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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동아일보] 새 -김애영

신춘문예 김애영............... 조회 수 1243 추천 수 0 2004.04.19 23:37:27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  

멀리 보이는 학산은 보라빛이었습니다. 나는 듬성듬성 털이 빠진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산꼭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주위에서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에 희게 누운 풀잎 위나 나무 위에서 햇빛이 졸다가 추운 듯이 부르르 몸을 떨고는 합니다. 나도 한번 부르르 몸을 떨고는 시멘트 바닥 위를 실뱀처럼 가늘게 기어가는 계곡물을 바라보았습니다.
희고 큰 바위 위에 누워 실컷 해바라기를 하고 난 뒤에는 개구리처럼 엎드려 있는 영수를 차가운 물로 놀래키었는데. 그리고 나서 헤헤 웃으며 도망가다가 쭉 미끄럼 타던 푸른 이끼, 개구리헤엄 개헤엄 잠수를 할 때면 무지개 띄워올리며 같이 따라하던 하늘색 물빛도 있었었는데. 그런날 집에 가서 머리꼭지를 만져보면 눈송이만한 모래가 흘러내리기도 했는데.
영수는 오늘 같이 산에 가자고 하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꼬마사슴처럼 목을 길게 뽑고는 운동장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버릴 것처럼 주위엔 눈길도 주지 않고 말입니다.
할머니처럼 영수도 멀리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계곡은 예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습니다.
지금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랑 놀고 있을 미운 영수 얼굴처럼 나는 일부러 계곡은 쳐다보지 않으려고 오른쪽 산길에만 눈을 주며 걸었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뿌연 비누거품과 쓰레기가 쌓인 계곡이 눈 앞에서 밟히며 졸졸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왜 이렇게 밤송이를 안은 것처럼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문득 오른쪽 철망이 쳐진 사이로 말라죽은 담쟁이가 누런 잎을 늘어뜨리고 바스락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주먹으로 누런 잎을 꼭 잡았다 놓으면 모래가루처럼 바사삭 부서지며 흩어져 날아갑니다. 숨어 있던 참새들이 하릴없이 푸드덕거리며 내 하는 모양이 우습다고 까불고요.
하지만 그 새는, 그 새는 참새처럼 조그만 새가 아닙니다.
나는 어젯밤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벌써 두번째 꾸는 꿈이랍니다. 내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면 내 양쪽 가슴에 숨어 있던 갈비뼈가 솟아오르는데, 꼭 그것처럼 산이 울퉁불퉁한 등뼈를 세우고는 놀이터 쪽으로 새카만 그림자를 자꾸만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산너머의 하늘에서는 막 넘어가기 사작하는 겨울해가 온통 붉은 물을 들이고 있었는데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에 가슴 조마조마하게 매달려 있는 감빛 같았습니다.
그런데 옛날처럼 베란다의 장독이랑 빨래너머로 놀이터까지도 보이는 조그만 마루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목에서 나는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할머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나도 창너머 놀이터쪽으로 두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습니다. 그러자 자꾸만 자꾸만 산그늘이 놀이터의 아이들과 나무를 삼키고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가 똑똑한 목소리로 혼자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새가 날아가네, 큰 새가 날아 가는구나.˝
그 목소리는 할머니가 병에 걸려 눕기 전처럼 다정한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어디에 새가 있는지 보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새는 없고 산그늘이 마구 내게로 달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막 넘어가고 있는 햇빛도 여름날처럼 눈부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새가 있어, 할머니?˝
˝할머니, 어디 있어?˝
난 그만 무서워서 허우적거리다가 꿈을 깨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내가 할머니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맨처음 꿈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폭 한숨을 내쉬며 멀리 창 밖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새는 죽은 사람 넋이라 하던데...˝
라며 뜻모를 말만 혼자 하기도 하고요.
나는 오늘 그 새를 보러 산에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수네는 아직 이 산동네에서 살지만 우리는 이사를 갔습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를 세개나 지나야 산이 나오는 먼 곳입니다. 저쪽 산 밑에는, 지금은 아파트랑 길이 생겼지만 옛날 영수와 내가 죽은 제비와 개구리 금붕어 병아리를 묻은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언덕을 오르면 비닐하우스로 된 꽃들의 집이 나옵니다. 그 안에는 국화와 장미가 살고 있습니다. 또 언덕을 넘으면 할머니가 누워있는 동그랗고 노오란 무덤이 나오겠지요.
˝이 녀석, 너 어딜 가니?˝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다니는 게 느껴졌습니다.
흰 바탕에 ´산불조심´이라는 글이 쓰인 난쟁이 깃대를 막 지났을 때였습니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까 커다란 바위 앞에 판자조각으로 양쪽에 벽을 세우고 그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상한 아저씨였습니다. 그 아저씨는 빨간 모자를 쓰고 물 빠진 푸르스름한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 녀석, 성냥 갖고 다니지?˝
나는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채로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습니다.
아저씨의 눈은 아주 작은 세모였습니다. 아저씨의 빨갛고 두꺼운 장갑같이 생긴 손 위에는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책을 닫으며,
˝너같은 개구쟁이는 여기 오면 안돼, 어서 내려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아무 말없이 성냥갑만한 집들과 개미처럼 다니는 사람들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여긴 무엇하러 왔지?˝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대답을 하지않자 아저씨는 다시 말을 붙였습니다.
˝무엇 하러 왔느냐구?˝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이제 하늘을 쳐다봅니다. 나도 따라 쳐다보았습니다.
까치가 한마리 깍깍 울며 저 멀리로 날아갔습니다.
˝저 녀석은 이제 집에 가는 거란다. 조금 있음 해가 지니까.˝
˝그 새는 까치보다 더 큰 새였어요. 어젯밤 꿈속에서 할머니가 그랬어요.˝
나는 세모눈 아저씨에게 처음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이 학산보다 더 큰 새인 모양이구나. 할머니가 꿈속에서 널 찾아온다면 돌아가신 모양이지?˝
아저씨는 세모눈을 크게 뜨고 나를 곧바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말해주마. 이건 비밀인데, 이 산은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이면 커다란 학이 되어 남쪽으로 날아간단다. 넌 지금 사실은 학의 왼쪽 날개깃 속에 서 있는거야. 너 학을 본 적 있니?˝
˝산이 어떻게 학이 돼, 아저씨는 거짓말쟁이야.˝
˝아니야.˝
아저씨는 팔까지 휘휘 흔들며 더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모눈도 더욱 작아졌습니다.
˝네 할머니도 밤에만 나타나잖아. 그것처럼 이 산도 밤의 한 순간에 학이 되어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산이 되는거야. 어디가서 무얼하고 오느냐구? 수평선 너머로 멱감으러 다니는 거야. 사람들이 더럽혀 놓은 것을 씻고 오는 거라구. 어쩜 오늘밤에는 네 꿈속으로 날아갈지도 모르지, 너희 할머니를 태우고서 말이야.˝
아저씨는 머리까지 끄덕이며 말하였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잠든 뒤에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옥상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늘에는 희미한 별이 멀리서 깜빡거리고 동그란 달도 아무 말이 없이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려왔습니다. 별도 달도 나를 따라 떨고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학은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거짓말쟁이야.˝
하며 나는 산쪽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삐죽삐죽한 수많은 지붕너머에 무언가 까맣고 커다란 것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건, 목이 길고 빼빼 마른 커다란 새였습니다. 바다쪽으로 긴 목을 뻗고 내 앞으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조그맣게 불렀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꼭 그 새의 울음소리인 것만 같은 바람소리가 휙 하며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김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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