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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한국일보신춘문예] 바람골 우체부
바람골 우체부
한수연
바람골 우체부가 가슴에 이상한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지난 봄 엽서를 배달하고 돌아온 뒤부터의 일입니다.
가슴 언저리가 켕기는가 하다가는 숨이 막힐 듯이 아픔이 심해지고, 또 어느 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가 문득 되살아나는 아픔이었습니다.
회나무 집에 살고 있는 늙은 의사 부엉이는 한 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돋보기를 연신 밀어 올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슴께가 켕긴다는 것은 이상하단 말씀이야. 가슴은 말짱하거든. 그 언제부터라고 했소?˝
바람골 우체부는 심드렁하게 대꾸하였습니다.
˝넉달째 드는가 봅니다.˝
˝넉달째라......˝
늙은 의사 부엉이는 다시 청진기를 바람골 우체부의 가슴에 대어 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 앉으며,
˝가슴에는 아무 이상이 없소. 혹, 당신의 병은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오? 요샌 더러 그런 환자들이 생긴다니까.˝
그러며 자기의 대머리를 툭툭 두들겨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속에 병이 있다니요?˝
바람골 우체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습니다.
˝그렇지. 가령 심하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든가, 또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면 멀쩡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아픈......˝
˝제 경우가 바로 그렇단 말씀인가요?˝
˝아, 이를테면 말이오. 멀쩡한 가슴이 자꾸 아픈 것 같다니까...... 잘 생각해 보우. 그런 일이 있었던가.˝
바람골 우체부는 가슴을 여미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일이라,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부딪쳤던 일이라-
그러나 이렇다 할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미루나무 잎새들을 노랗게 물들이던 금빛 바람 가을도 가고, 바람 찬 겨울이 잎 진 나뭇가지 사이에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참으로 쓸쓸했습니다.
집들은 모두 문을 닫아 걸고 봄 아가씨가 올 때까지 깊고 달게 자고 있었습니다.
겨울 바람이 제풀에 지쳐 나뭇가지 위에서 잠깐 잠이 든 오후입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휘청휘청 걸어가 밤나무골로 갔습니다.
밤나무골 젊은 의사 다람쥐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의 병은 이 겨울 들어서 더욱 심해진 듯하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픈데다가 감기까지 겹쳤습니다. 봄 아가씨를 기다린 것이 감기의 원인이었습니다.
한 다발 향기로운 엽서를 가슴에 안은 봄 아가씨의 분홍 옷자락이 금방 산모롱이를 돌아 오는 것 같아 빼꼼히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가 봄 아가씨의 편지를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아픔이 깊어질수록 봄 아가씨를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애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재빠르게 진찰을 끝냈습니다. 그리곤,
˝바람골 아저씨, 기다리시는 게 있군요?˝
이렇게 대뜸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니, 그걸 어떻게......?˝
바람골 우체부는 젊은 의사 다람쥐의 기막힌 진찰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게?˝
다람쥐는 빙그레 웃음까지 띠우며 물었습니다.
˝보옴 아가씨의 편집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사뭇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봄 아가씨가 올 날이 아직도 까마득한데 설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감기까지 들었다는 것은 조금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봄엔 어느 쪽으로 엽서 배달을 떠나셨던가요?˝
젊은 의사 다람쥐는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으며 물었습니다.
˝갈매숲이요. 십년째 그 쪽을 맡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이야길 들려 주시겠습니까? 엽서 배달을 떠나셨던 그 갈매숲 얘길요.˝
˝그게 제 아픔과 상관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럼요. 있어도 이만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봄 아가씨의 엽서를 빨리 가지고 가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젊은 의사 다람쥐 앞에서 바람골 우체부는 지난 봄 갈매숲으로 엽서 배달을 갔던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이제 문을 열어도 되지요? 햇빛이 이렇게 따뜻한데요.˝
바람골 우체부가 갈매숲에 이르자마자 성미 급한 아가씨로 소문난 개나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 된다고 했지? 개나리야. 우리는 바람골 우체부가 오지 전에는 안심하고 문을 열 수 없다고 해마다 일러오고 있는데. 들어 보렴. 나뭇가지 끝엔 겨울 바람이 아직도 울고 있어요.˝
개나리를 달래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상수리 할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이렇게 상수리 할머니를 졸라대는 개나리가 귀여워서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저 왔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올시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갈매숲 여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짝자그르, 짝자그르 박수 소리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아, 바람골 아저씨야!˝
˝정말 난 기다리느라 혼이 났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소.˝
상수리 할머니는 점잖게 인사를 하며 조심조심 문을 열고 바람골 우체부가 건네 주는 파란 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파란 향기가 아물아물 코끝을 스밉니다.
상수리 할머니는 이 파란 엽서를 받아 들 때마다 가슴이 더워 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 갈매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상수리 할머니에게 해마다 제일 먼저 문안 인사를 해 오는 바람골 우체부가 한없이 고마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작년부터 부쩍 눈이 어두워 온다는 상수리 할머니에게 봄 아가씨가 보낸 엽서까지 읽어 드리는 바람골 우체부였습니다. 그는 주소만 보고 담장 너머로 편지를 휙 던지고 돌아가는 그런 우체부가 아니었거든요.
-상수리 할머니, 안녕하셔요?
올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기 때문에 상수리 할머니의 건강이 몹시 염려되는군요. 눈까지 어두워 오신다니 퍽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셔요. 제가 여기저기서 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아름 안고 가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테니까요-
바람골 우체부의 가방 속에서 가지가지 색깔의 엽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분홍......
갈매숲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엽서를 받아 든 갈매숲의 식구들이 일제히 닫아 두었던 문을 활짝 열어 젖힌 때문입니다.
˝안녕!˝
˝안녕!˝
여기 저기서 맑은 목소리의 인사가 오고 갔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던 겨울 바람이 눈이 부셔 냅다 달아났습니다.
숲 속은 겨우내 밀린 얘기들을 주고 받느라고 잠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의 기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환한 기쁨 앞에서 언제까지나 기쁜 소식을 전하리란 결심을 굳히곤 하는 바람골 우체부였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 올해도 여전히 아름답군요.˝
언제나 말이 없고 조용한 민들레 아주머니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네, 올 겨울은 유난히 길었죠? 보세요, 아저씰 기다리느라고 제 목이 더욱 길어졌어요.˝
민들레 아주머니는 바람골 우체부의 기쁨에 젖은 얼굴을 살풋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하하.˝
민들레 아주머니가 훌륭한 바느질 솜씨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찬찬하고 깔끔하고 부지런해서 겨우내 온 정성을 바느질에만 쏟고 있기 때문에 이 숲에서 아무도 민들레 아주머니를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놀러 왔던 나비가,
˝민들레 아주머닌 외롭지도 않으셔요? 언제나 혼자시니.˝
˝외롭긴요. 해마다 멀리 날려 보낸 씨앗들을 생각하느라면 그럴 짬이 어디 있나요?˝
이렇게 생각이 깊은 민들레 아주머니는 자기가 만들어 날려 보낸 씨앗들이 여는 민들레의 씨앗보다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바람골 우체부가 전해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 올해도 새깃처럼 부드러운 씨앗을 만드세요. 제가 멀리멀리 날라다 드릴 테니까요.˝
˝고마워요. 이 은혜는 무엇으로나 갚나요?˝
˝하하, 그 고운 모습으로 저를 기다리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언제나 돌아가는 길에 이 갈매숲에 들르곤 한답니다.
갈매숲 친구들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의 작별 인사도 해야 하지만, 민들레의 씨앗을 가지고 가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꽃향기를 가득 담아 왔던 가방 속에 꽃구름 같은 민들레 씨앗을 넣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바람골 우체부의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람골 우체부가 민들레 아주머니네 집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한 일이 생겨있지 않았겠습니까?˝
부드러운 깃 속에 씨앗을 싸안고 바람골 우체부를 자랑스럽게 맞아 주던 그 민들레 아주머니가 초록 치마만 땅위에 벗어 놓은 채 간 곳이 없었습니다.
상수리 할머니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햇볕에 모두 취해 있었던가보우. 그러지 않고서야 바로 이웃에서 민들레댁이 그런 변을 당한 것을 몰랐을라구. 놀러 왔던 나비가 눈이 둥그레 가지고 알려 주는 바람에 정신들을 차렸지.˝
상수리 할머니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동네 꼬마들이래요. 전쟁놀음을 하다가 한 꼬마 녀석이 그만 민들레 아주머니의 목을 밟았다지 뭐예요.˝
제비꽃이 울멍울멍했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닌 바람골 우체부 편에 씨앗을 부쳐 보내는 걸 낙으로 삼으신다더니......˝
냉이는 훌쩍훌쩍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갈매숲을 떠났습니다.
빈 가방을 어깨 위에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는 그의 걸음은 몹시 휘청거렸습니다. 휘청거리는 그 발자국 마다에서 민들레 아주머니의 가느다란 목과 잔잔하게 웃던 모습이 살아났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자꾸만 눈 앞이 흐려와서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민들레의 씨앗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허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민들레 아주머니를 아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었군요, 그랬었군요.˝
바람골 우체부의 이야길 다 듣고 난 젊은 의사 다람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습니다.
˝무엇이 그랬다는 겁니까?˝
˝바람골 아저씨, 아저씨의 아픔은 바로 그 민들레 아주머니 때문입니다.˝
˝민들레, 민들레 아주머니 때문이라니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람골 우체부는 다람쥐를 바라보았습니다.
˝네, 민들레 아주머니가 목을 다쳤다는 그 슬픔이 바로 아저씨의 가슴을 아프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신있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아픔을.˝
한참만에야 바람골 우체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의 그 슬픔이 되살아나서 그의 가슴은 잠시 터질 듯 아팠습니다.
˝이런 데엔 달리 처방이 없답니다.˝
˝처방이 없다구요?˝
˝네, 꼭 한 가지 있긴 있습니다만, 바람골 아저씨에겐 퍽 어려우실 거라서......˝
˝그게 뭐죠, 그게?˝
바람골 우체부는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민들레 아주머니의 일을 아주 잊는다는 것입니다. 아저씨의 머리 속에서. 그러면 아픔은 저절로......˝
˝뭐, 뭐라구요? 민들레의 일을, 그 가슴 아픈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구요?˝
낮은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는 바람골 우체부는 다람쥐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총총히 밤나무골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나무골을 다녀온 뒤로부터 바람골 우체부는 그의 아픔이 도무지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골 우체부는 민들레의 아픔을 나누어 가진 것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봄을 기다리는 바람골 우체부의 가슴 속에는 또 하나 새로운 아픔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들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었습니다. *
바람골 우체부
한수연
바람골 우체부가 가슴에 이상한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지난 봄 엽서를 배달하고 돌아온 뒤부터의 일입니다.
가슴 언저리가 켕기는가 하다가는 숨이 막힐 듯이 아픔이 심해지고, 또 어느 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가 문득 되살아나는 아픔이었습니다.
회나무 집에 살고 있는 늙은 의사 부엉이는 한 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돋보기를 연신 밀어 올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슴께가 켕긴다는 것은 이상하단 말씀이야. 가슴은 말짱하거든. 그 언제부터라고 했소?˝
바람골 우체부는 심드렁하게 대꾸하였습니다.
˝넉달째 드는가 봅니다.˝
˝넉달째라......˝
늙은 의사 부엉이는 다시 청진기를 바람골 우체부의 가슴에 대어 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 앉으며,
˝가슴에는 아무 이상이 없소. 혹, 당신의 병은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오? 요샌 더러 그런 환자들이 생긴다니까.˝
그러며 자기의 대머리를 툭툭 두들겨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속에 병이 있다니요?˝
바람골 우체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습니다.
˝그렇지. 가령 심하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든가, 또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면 멀쩡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아픈......˝
˝제 경우가 바로 그렇단 말씀인가요?˝
˝아, 이를테면 말이오. 멀쩡한 가슴이 자꾸 아픈 것 같다니까...... 잘 생각해 보우. 그런 일이 있었던가.˝
바람골 우체부는 가슴을 여미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일이라,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부딪쳤던 일이라-
그러나 이렇다 할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미루나무 잎새들을 노랗게 물들이던 금빛 바람 가을도 가고, 바람 찬 겨울이 잎 진 나뭇가지 사이에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참으로 쓸쓸했습니다.
집들은 모두 문을 닫아 걸고 봄 아가씨가 올 때까지 깊고 달게 자고 있었습니다.
겨울 바람이 제풀에 지쳐 나뭇가지 위에서 잠깐 잠이 든 오후입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휘청휘청 걸어가 밤나무골로 갔습니다.
밤나무골 젊은 의사 다람쥐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의 병은 이 겨울 들어서 더욱 심해진 듯하였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픈데다가 감기까지 겹쳤습니다. 봄 아가씨를 기다린 것이 감기의 원인이었습니다.
한 다발 향기로운 엽서를 가슴에 안은 봄 아가씨의 분홍 옷자락이 금방 산모롱이를 돌아 오는 것 같아 빼꼼히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가 봄 아가씨의 편지를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아픔이 깊어질수록 봄 아가씨를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애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재빠르게 진찰을 끝냈습니다. 그리곤,
˝바람골 아저씨, 기다리시는 게 있군요?˝
이렇게 대뜸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니, 그걸 어떻게......?˝
바람골 우체부는 젊은 의사 다람쥐의 기막힌 진찰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게?˝
다람쥐는 빙그레 웃음까지 띠우며 물었습니다.
˝보옴 아가씨의 편집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사뭇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봄 아가씨가 올 날이 아직도 까마득한데 설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감기까지 들었다는 것은 조금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봄엔 어느 쪽으로 엽서 배달을 떠나셨던가요?˝
젊은 의사 다람쥐는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으며 물었습니다.
˝갈매숲이요. 십년째 그 쪽을 맡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이야길 들려 주시겠습니까? 엽서 배달을 떠나셨던 그 갈매숲 얘길요.˝
˝그게 제 아픔과 상관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럼요. 있어도 이만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봄 아가씨의 엽서를 빨리 가지고 가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젊은 의사 다람쥐 앞에서 바람골 우체부는 지난 봄 갈매숲으로 엽서 배달을 갔던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이제 문을 열어도 되지요? 햇빛이 이렇게 따뜻한데요.˝
바람골 우체부가 갈매숲에 이르자마자 성미 급한 아가씨로 소문난 개나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 된다고 했지? 개나리야. 우리는 바람골 우체부가 오지 전에는 안심하고 문을 열 수 없다고 해마다 일러오고 있는데. 들어 보렴. 나뭇가지 끝엔 겨울 바람이 아직도 울고 있어요.˝
개나리를 달래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상수리 할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이렇게 상수리 할머니를 졸라대는 개나리가 귀여워서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저 왔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올시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갈매숲 여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짝자그르, 짝자그르 박수 소리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아, 바람골 아저씨야!˝
˝정말 난 기다리느라 혼이 났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소.˝
상수리 할머니는 점잖게 인사를 하며 조심조심 문을 열고 바람골 우체부가 건네 주는 파란 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파란 향기가 아물아물 코끝을 스밉니다.
상수리 할머니는 이 파란 엽서를 받아 들 때마다 가슴이 더워 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 갈매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상수리 할머니에게 해마다 제일 먼저 문안 인사를 해 오는 바람골 우체부가 한없이 고마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상수리 할머니.˝
작년부터 부쩍 눈이 어두워 온다는 상수리 할머니에게 봄 아가씨가 보낸 엽서까지 읽어 드리는 바람골 우체부였습니다. 그는 주소만 보고 담장 너머로 편지를 휙 던지고 돌아가는 그런 우체부가 아니었거든요.
-상수리 할머니, 안녕하셔요?
올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기 때문에 상수리 할머니의 건강이 몹시 염려되는군요. 눈까지 어두워 오신다니 퍽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셔요. 제가 여기저기서 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아름 안고 가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테니까요-
바람골 우체부의 가방 속에서 가지가지 색깔의 엽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분홍......
갈매숲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엽서를 받아 든 갈매숲의 식구들이 일제히 닫아 두었던 문을 활짝 열어 젖힌 때문입니다.
˝안녕!˝
˝안녕!˝
여기 저기서 맑은 목소리의 인사가 오고 갔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던 겨울 바람이 눈이 부셔 냅다 달아났습니다.
숲 속은 겨우내 밀린 얘기들을 주고 받느라고 잠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바람골 우체부의 기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환한 기쁨 앞에서 언제까지나 기쁜 소식을 전하리란 결심을 굳히곤 하는 바람골 우체부였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 올해도 여전히 아름답군요.˝
언제나 말이 없고 조용한 민들레 아주머니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네, 올 겨울은 유난히 길었죠? 보세요, 아저씰 기다리느라고 제 목이 더욱 길어졌어요.˝
민들레 아주머니는 바람골 우체부의 기쁨에 젖은 얼굴을 살풋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하하.˝
민들레 아주머니가 훌륭한 바느질 솜씨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찬찬하고 깔끔하고 부지런해서 겨우내 온 정성을 바느질에만 쏟고 있기 때문에 이 숲에서 아무도 민들레 아주머니를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놀러 왔던 나비가,
˝민들레 아주머닌 외롭지도 않으셔요? 언제나 혼자시니.˝
˝외롭긴요. 해마다 멀리 날려 보낸 씨앗들을 생각하느라면 그럴 짬이 어디 있나요?˝
이렇게 생각이 깊은 민들레 아주머니는 자기가 만들어 날려 보낸 씨앗들이 여는 민들레의 씨앗보다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바람골 우체부가 전해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 올해도 새깃처럼 부드러운 씨앗을 만드세요. 제가 멀리멀리 날라다 드릴 테니까요.˝
˝고마워요. 이 은혜는 무엇으로나 갚나요?˝
˝하하, 그 고운 모습으로 저를 기다리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언제나 돌아가는 길에 이 갈매숲에 들르곤 한답니다.
갈매숲 친구들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의 작별 인사도 해야 하지만, 민들레의 씨앗을 가지고 가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꽃향기를 가득 담아 왔던 가방 속에 꽃구름 같은 민들레 씨앗을 넣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바람골 우체부의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람골 우체부가 민들레 아주머니네 집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한 일이 생겨있지 않았겠습니까?˝
부드러운 깃 속에 씨앗을 싸안고 바람골 우체부를 자랑스럽게 맞아 주던 그 민들레 아주머니가 초록 치마만 땅위에 벗어 놓은 채 간 곳이 없었습니다.
상수리 할머니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햇볕에 모두 취해 있었던가보우. 그러지 않고서야 바로 이웃에서 민들레댁이 그런 변을 당한 것을 몰랐을라구. 놀러 왔던 나비가 눈이 둥그레 가지고 알려 주는 바람에 정신들을 차렸지.˝
상수리 할머니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동네 꼬마들이래요. 전쟁놀음을 하다가 한 꼬마 녀석이 그만 민들레 아주머니의 목을 밟았다지 뭐예요.˝
제비꽃이 울멍울멍했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닌 바람골 우체부 편에 씨앗을 부쳐 보내는 걸 낙으로 삼으신다더니......˝
냉이는 훌쩍훌쩍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갈매숲을 떠났습니다.
빈 가방을 어깨 위에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는 그의 걸음은 몹시 휘청거렸습니다. 휘청거리는 그 발자국 마다에서 민들레 아주머니의 가느다란 목과 잔잔하게 웃던 모습이 살아났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자꾸만 눈 앞이 흐려와서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민들레의 씨앗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허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골 우체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민들레 아주머니를 아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었군요, 그랬었군요.˝
바람골 우체부의 이야길 다 듣고 난 젊은 의사 다람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습니다.
˝무엇이 그랬다는 겁니까?˝
˝바람골 아저씨, 아저씨의 아픔은 바로 그 민들레 아주머니 때문입니다.˝
˝민들레, 민들레 아주머니 때문이라니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람골 우체부는 다람쥐를 바라보았습니다.
˝네, 민들레 아주머니가 목을 다쳤다는 그 슬픔이 바로 아저씨의 가슴을 아프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신있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아픔을.˝
한참만에야 바람골 우체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민들레 아주머니의 그 슬픔이 되살아나서 그의 가슴은 잠시 터질 듯 아팠습니다.
˝이런 데엔 달리 처방이 없답니다.˝
˝처방이 없다구요?˝
˝네, 꼭 한 가지 있긴 있습니다만, 바람골 아저씨에겐 퍽 어려우실 거라서......˝
˝그게 뭐죠, 그게?˝
바람골 우체부는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젊은 의사 다람쥐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민들레 아주머니의 일을 아주 잊는다는 것입니다. 아저씨의 머리 속에서. 그러면 아픔은 저절로......˝
˝뭐, 뭐라구요? 민들레의 일을, 그 가슴 아픈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구요?˝
낮은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는 바람골 우체부는 다람쥐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총총히 밤나무골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나무골을 다녀온 뒤로부터 바람골 우체부는 그의 아픔이 도무지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골 우체부는 민들레의 아픔을 나누어 가진 것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봄을 기다리는 바람골 우체부의 가슴 속에는 또 하나 새로운 아픔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들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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