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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대한매일] 할아버지와 오동나무 -김은수

신춘문예 김은수............... 조회 수 2315 추천 수 0 2002.01.11 1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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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오동나무.jpg

할아버지의 슬레이트 집은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있었다.금모래가 질펀한 강변을 따라 녹푸른 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에서는 늘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헌 장판을 씌워 만든 평상에서 강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집 안팎으로 빼곡이 들어찬 어린 오동나무들을 손질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낙인 것만 같았다.뒷산 꼭대기엔 장송들이 우람하게 서 있고 주위는 온통 솔 향이 넘실대건만 할아버지는 오동나무를 심어 기르면서 집 둘레에 있던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셨다.
“소낭구는 햇빛 욕심이 많아서 안돼.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 묘목들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어.”
사실 오동나무가 우뚝 자라려면 창이가 할아버지의 큰아드님만큼 나이를 먹어야 할까? 창이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렴풋하게 시간을 재고 있었다.하지만 할아버지는 지극정성으로 오동나무를 돌보셨다.그런 까닭에 줄기마다 통통하니 물살이 오르고 오동잎은 사뭇 푸르렀다.
촉촉한 바람이 할아버지의 흰 머리칼을 헝클고 지나갔다.
“할아부지,우리 공기놀이하자.”
창이는 점을 치려고 두 손을 비틀어 모아 눈가에 갖다 대었다.
“가새,바위,보재기.”
할아버지가 나무 껍질 같은 손을 천천히 내민다.
“히히...내가 먼저여.”
할아버지는 히죽 히죽 웃으며 조약돌을 풀어 던졌다.
창이는 할아버지와 공기놀이를 할 때면 여간 신이 나질 않았다.할아버지가 너무 늙으셔서 오래 못하는 섭섭함이 따르긴하지만.그럴 때면 창이는 더 하자고 조르지도 않았다.할아버지는 한 번 뱉은 말은 두말이 필요 없는 고집쟁이니까.
할아버지에게 야속한 마음이 먹어질 땐 창이는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고집쟁이 할아방구 같으니라구.”
언제인가 뒤뜰 오동나무 응달엔 하얀 꽃이 피어났다.가냘픈줄기 마저 백짓장처럼 하얀 그 꽃은 언제나 고개를 땅으로숙이고 있었다.꽃잎에 이슬이라도 맺히면 창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낙엽들이 흩어져 쌓인 곳에,가을 날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낸 그 슬픔이 남모르게 하얀 수정초로 피어난 것만 같았다.오두마니 그 곳에 앉아 하얀 꽃을 보고 있노라면 창이는 자꾸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그래서 마당으로 뛰쳐나와 한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늘 한결 같았다.샛바람이든 하늬바람이 불든 강물은 새처럼 활짝 펼쳐 올린 날개 선으로 상 하류를 엇갈려 흐르고 있었다.
“시간은 유수 같거늘….윗물과 아랫물이 구분이 없으니….예전과 지금이 함께 있는 듯하구나.”
할아버지가 혼자소리로 하던 어려운 말이 어슴푸레 강바람에 섞여 불어왔다.
할아버지는 아득한 시절을 꿈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을씨년스러이 굳게 닫힌 작은 방으로들어가셨다.창이는 감히 가까이도 못 가보고 방안에서 새나오는 가야금 소리를 훔쳐 들어야 했다.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는 늘 생가지 같은 다리를 길게 모은 두루미가 날개 짓도못해보곤 사라지듯 뚝 그쳤다.소리는 그렇게 끝났는데 할아버지는 방 안에서 감감 나오지를 않으셨다.
‘어두운 방안에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계신 거지?’어느 날 창이는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살금살금 다가가 문 창호지에 귀를 대고 들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방에서 잠이 드셨나?’창이는 검지에 침을 묻혀 창호지 위를 살살 문질렀다.콩알만하게 구멍이 뚫리자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거무룩한 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가야금을 끌어안고 고개를숙이고 계셨다.어두움을 삼키는 듯 할아버지의 야윈 어깨는가늘게 떨었다.할아버지도 뒤뜰에 핀 하얀 꽃 같은 아픔을지니고 사시는 가 보았다.
창이는 서럽게 핀 수정초를 쳐다보다간 냉큼 회 벽을 보고돌아앉았다.
돌 틈에서 까만 돌을 주워 들고 창이는 회 벽에 아기 새를그렸다.언제인가 눈 먼 아기 새처럼 울고 있을 때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창이를 따듯한 품에 보듬어 주셨다.그렇게 안긴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창이를 양자로 들이시고 큰아드님의집에서 나와,수십 년 전에 살던 시골에서 창이와 함께 지내는 터였다.창이는 아기 새 옆에 키 작은 오동나무를 그리고그 다음,가야금을 드리운 할아버지를 그렸다.얼핏 보면 동그라미와 작대기가 얽혀 있는 낙서 같지만 창이는 제 마음을담뿍 담아냈다.
신작로까지 내려가는 샛길 귀퉁이는 창이네 마당과 이어져있었다.샛길 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오는길인지 중노인 한 분이 버들잎새를 입 끝에 물고 마당을 기웃거렸다.
“계슈우?”중노인에게서 날아온 버들잎이 뱅그르르 돌다간 댓돌,할아버지 신발 위에 살포시 앉았다.할아버지는 방문을 활짝 열고내다보았다.
“아이구 이 사람아...”
중노인은 할아버지를 보더니 입 언저리에 곰살궂은 웃음을걸고 두 팔을 번쩍 치켜올렸다.그리곤 단풍잎같이 손바닥을펼치곤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중노인의 춤 장단에 맞추어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며 버선발로 걸어나오셨다.
“기별도 없이 우짠 일이여어?”할아버지는 노랫가락을 붙여 물으셨다.
“부평초 같은 이내몸 바람 따라 와았소.”
“그려.그려.잘 왔네.”
안부를 노래로 물으며 할아버지와 중노인은 얼싸 안고 춤사위를 벌렸다.
창이는 뒤뜰에서 쪼르르 달려 나와 희한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웃었다.
“창이야.어여 절 드려라.할아버지 친동생이나 진배없어.”
창이는 중노인을 향해 땅바닥에 털썩 앉듯 서투르게 절을 했다.
“네가 바로 갸 구나.”
할아버지는 윗도리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창이에게 내미셨다.
“얼른 아래께에 내려가서 소주 두어 병만 사오너라.”
그러자 중노인이 배죽배죽 웃으며 안 저고리에서 술병을 꺼내 들고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으이구….도깨비 같은 눔.”
할아버지의 술판은 점점 여물어만 갔다.한바탕 술판이 무르익지니 강 저편에는 노을이 풀리고 있었다.
“성님,가얏고를 다시 만들어보오.”
할아버지는 맥없는 한숨을 뚝 떨구었다.
“예끼….가당치도 않지.그게 언제 적 일인데….”
“성님이 가얏고를 좀 잘 지었소? 형수님이 그렇게 가시지만 않았어도….”
고개를 젓는 중노인의 이마엔 금방 움푹한 주름이 패였다.
할아버지는 엷은 노을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창이는 오동나무까지 휘휘 울리다 그쳤던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떠올렸다.
그 옛날 할아버지는 이 곳 강가에서 가야금을 만들며 사셨다고 한다.할아버지의 소원은 영영 시들지 않는 소리 꽃을 피우는 가야금을 만드는 거였다.할머니 또한 가야금 타는 솜씨가 빼어나 두 분은 가난했지만 참 행복하게 사셨다고 한다.하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할머니가 세상을 뜨신 이래 할아버지는 두 아드님을 데리고 도시로 나가셨다고 했다.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이곳으로 돌아올 날만을 꿈꾸며 사셨다고 했다.
“다시 가얏고를 지을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허나 이젠 늦었네.가슴은 그대로라고 친들 손이 너무 굳어먹어서…쯔쯔.”
“그래도 그 솜씨가 어디 갔겠소? 다시 만들어 보오.나두 성님이 만든 가얏고 소리가 그리워서 그러오.”
중노인은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얏고 임자는 제가 다리를 놓아 드리지요.”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꿈이라도 꾸어봄세….”
그러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여보게,실은 말일세.내가 그 분을 만난 적이 있다네.”
“누구요?”할아버지는 중노인에 귓속말을 했다.그러자 중노인이 눈을크게 떴다.
“우륵님을?”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에이….성님도….연세가 드니깐 별 농을 다 치네.허허허….”
중노인은 할아버지를 힐끔 흘겨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초겨울,찬바람이 문밖에서 잠을 깨우는 이슥한 새벽이었다.
창호지에 뿌리는 달빛처럼 아득하게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창이는 잠결에,씨익 미소짓다간 눈을 떴다
할아버지가 두루마기를 두르고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게 보였다.
창이는 이상한 생각에 조용히 일어나 할아버지를 뒤따라 나갔다.여느 때와는 다른 걸음걸이로 할아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샛길로 성큼성큼 사라졌다.창이도 얼른 샛길 쪽으로 달려갔다.할아버지는 어느새 산비탈로 옷자락을 날리며 오르고 있었다.바람에 날아가 듯한 뒷모습이었다.
“할아버지.할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할아버지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꼬부랑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낙엽을 휘날리고 발목은 가시가 할퀴는데 얼마나쫓아 왔을까? 창이는 언제인가 할아버지가 들려준 산도깨비가 떠올라 할아버지를 죽자고 따라 올라갔다.고개 하나를 넘자 장다리 장송들이 하늘을 우러르다 잠이 든 까뭇한 벼랑이 나왔다.거기를 벗어나니 강바람이 불어왔다.
쏴아….
달빛은 밝기만 한데 할아버지는 큰 바위로 올라가 겨울,강바람을 온전히 맞고 서 계셨다.할아버지의 머리칼과 두루마기자락이 마구 휘날렸다.그 때,창이가 꿈결에서 들었던 가야금 소리가 은은히 스쳐갔다.
할아버지는 바위에서 넙죽 절을 하였다.그리고 강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바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가야금의 소리 꽃이 하늘로 강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왔다.창이는 할아버지가 되돌아간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해 걸었다.내내 얼떨떨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벌써 할아버지는 두루마기를 벗고 키 작은오동나무 숲을 돌아보고 계셨다.짚 옷이 입혀진 어린 나무줄기 마다 할아버지는 따듯하게 어루만졌다.
“새벽부터 어딜 갔다 오는 겨?”할아버지는 천연덕스레 물으셨다.할아버지의 입김이 소로로오동나무 사이로 말려 들어갔다.
“똥 누러.”
차마 할아버지를 뒤쫓아 갔다오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창이를 꼭 끌어안으셨다.
“내게 가장 큰 바람은 우리 창이가 우람한 오동나무처럼 잘 자라는 거여.”
할아버지는 유유히 남한강을 바라보고 계셨다.
창이는 회 벽에 여우비가 내리면 강 모래밭에 드리우곤 하던 무지개를 더 그려 넣었다. *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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