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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신춘문예]
˝아유 시끄러워서 못살겠네. 허구헌 날 남의 집 턱밑에서 왜 이리도 굿들인 지. 원...˝
동네 어른들의 호통에도 이골이 난 아이들인지라 이웃 아주머니의 웬만한 잔소리에는 아랑곳없이 마냥 뛰고 놉니다. 따로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덕구와 동네 아이들은 그저 골목 안에서 이리저리 맴을 돌 수 밖에 없습니다.
나지막한 굴뚝들이 골목쪽으로 삐죽삐죽 머리를 내민 산비탈 동네입니다. 돌아 앉은 지붕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보입니다. 긴 장마철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홈을 따라 초록의 이끼가 부드럽게 덮여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조붓하고 가풀막 진 골목으로 난 낮은 창들은 희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몇 해고 열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너나없이 단칸방에서 몸을 부비고 사는 터라 딱히 누구네집 방에서 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덕구네에 방이 하나 따로 생긴 후로는 또래 아이들이 골목에서 옹기종기 모여 팽이놀이나 자치기를 일삼던 것도 조금은 뜸해지게 되었습니다.
덕구네집 대문에는 손바닥만한 널빤지에 언제적에 써놓은 건지도 모를 ´한복´이란 글자가 붙어 있습니다. 말이 한복맞춤이지 헌옷가지를 수선하는 일이 고작이지만 덕구 어머니의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언제나 일감이 소복히 쌓입니다.
˝어머니, 재봉틀 소리때문에 공부를 못하겠단 말예요.˝
˝그래 그래, 조금만 참아보거라. 어떻게 수를 내볼테니.˝
학교에서 돌아온 덕구가 보챌 때마다 이렇게 달래곤 하시더니, 어느날 처마를 이어내어 보꾹이 훤한 지붕을 얹고 구들을 놓고 해서는 조그만 방을 하나 꾸몄습니다.
아늑한 덕구의 방입니다. 이 비탈의 여느집처럼 골목보다 낮은 벽쪽엔 유리가 달린 뙤창이 붙어있습니다. 다만 덕구와 동무들이 이 즐거운 방을 위해 열심히 닦은 것이라 맑기가 그지없는 유리창이라는 것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문득 이 맑은 유리창에 걸어 둘 커튼을 떠올린 덕구는 어머니를 졸랐습니다.
˝어머니, 남은 천이 있으면 커튼을 하나 만들어 주셔요. 예?˝
야윈 어머니의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비치는가 싶더니 바쁜 일손을 잠시 멈추시고, 벽장 속에서 찾아온 보퉁이를 끌러 여러 가지 자투리 천들을 죽 늘어 놓으셨습니다. 옥색갑사 분홍국사천 주화사 양단이며 공단이며 무명조각 비단조각 할 것 없이 죄다 내놓으시고는, 이리저리 색을 맞추고 마름질을 해서 덕구의 방 조그만 창에다가 걸어둘 조각보 커튼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어이쿠 이걸 어떡허지? 갑자기 재봉틀이 영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일감은 산더미처럼 밀렸는데...˝
웬만한 고장은 언제나 거뜬하게 고치시곤 했는데 꽤 한참이나 꼼꼼하게 재봉틀 밑을 들여다보셔도 끝내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재봉틀 수리장이를 불러야겠구나.˝
덕구네 재봉틀을 손보러 온 아저씨도 한참동안 이모저모 뜯어보고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아주 못쓰게 됐네요. 나이를 웬만큼 먹은 거라야 말이죠. 새로 장만하셔야겠어요. 숫제 사는 금이 고치는 금보다 헐할 걸요.˝
그리고는 널려있는 공구를 낡은 가방 속에 주섬주섬 주워담고 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대문짝에 비스듬히 걸려있는 ´한복´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널빤지를 내려놓으시고는 그만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살림이 좀 나아지긴 했어도 재봉틀을 다시 살만한 모갯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여태 어머니께서 쓰시던 재봉틀은 증조 할머니때부터 물려온 것으로 어머니의 숨결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란 없습니다. 바느질과 더불어 살았던 지난 세월이 꿈결처럼 아득합니다. 먹고살 방도도 막막해졌지만 무엇보다도 남모르게 담겨진 큰 뜻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을 더 애태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가슴을 묻고 앉은 덕구는 오만 생각을 다해 봅니다.
˝바쁘신 어머닐 보챈 내가 잘못이야. 내가 커튼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재봉틀은 성할 텐데...˝
자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납니다.
˝커튼같은 건 필요없어. 방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걸.˝
이제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건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에 잠기었다가 덕구는 그만 귀잠에 빠져버렸습니다.
˝덕구야! 덕구야! 그만 일어나!˝
조그맣고 부드러운 귀엣말로 연거푸 불러대는 소리에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누구야? 날 부르는 게?˝
˝여기야 여기, 이쪽말이야.˝
어머니께서 채 박음질을 끝내지 못한 조각보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덕구는 숨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서 살며시 조각보를 들추어 보았습니다. 옥색 숙고사와 쪽빛공단 사이에 바늘땀이 멈춰 있는 채로 옥비녀 하나가 꼭 끼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째서 이 옥비녀를 보시지 못한 것일까? 옳지, 틀림없이 이 옥비녀 때문에 바늘이 동강 나고 재봉틀도 못쓰게 된 거야.´
이런 생각이 스치면서 재봉틀이 망가진게 바로 이 옥비녀때문임을 알고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습니다.
덕구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기나 한듯이 재빨리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재봉틀을 망가뜨린건 내 잘못만이 아니야. 어머니께서 나를 잊으시고 오랫동안 묵정이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이기도 해.˝
옥비녀는 비취색 빛깔을 반짝거리며 묵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원래 경주에 있는 남산의 옥돌이었어. 고운 옥비녀로 깎여진 이래 줄곧 너의 집안에서 대물림을 해 왔단다. 한 가문에서 백년을 지녀오면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비의 힘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너희 할머니께서는 이 전설을 믿으시고 그 어려운 시절을 넘기면서도 다른 곳에 팔지 않으신 거야. 나는 지금도 동백 기름내가 풍기는 네 할머니의 쪽진 머리를 기억할 수 있거든. 그렇지만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에게도 그런 말씀을 않으셨지.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고 소원을 빈다면 오히려 화를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셨던거야. 재봉틀과 함께 나를 대물려 받으신 너의 어머니께서는 보자기에 꼭꼭 싸서 잘 넣어두셨는데 어쩌다 자투리 천을 모아두는 보자기 속으로 딸려 들어가서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파묻혀 있게 된 것이었어. 네가 어머니께 커튼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저 벽장안 보퉁이 속에서 갑갑한 시간을 달래고 있을거야. 어쨌든 너는 이제 한 가지의 소원을 부탁할 수 있게 되었어. 물론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자마자 나는 전설을 믿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대물림의 소중함을 아는 다른 주인에게로 가야만 해. 그런데 덕구야, 난 단 한 가지의 소원밖에는 들어줄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을 끝으로 비취색 옥비녀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의 재봉틀을 걱정하던 덕구였지만 옥비녀의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누워계신 어머니는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끝내 포기해 버리고만 자전거, 가죽으로 만든 야구 글러브, 스탠드가 붙은 노란 색의 책상, 학교길을 오가며 지켜보던 진열장 속의 멋진 로봇과 장난감들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한 가지의 소원을 정하느라 온갖 생각에 정신이 없습니다.
˝덕구야, 물... 물 좀 다오. 어이구 이러다간 그만 너의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머니!˝
퍼뜩 정신이 든 덕구는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어머니의 손은 오랜 바느질과 마름질로 굳은 살이 앉았고, 가위손의 길대로 굽어서 마르고 볼품이 없습니다.
˝에이그, 불쌍한 우리 덕구. 니 아버지만 살아계셔도...˝
좀처럼 입에 올리시지 않던 마음 약한 소리를 얄팍한 어깨가 떨리도록 힘없이 뱉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덕구의 가슴이 저립니다.
´저렇게 앓으시는 어머니를 두고 나의 욕심에만 골똘해 있었다니...´
덕구는 옥비녀를 품속에 감추고 살며시 제 방으로 건너 갔습니다.
˝옥비녀야, 나는 그 한 가지의 소원을 지금 말 하겠어.˝
˝그럼 말해보렴. 생각을 잘 했겠지?˝
˝응,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애. 우리 어머니의 재봉틀을 고쳐 주겠니?˝
덕구가 간절한 소원을 말하기 무섭게 비취색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아 참, 내가 깜빡 잊은 게 하나 있구나. 아까 노루발 틈새로 몸뚱아리가 딸려 들어가서 부러지려할 때 내가 재봉틀을 고장낸 거야. 그래서 고쳐놨어. 그러니까 그건 소원이 안돼. 다른 소원을 하나 더 말해 보렴.˝
옥비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덕구는 어머니에게로 소리치며 달려갑니다.
˝어머니! 재봉틀이 고쳐졌어요. 어서 일어나 보셔요!˝
˝뭐라고? 그럴리가... 분명히 수리장이가 고칠 수 없다고 했는데...˝
˝아니예요. 틀림없이 고쳐졌어요.˝
˝그래? 어디 보자.˝
거짓말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재빨리 앉으셨습니다. 그 얼굴에는 감출길 없는 기쁨이 번져났습니다.
덕구의 가슴도 공기가 가득찬 풍선마냥 부풀어 오릅니다.
˝달달달 달달달...˝
재봉틀 소리와 더불어 어머니의 콧노래 소리를 귓가로 모으며 제 방에 모셔둔 옥비녀에게로 갔습니다.
˝옥비녀야! 정말 고마워. 나는 저 재봉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랐단다. 어머니가 일어나신 것도 모두 네 덕택이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은 잘 생각해 보았니?˝
˝아니, 지금부터 또 생각해 봐야돼.˝
이것이 꿈이 아니길 빌면서 덕구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쨍그랑 쨍!˝
˝이놈들아! 저리들 못가겠어! 어이구 지긋지긋해. 하루가 멀다하고 유리를 안 깨나 장독을 안 깨나. 애들 등살에 정말 못살겠다. 못살겠어.˝
그 조붓한 골목에서 야구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무당네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나 봅니다. 조금만 떠들어도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곤 하는 무당집 아주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조그만 뙤창으로 들려옵니다.
˝너 혹시 놀이터를 만들 수 있겠니?˝
˝우리들이 마음놓고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 수 있냔 말이야!˝
옥비녀는 말이 없습니다.
덕구는 애가 달아 오릅니다.
˝집앞을 지나 비탈을 약간만 더 오르면 왼편으로 조금 넓은 빈터가 있어. 거기다가 놀이터를 만든다면 참 근사할 거야.˝
침을 삼킬 겨를도 없이 단숨에 얘기를 했건만 옥비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커다란 놀이터를 갖고 싶어. 우리 동네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 수 있게 말이야.˝
이윽고 옥비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 너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놀이터를 하나 만들겠어. 하지만 너의 소원은 이제 끝나버린다는 걸 알아야 해. 그리고 나도 네 곁을 떠나게 되는 거구.˝
덕구는 옥비녀가 떠난다는 말에 못내 섭섭하긴 했어도 그건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는 걸 거듭거듭 다짐하면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소원했습니다.
이튿날, 아무것도 모르시는 어머니께서는 조각보 커튼을 다 만드셔서 덕구의 방에다 곱게 드리워 주셨습니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 창쪽의 커튼을 바라보는데 골목어귀에서 동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옵니다.
˝이봐요. 글쎄 우리 동네에도 놀이터가 생긴대요.˝
˝동장님이 저 위편 빈터에다가 놀이터를 지으시겠대요. 수차례 시장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오늘에서야 결잰가 뭔가가 났다나봐요.˝
˝어이구 우리 동네 아이들 복이 터졌네.˝
잰 일손을 멈추고 맞장구를 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여간 즐거우신 게 아닙니다.
덕구는 벌떡 일어나 바지춤 속의 옥비녀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고마워. 나의 소원을 이렇게 빨리 들어 주다니.˝
그러자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고마울 것 하나도 없어. 사실은 내 신통력을 아직 부리지도 않았단 말야.˝
˝아니 그럼 너의 요술이 아니란 말이니?˝
˝응, 그건 우연의 일치야. 그러니까 아직도 넌 한 가지의 소원을 말할 수 있어.˝
덕구는 욕심을 부리면 더 큰 화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여기신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더욱이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씩이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더 이상 받고 싶은 마음도 서지 않았습니다.
˝옥비녀야. 나는 내가 빌 수 있는 한 가지 소원을 그냥 가슴 속에다 묻어두겠어. 그리고 너는 다시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셔서 저 재봉틀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게 될 때까지 비밀스럽게 있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애.˝
골목 끝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리라 마음 먹으면서 덕구는 옥비녀를 들고 어머니께로 갑니다.
˝어머니, 혹시 이 옥비녀를 아세요?˝
˝아니? 그 옥비녀를 어디서 찾았니?˝
˝조각보 속에 끼여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미처 이 옥비녀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봉틀이 멈췄던 것같아요.˝
˝깜박 잊고 있었구나. 그 귀한 것을... 에이그, 이 어미 정신도 참...˝
˝어머니, 이제부터는 이 옥비녀를 머리에 꽂고 다니셔요.˝
˝어디 보자. 비녀를 꽂기엔 아직 머리가 짧을 터인데.˝
서랍에서 참빗 하나를 찾아 거울 앞에 가만히 앉으신 어머니께서는 아슴아슴한 옛얘기들을 떠 올리기라도 하시는지 분홍으로 물든 아늠에 보일듯 말듯한 미소 하나가 머뭅니다. ⓒ임현주
˝아유 시끄러워서 못살겠네. 허구헌 날 남의 집 턱밑에서 왜 이리도 굿들인 지. 원...˝
동네 어른들의 호통에도 이골이 난 아이들인지라 이웃 아주머니의 웬만한 잔소리에는 아랑곳없이 마냥 뛰고 놉니다. 따로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덕구와 동네 아이들은 그저 골목 안에서 이리저리 맴을 돌 수 밖에 없습니다.
나지막한 굴뚝들이 골목쪽으로 삐죽삐죽 머리를 내민 산비탈 동네입니다. 돌아 앉은 지붕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보입니다. 긴 장마철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홈을 따라 초록의 이끼가 부드럽게 덮여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조붓하고 가풀막 진 골목으로 난 낮은 창들은 희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몇 해고 열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너나없이 단칸방에서 몸을 부비고 사는 터라 딱히 누구네집 방에서 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덕구네에 방이 하나 따로 생긴 후로는 또래 아이들이 골목에서 옹기종기 모여 팽이놀이나 자치기를 일삼던 것도 조금은 뜸해지게 되었습니다.
덕구네집 대문에는 손바닥만한 널빤지에 언제적에 써놓은 건지도 모를 ´한복´이란 글자가 붙어 있습니다. 말이 한복맞춤이지 헌옷가지를 수선하는 일이 고작이지만 덕구 어머니의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언제나 일감이 소복히 쌓입니다.
˝어머니, 재봉틀 소리때문에 공부를 못하겠단 말예요.˝
˝그래 그래, 조금만 참아보거라. 어떻게 수를 내볼테니.˝
학교에서 돌아온 덕구가 보챌 때마다 이렇게 달래곤 하시더니, 어느날 처마를 이어내어 보꾹이 훤한 지붕을 얹고 구들을 놓고 해서는 조그만 방을 하나 꾸몄습니다.
아늑한 덕구의 방입니다. 이 비탈의 여느집처럼 골목보다 낮은 벽쪽엔 유리가 달린 뙤창이 붙어있습니다. 다만 덕구와 동무들이 이 즐거운 방을 위해 열심히 닦은 것이라 맑기가 그지없는 유리창이라는 것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문득 이 맑은 유리창에 걸어 둘 커튼을 떠올린 덕구는 어머니를 졸랐습니다.
˝어머니, 남은 천이 있으면 커튼을 하나 만들어 주셔요. 예?˝
야윈 어머니의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비치는가 싶더니 바쁜 일손을 잠시 멈추시고, 벽장 속에서 찾아온 보퉁이를 끌러 여러 가지 자투리 천들을 죽 늘어 놓으셨습니다. 옥색갑사 분홍국사천 주화사 양단이며 공단이며 무명조각 비단조각 할 것 없이 죄다 내놓으시고는, 이리저리 색을 맞추고 마름질을 해서 덕구의 방 조그만 창에다가 걸어둘 조각보 커튼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어이쿠 이걸 어떡허지? 갑자기 재봉틀이 영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일감은 산더미처럼 밀렸는데...˝
웬만한 고장은 언제나 거뜬하게 고치시곤 했는데 꽤 한참이나 꼼꼼하게 재봉틀 밑을 들여다보셔도 끝내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재봉틀 수리장이를 불러야겠구나.˝
덕구네 재봉틀을 손보러 온 아저씨도 한참동안 이모저모 뜯어보고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아주 못쓰게 됐네요. 나이를 웬만큼 먹은 거라야 말이죠. 새로 장만하셔야겠어요. 숫제 사는 금이 고치는 금보다 헐할 걸요.˝
그리고는 널려있는 공구를 낡은 가방 속에 주섬주섬 주워담고 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대문짝에 비스듬히 걸려있는 ´한복´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널빤지를 내려놓으시고는 그만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살림이 좀 나아지긴 했어도 재봉틀을 다시 살만한 모갯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여태 어머니께서 쓰시던 재봉틀은 증조 할머니때부터 물려온 것으로 어머니의 숨결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란 없습니다. 바느질과 더불어 살았던 지난 세월이 꿈결처럼 아득합니다. 먹고살 방도도 막막해졌지만 무엇보다도 남모르게 담겨진 큰 뜻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을 더 애태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가슴을 묻고 앉은 덕구는 오만 생각을 다해 봅니다.
˝바쁘신 어머닐 보챈 내가 잘못이야. 내가 커튼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재봉틀은 성할 텐데...˝
자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납니다.
˝커튼같은 건 필요없어. 방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걸.˝
이제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건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에 잠기었다가 덕구는 그만 귀잠에 빠져버렸습니다.
˝덕구야! 덕구야! 그만 일어나!˝
조그맣고 부드러운 귀엣말로 연거푸 불러대는 소리에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누구야? 날 부르는 게?˝
˝여기야 여기, 이쪽말이야.˝
어머니께서 채 박음질을 끝내지 못한 조각보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덕구는 숨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서 살며시 조각보를 들추어 보았습니다. 옥색 숙고사와 쪽빛공단 사이에 바늘땀이 멈춰 있는 채로 옥비녀 하나가 꼭 끼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째서 이 옥비녀를 보시지 못한 것일까? 옳지, 틀림없이 이 옥비녀 때문에 바늘이 동강 나고 재봉틀도 못쓰게 된 거야.´
이런 생각이 스치면서 재봉틀이 망가진게 바로 이 옥비녀때문임을 알고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습니다.
덕구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기나 한듯이 재빨리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재봉틀을 망가뜨린건 내 잘못만이 아니야. 어머니께서 나를 잊으시고 오랫동안 묵정이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이기도 해.˝
옥비녀는 비취색 빛깔을 반짝거리며 묵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원래 경주에 있는 남산의 옥돌이었어. 고운 옥비녀로 깎여진 이래 줄곧 너의 집안에서 대물림을 해 왔단다. 한 가문에서 백년을 지녀오면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비의 힘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너희 할머니께서는 이 전설을 믿으시고 그 어려운 시절을 넘기면서도 다른 곳에 팔지 않으신 거야. 나는 지금도 동백 기름내가 풍기는 네 할머니의 쪽진 머리를 기억할 수 있거든. 그렇지만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에게도 그런 말씀을 않으셨지.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고 소원을 빈다면 오히려 화를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셨던거야. 재봉틀과 함께 나를 대물려 받으신 너의 어머니께서는 보자기에 꼭꼭 싸서 잘 넣어두셨는데 어쩌다 자투리 천을 모아두는 보자기 속으로 딸려 들어가서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파묻혀 있게 된 것이었어. 네가 어머니께 커튼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저 벽장안 보퉁이 속에서 갑갑한 시간을 달래고 있을거야. 어쨌든 너는 이제 한 가지의 소원을 부탁할 수 있게 되었어. 물론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자마자 나는 전설을 믿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대물림의 소중함을 아는 다른 주인에게로 가야만 해. 그런데 덕구야, 난 단 한 가지의 소원밖에는 들어줄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을 끝으로 비취색 옥비녀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의 재봉틀을 걱정하던 덕구였지만 옥비녀의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누워계신 어머니는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끝내 포기해 버리고만 자전거, 가죽으로 만든 야구 글러브, 스탠드가 붙은 노란 색의 책상, 학교길을 오가며 지켜보던 진열장 속의 멋진 로봇과 장난감들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한 가지의 소원을 정하느라 온갖 생각에 정신이 없습니다.
˝덕구야, 물... 물 좀 다오. 어이구 이러다간 그만 너의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머니!˝
퍼뜩 정신이 든 덕구는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어머니의 손은 오랜 바느질과 마름질로 굳은 살이 앉았고, 가위손의 길대로 굽어서 마르고 볼품이 없습니다.
˝에이그, 불쌍한 우리 덕구. 니 아버지만 살아계셔도...˝
좀처럼 입에 올리시지 않던 마음 약한 소리를 얄팍한 어깨가 떨리도록 힘없이 뱉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덕구의 가슴이 저립니다.
´저렇게 앓으시는 어머니를 두고 나의 욕심에만 골똘해 있었다니...´
덕구는 옥비녀를 품속에 감추고 살며시 제 방으로 건너 갔습니다.
˝옥비녀야, 나는 그 한 가지의 소원을 지금 말 하겠어.˝
˝그럼 말해보렴. 생각을 잘 했겠지?˝
˝응,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애. 우리 어머니의 재봉틀을 고쳐 주겠니?˝
덕구가 간절한 소원을 말하기 무섭게 비취색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아 참, 내가 깜빡 잊은 게 하나 있구나. 아까 노루발 틈새로 몸뚱아리가 딸려 들어가서 부러지려할 때 내가 재봉틀을 고장낸 거야. 그래서 고쳐놨어. 그러니까 그건 소원이 안돼. 다른 소원을 하나 더 말해 보렴.˝
옥비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덕구는 어머니에게로 소리치며 달려갑니다.
˝어머니! 재봉틀이 고쳐졌어요. 어서 일어나 보셔요!˝
˝뭐라고? 그럴리가... 분명히 수리장이가 고칠 수 없다고 했는데...˝
˝아니예요. 틀림없이 고쳐졌어요.˝
˝그래? 어디 보자.˝
거짓말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재빨리 앉으셨습니다. 그 얼굴에는 감출길 없는 기쁨이 번져났습니다.
덕구의 가슴도 공기가 가득찬 풍선마냥 부풀어 오릅니다.
˝달달달 달달달...˝
재봉틀 소리와 더불어 어머니의 콧노래 소리를 귓가로 모으며 제 방에 모셔둔 옥비녀에게로 갔습니다.
˝옥비녀야! 정말 고마워. 나는 저 재봉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랐단다. 어머니가 일어나신 것도 모두 네 덕택이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은 잘 생각해 보았니?˝
˝아니, 지금부터 또 생각해 봐야돼.˝
이것이 꿈이 아니길 빌면서 덕구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쨍그랑 쨍!˝
˝이놈들아! 저리들 못가겠어! 어이구 지긋지긋해. 하루가 멀다하고 유리를 안 깨나 장독을 안 깨나. 애들 등살에 정말 못살겠다. 못살겠어.˝
그 조붓한 골목에서 야구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무당네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나 봅니다. 조금만 떠들어도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곤 하는 무당집 아주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조그만 뙤창으로 들려옵니다.
˝너 혹시 놀이터를 만들 수 있겠니?˝
˝우리들이 마음놓고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 수 있냔 말이야!˝
옥비녀는 말이 없습니다.
덕구는 애가 달아 오릅니다.
˝집앞을 지나 비탈을 약간만 더 오르면 왼편으로 조금 넓은 빈터가 있어. 거기다가 놀이터를 만든다면 참 근사할 거야.˝
침을 삼킬 겨를도 없이 단숨에 얘기를 했건만 옥비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커다란 놀이터를 갖고 싶어. 우리 동네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 수 있게 말이야.˝
이윽고 옥비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 너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놀이터를 하나 만들겠어. 하지만 너의 소원은 이제 끝나버린다는 걸 알아야 해. 그리고 나도 네 곁을 떠나게 되는 거구.˝
덕구는 옥비녀가 떠난다는 말에 못내 섭섭하긴 했어도 그건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는 걸 거듭거듭 다짐하면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소원했습니다.
이튿날, 아무것도 모르시는 어머니께서는 조각보 커튼을 다 만드셔서 덕구의 방에다 곱게 드리워 주셨습니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 창쪽의 커튼을 바라보는데 골목어귀에서 동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옵니다.
˝이봐요. 글쎄 우리 동네에도 놀이터가 생긴대요.˝
˝동장님이 저 위편 빈터에다가 놀이터를 지으시겠대요. 수차례 시장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오늘에서야 결잰가 뭔가가 났다나봐요.˝
˝어이구 우리 동네 아이들 복이 터졌네.˝
잰 일손을 멈추고 맞장구를 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여간 즐거우신 게 아닙니다.
덕구는 벌떡 일어나 바지춤 속의 옥비녀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고마워. 나의 소원을 이렇게 빨리 들어 주다니.˝
그러자 옥비녀가 말했습니다.
˝고마울 것 하나도 없어. 사실은 내 신통력을 아직 부리지도 않았단 말야.˝
˝아니 그럼 너의 요술이 아니란 말이니?˝
˝응, 그건 우연의 일치야. 그러니까 아직도 넌 한 가지의 소원을 말할 수 있어.˝
덕구는 욕심을 부리면 더 큰 화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여기신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더욱이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씩이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더 이상 받고 싶은 마음도 서지 않았습니다.
˝옥비녀야. 나는 내가 빌 수 있는 한 가지 소원을 그냥 가슴 속에다 묻어두겠어. 그리고 너는 다시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셔서 저 재봉틀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게 될 때까지 비밀스럽게 있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애.˝
골목 끝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리라 마음 먹으면서 덕구는 옥비녀를 들고 어머니께로 갑니다.
˝어머니, 혹시 이 옥비녀를 아세요?˝
˝아니? 그 옥비녀를 어디서 찾았니?˝
˝조각보 속에 끼여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미처 이 옥비녀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봉틀이 멈췄던 것같아요.˝
˝깜박 잊고 있었구나. 그 귀한 것을... 에이그, 이 어미 정신도 참...˝
˝어머니, 이제부터는 이 옥비녀를 머리에 꽂고 다니셔요.˝
˝어디 보자. 비녀를 꽂기엔 아직 머리가 짧을 터인데.˝
서랍에서 참빗 하나를 찾아 거울 앞에 가만히 앉으신 어머니께서는 아슴아슴한 옛얘기들을 떠 올리기라도 하시는지 분홍으로 물든 아늠에 보일듯 말듯한 미소 하나가 머뭅니다. ⓒ임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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