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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3: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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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4년 1월12일 http://dabia.net/xe/sermon/732236 |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3:13-17, 주현절 첫째 주일,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오늘 주현절 첫째 주일의 제3 독서에 해당되는 마 3:13-17절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는 물론이고 요한복음서도 간접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걸 보면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의 종교의식입니다. 당시에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다짐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셨기에 이런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요한 공동체와 예수 공동체는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과 그 일행에 대해서 불평한 적도 있습니다. 거꾸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에 대해서 못마땅해 한 적도 있습니다. 선의라고 하더라도 경쟁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밝히면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전해지면 그들의 기세가 더 등등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점을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급기에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빌라로 법정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석방하려는 빌라도를 겁박해서 결국 십자가 처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기독교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죄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세례를 받은 걸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어쨌든지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 앞에서 곤란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떳떳이 밝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가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3장14절과 15절에는 요한과 예수님의 짤막한 대화가 나옵니다.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온 예수님을 보고 요한은 당황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義)를 이룬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대답을 말하기 전에 우선 우리말 성경으로 인해서 벌어질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한의 말은 극존칭어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대(下待) 투로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했고, 누가복음이 보도하듯이 두 분이 친척지간이면서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걸 전제한다면, 말을 높이면 함께 높이고 낮추면 함께 낮추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당시에 요한은 유명 인사였고, 예수님은 무명 인사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예수님이 요한에게 반말 투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세례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연스럽게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그분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인간 구원입니다. 세례가 왜 하나님의 뜻, 즉 그의 구원을 이루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을 요 1: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소위 성육신(incarnation) 신앙입니다. 교부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신학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vere Deus, vere Homo’라고, 즉 ‘참된 하나님, 참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입니다. 이걸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처럼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는 신성과 인성이 뒤섞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입니다. 이걸 아는 게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빌 2:5-11절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세례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근거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했습니다. 그 운명은 십자가입니다. 그걸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마 16:21-28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할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뜯어 말렸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당연한 겁니다. 고난과 죽음은 메시아로서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습니다.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세례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때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16, 17절 말씀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은 세 가지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세 가지 현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은 늘 열려 있기에 따로 열리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개천절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뜻의 개천은 한민족의 원천이 아주 오래되고 깊다는 의미를 담은 단어이지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특히 신약성경에서 하늘은 생명이 가득한 어떤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입니다. 하늘은 그런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주기도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비밀스러운 생명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는 건 예수님이 하늘에 속했다는, 또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도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말하는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없는 것을 꾸며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없어서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의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는 능력입니다. 창조의 힘과 종말의 힘과 부활의 힘은 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생명은 불가능합니다. 그 영이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즉 구원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베토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나오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베토벤은 자기의 악보 초고를 정서할 대필자를 찾습니다. 비엔나 음악대학 졸업반 여학생이 왔습니다. 악보를 건네주고 며칠 후에 가져오게 합니다. 그녀가 정서해온 악보의 한 곳이 틀렸습니다. 베토벤이 틀렸다고 지적하자 그녀는 베토벤의 음악 세계에 의하면 틀렸다고 말한 그것이 오히려 정확하다고 대답합니다. 베토벤은 그 여학생이 실제로 실력이 있는지 시험하려고 일부러 한 곳을 틀리게 해서 보낸 것입니다. 베토벤은 어떤 세계로부터 소리를 계속 듣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생명과 진리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이렇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세 가지 현상은 그 한 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 전체를 통해서 제자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행한 모든 것들, 모든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이고, 성령이 임한 것이고, 소리가 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히 그의 공생애가 시작될 거쳐야 할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사건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례는 부활과 같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세례 때에 열린 하늘과 부활의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똑같습니다. 생명의 극치이며, 은폐된 생명이고, 종말에 환하게 드러날 세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은 줄기차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에만 몰두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17장의 변화산 이야기를 전하면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소리가 났다고 말하며,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에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하고 고백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 외에도 복음서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복잡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게 오늘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요. 본문 말씀을 되돌아보십시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세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즉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특별한 현상을 언급했습니다. 이 현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곧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의 삶과 실질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것보다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 세상에 어디 있는지 알면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사람들이 어디서 생명을 경험했는지를 보면 이것을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정치, 헬라 철학, 그리고 유대 종교에 매달렸습니다. 그걸 추종하던 사람들은 각각 거기서 생명 구원을 경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름으로 다 가치 있는 것들입니다. 이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나라, 이념, 사상, 종교는 자신들이 인류와 세상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다툽니다. 이런 다툼이 세상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그런 세상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세련되어도 마지막은 모두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인물에게 집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옳은가요? 물론 우리는 그들의 믿음, 즉 사도들의 믿음을 옳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기독교인이 된 연유는 각각 다를 겁니다. 소위 모태신앙이기에 교회생활이 삶의 일부가 된 분들도 있고, 여러 종교를 거치는 구도 끝에 기독교를 택한 분들도 있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별 생각 없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가 운명을 걸만한 대상인가요? 예수님을 통해서 풍요로운 생명을 경험했나요? 그래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희망과 사랑과 믿음을 놓치지 않고 있으신가요?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런 질문이 상투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과 같이 돌려서 설명하는 게 훨씬 실질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한 사람은 다른 문제를 사소하게 생각합니다.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산 사람처럼 다른 것들을 사소하게 여깁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사소하게 여깁니다. 자존심, 이기심, 인격마저 사소하게 여깁니다. 그걸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대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쓰라고 가르칩니다. 자아를 강화시키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무언지를 보십시오.
오늘은 주현절 첫 주일입니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절기입니다. 그 사실을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그분에게 임했던 영광에, 즉 생명의 극치인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운명을 안심하고 그분에게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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