가 미움의 사람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기 속에 그 미움의 성분이 들어있는 것을 모르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 속에서 그 미움성을 키우면서 자기는 그 미움을 아름다운 것처럼 다독거리고 키워갈 수도 있단 말이요. 얼마든지 있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미운 사람이 오면 처음에는 첫째는 그 사람이 고맙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쳐다볼 때 불쌍하고. 왜 그러냐? 내 속에 미움의 성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니 고맙고, 아울러 그가 나에게 미운 짓을 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 질벌 혹은 심판을 받을 터이니 그가 불쌍하고. 그렇지요? 그게 있지요.
스데반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이 아니었다면 스데반이 순교를 못했을 거 아니요? 그러니까 스데반의 입장에서 사울이 자기를 순교하게 만들었으니 첫째는 괘씸할까요, 고마울까요? 고맙고, 두 번째는 불쌍하고.
그런데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스데반의 기도에 의해서 됐다고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스데반의 성령의 열매가 바울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신앙의 눈으로는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그 한 번의 기도가 그렇게 효과가 큽니까? 효과가 커요. 아주 커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죽을 때 ‘원수니 박수니, 내가 죽어서 귀신이 돼서 너 잡으러 올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서로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니 불쌍합니다. 깨닫지를 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게 또 성령의 역사가 될 런지 누가 압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성화구원을 이룬다’ 하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이기주의적인 느낌으로 들려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해 한다’ 그러면 그 때의 그 정신은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먼저는 주님을 위해 하는 것으로 나가면서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주님처럼 그렇게 만들어지고, 아울러 주님을 위해서 하니까 주님의 것이 나에게 감염이 되고, 또 아울러 나를 위해 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렇게도 되지요.
그런 믿음과 정신 하에서 저 사람을 위해 내가 죽는다면 이건 내가 존귀해지는 겁니다. 스데반이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사람이 존귀해져요. 그런데 대부분 보면 아주 그냥 대립 대 대립으로 곧장 나가기가 쉬워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립을 하고 싶어도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믿는 마음은 잊어버리지 말고 먼저 상대방을 위해야 되겠지요. 이러면 내가 존귀해져요.
또 이런 게 있습니다. 나 하나가 잘못함으로써 연대로 욕을 먹는 그런 일이 있지요. 우리가 그런 일은 삼가 해야 되겠고, 우리가 외모를 취하지 않는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르거든 우리도 역시 겉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되겠다 그 말이요.
우리는 살면서 내 성전을 잘 지어가야 됩니다. 첫째는 내 성전을 잘 지어가자. 마음의 성전, 심령의 성전을 잘 지어가자. 그런데 보통 보면 궁궐을 잘 지어갑니다. 자기 육을 위해서 산다 그 말이요. 그게 자기 궁궐이라. 우리는 성전을 지어가야 돼. 성전은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겠지요.
솔로몬은 처음에는 자기 궁궐 하나 잘 지었지요. 그러고서는 술람미 여자에게 빠져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계시 면으로 볼 때는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다르지요. ‘예수님이 나에게 푹 빠졌다’ 그런 계시로도 볼 수가 있는 거지만 솔로몬은 술람미 여자에게 빠져 버렸어. 하나님에게 주님에게 빠진 게 아니라 여자에게 빠져버렸어. 우리는 딴 데 빠지는 것보다 진리에 빠지고, 예수님에게 빠져야지. 사람이 진리에 빠지면 진리의 사람으로 화해지지요.
그런데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진리에 빠진다고 하는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젊었을 때는 밖으로 돌고, 마음대로 세상하고 노닥거리느라고 그러고, 그러다가 나이 들면 눈이 어두워서 성경 못 보고. 그렇지요? 우리는 진리에 빠져야 돼. 주님에게로 빠져야 된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대문 감옥 속에 있는 그 사람만 죄인입니까, 감옥으로 잡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더 큰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잘 모르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당신이 일을 못해서 시킬까요? 그건 아니지요. 당신은 만능의 능력자요, 이런 분이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것은 우리에게 일을 시킴으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에 대한 능력이 자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베 짜는 일을 시키는 것은 어머니가 힘이 들어서 라기 보다도 딸이 기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그런다 그 말이요. 우리가 그런 주님의 속셈을 알아야 되겠다.
우리가 또 이걸 하나 알 필요가 있어요. ‘내가 누굴 행동적 실질적으로 죽였다. 안 죽였다’ 이게 문제가 아니고 마음에 범죄가 문제라 이 말이요.
그래서 평가를 한 번 해 보십시오. 60% 실범자가 있습니다. 즉, 행동으로 그렇게 죄를 지었단 말이요. 그 다음에 80% 심범자가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 죄를 지었단 말이요.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은 행동 죄를 60%지었고, 또 한 사람은 마음으로 80%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죄가 큰 겁니까? 80% 지은 것입니까? 틀림없습니까? 행동을 안 했는데? 행동한 것도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게 나온 거지요.
그러니까 마음속에 들어있는 그것이 행동으로 안 나왔다고 그래도 하나님은 행동 죄나, 행동으로 안 하고 마음으로만 품은 죄나 똑같이 본단 말이요. 마음으로 미워한 자는 이미 살인을 했다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런 걸 잘 모르지요? 마음의 범죄, 심범은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죄를 보는 눈은 먼저 심범을 보는 거니까 고차원적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적극적이지 소극적은 안 됩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그 죗값으로 밥을 굶는다면 이것은 소극적입니까, 적극적입니까? 이건 소극적입니다. 소극적으로 예수 믿으면 일곱 마귀가 뭉쳐서 들어옵니다. 방위전은 소극적입니다. 이건 지기가 쉬워요. 우리에게는 돌격전이 좋습니다. 항상 돌격전. 항상 선수를 치고 들어가는 것. 먼저 돌격을 하는 것. 이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 속의 죄가 뽑혀나간 것 같아도 환경이 달라지면 그 범죄가 내 속에서 또 올라오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가 항상 나 잡고 싸워야지 남 잡고 싸울 시간이 없는 겁니다. 언제든지 자기 잡고 싸우는 것. 자기 분별하고 분석하는 것. 이것이 자기 할 일입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 다스리는 이것이 자기 할 일이요. 그런데 우리가 가만 보면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기의 할 일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요.
우리는 성경을 붙잡고 적극적으로 살면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기 속의 더러운 것은 언제 떠나갔는지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매사에 신앙으로 적극적으로 나가면 속에 든 것이 끝내 나타나지를 못하고 자지러져 버린다 그 말이요. 나무가 자꾸 커나가면 주변의 작은 풀들은 그 나무에 가려져서 그만 죽어버리듯이.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잡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못하면 옆에 있는 것이 자꾸 자기를 건드려요. 자기와 싸우자고, 또는 자기와 놀자고 자꾸 건드린다 그 말이요. 사람도 그래요. 자꾸 자기를 상대를 해주면 자꾸 좇아와서 놀자고 그런단 말이요. 그런 거 많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적인 면으로 똥파리가 자기에게 자꾸 날아오면 자기가 자기를 진단하기를 ‘아, 내가 썩었구나’ 하고 빨리 진단하란 말이요. 똥파리가 날아오면 안 되겠지요. 와도 신앙인이 오고, 신앙인이 자꾸 붙고 그래야 배울 게 많고 깨닫는 게 많지요. 그리고 대화의 자리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가 돼야 되는데 동파리가 날아와서 맨날 남의 소리나 하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그러면 귀가 더러워진단 말이요. 자기가 자기를 신앙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딴 것은 잊어버려지더라 그 말이요. 그런데 하물며 우리 성도들이야 그렇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자기의 할 일만 하면 더러운 것은 자멸이 됩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사울 자기 얼굴에 큰 상처입니다. 그래서 이 사울이 ‘아이고, 큰 죄를 지은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느냐?’ 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 말이요. 세상은 단점만 잘 보지 장점은 잘 보지를 못합니다. 천국에서는 장점만 본단 말이요.
스데반을 죽인 이 사울이 그 후에 회개를 해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니 그의 모든 단점은 다 덮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 바울이 된 후에 ‘바울’ 하면 스데반을 죽인 것만 크게 생각이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은 감추어지면서 구라파를, 저 로마를 전도한 바울로 생각이 나진단 말이요.
우리들도 그렇게 돼야 된단 말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자기의 단점을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고 감출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 앞에 좋은 신행(信行)이 많은 사람 앞에 향기가 날려지고 이렇게 돼야 됩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그렇게도 되는 겁니다.
만일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그 상처를 붙들고 회개를 안 했다면 큰일 날 뻔 했겠지요. 그런데 회개를 하고 바로 사니까 사울이 바울이 된 겁니다. 은혜가 커졌어요.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부모형제도 거처지도 없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다 그 말이요. 평소에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있었을 때에 그 교만하던 율법주의 정신 그것을 다 뽑느라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단 말이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갔듯이 말이요.
그 광야로 나가면 무섭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님이 같이 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같이 해 주신 거지요. 하나님이 같이 하니 무서운 게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이 생각을 해 볼 때에 사울의 상처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없느냐 그 말이요. 내 얼굴을 더럽게 한 그 상처가 없느냐 그 말이요.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근본적 회개가 문제가 되겠지요.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항상 하지요. 죄를 지어놓고 고해성사를 하고, 또 죄를 지어놓고 또 고해성사를 하고. 그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는 고해성사가 아니지요. 완전히 회개하는 것. 과거에 죄를 지은 그 길로 다시 가지 않는 것.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는 것.
바울은 사울이 바울로 사람이 달라지니 예수님을 독점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바울에게 주고, 예수님 당신의 실력을 바울에게 주고, 바울은 주님이 주는 대로 그걸 받고.
우리 예수 믿는 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번 두 번 열 번 주님을 위해서 살면 주님의 영광이 나에게로 오고, 주님의 것을 받고, 내가 그 순서대로만 살면 창세기에 있는 비손강의 진리의 금은보석을 받게 되고, 심지어 마귀까지 동원시켜서 나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도와준다 그 말이요. 마귀까지도 도와줘. 마귀를 역이용 한다 그 말이요. 마귀는 죽어라고 성도에게 고통을 주겠지만, 환난 핍박을 주겠지만 깨달은 자는 그 마귀를 역이용을 해. 그러니 마귀는 나의 면류관을 만드는 일에, 내가 영광 받는 일에 도움이 되는 거지. 그렇게 만드는 것.
우리 눈앞에 미운 사람이던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그걸 이용을 해가지고 내 영광을 만들어 나가는 이 신앙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신앙이 만들어지는 자본은 오직 진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붙잡고, 나는 또 예수님을 붙잡고 이렇게 붙잡고 붙잡히고 이렇게 갈 때에 주님이 가자고 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나도 가고, 또 언제 어느 때고 가도 좋다 그 말이지요.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간다. 밤이고 낮이고 어디든지 간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좋으냐 그 말이요.
본문에 보면 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가지고 전을 짓는데 방해꾼들이 나타나지요.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꼭 방해꾼이 나타납니다. 궁극적 구원을 만들어 가려면 꼭 방해꾼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 방해꾼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깨닫고 내가 나를 잡고 씨름하면서 바로 나가려고 하다 보면 항상 방해꾼이 나타나서 나를 쑤시고 건드려. 방해꾼이 나타나서 나를 데리고 놀려고 하고, 같이 놀자고 하고. 방편은 아주 다방면으로. 그럴 때 우리가 지혜를 잘 써야지요. 자칫 잘못하면 성전도 짓지 못하고 진리는 진리대로 잊어버리고 신앙정신 사상은 다 잊어버리고 밟히고 그렇게 가게 된다 그 말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똥파리가 날아오던 휘파리가 날아오던 그게 즐겁고, 그들이 없으면 심심하고 그런 사람들이 오면 즐겁고 이렇게 보였는데 바로 믿어나가려는 마음을 가지니 그런 것들이 신앙 면에서 슬슬 방해가 되기도 하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보는 세계가 달라요. 같은 환경인데도 그 속 중심을 보는 눈이, 이면적인 면에서 보는 눈이 다르다 그 말이요. 이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성전을 지어가야지 자기 궁궐을 만들고 가면 안 된다 그 말이요. 누림성으로 가면 안 된다 그 말이요. 궁궐은 항상 춤추고 퉁소 불고 잔치하고 늘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가 누림으로 살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성전을 지어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지요.
기도 올립시다.
감사합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으면서도 영의 눈이 어두워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앗수르로 포로로 잡혀간 그 신앙상태였음을 영의 눈을 가지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진리이치를 바로 깨닫고 궁극적 구원과 성화구원을 바로 알게 되니 내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개인적 성전을 짓는 신앙상태의 심령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성전을 지어가고자 할 때에 헐뜯고 핍박을 주고 환난을 주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짓지 말고 우리랑 같이 놀자’ 하며 그들과 안 놀면 환난 주고 핍박 주고 헐뜯고 하는 그러한 환경들을 우리가 얼마든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럴 적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영적인 면에 민감성을 주시고, 진리의 성령의 영감의 감화성이 강력하게 우리들 속에 역사해 주시고, 신앙활동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신앙으로 돌격적인 신앙으로 나갈 수 있게 저희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죄 안 지으려고 하는 방비책만 쓰고 있다가 원수들에게 잡아먹히기가 쉽습니다. 지배당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도록 저희들의 신앙이 항상 살아서 역사를 해서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행여나 짧디 짧은 6, 70 평생의 나그네 인생을 궁궐이나 짓고 누리고 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아니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전을 짓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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