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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한국일보] 바닷가에서 주운 이야기 -손수복

신춘문예 손수복............... 조회 수 1342 추천 수 0 2004.05.25 09: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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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신춘문예당선작] 바닷가에서 주운 이야기

바닷가에서 주운 이야기

손수복

어느 바닷가.
녹색 바닷말이 흐느적거리는 물너울 사이로 햇살은 물속까지 환히 비춰 줍니다.
어디선가 공기 방울들이 주르르 연이어 올라옵니다.
바닷속에서도 누가 비눗방울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 보입니다.-
모래알이 하얗게 드러난 수초 사이에 조무래기 조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빠금빠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진주야, 나는 빨간 산호꽃으로 머리를 꾸미고 싶어.˝
곱다란 줄무늬의 조개 입에서 산호빛 공기 방울이 떠올라 옵니다.
진주조개가 말했습니다.
˝줄무늬조개야, 나는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가슴 속 깊이 진주를 만들 테야.˝
투명한 진줏빛 공기 방울이 진주조개의 입에서도 떠오릅니다.
그 때, 모래밭에 납작 엎드려 낮잠을 즐기려던 홍어가 투덜대며 일어났습니다.
˝에이 참, 한잠 잘랬더니......너희들은 하고한 날 똑같은 꿈 얘기만 하니, 싫증도 안 나니?˝
˝넌, 누가 남 얘기하는 데 와서 낮잠 자랬니? 너야말로 하고한 날 낮잠만 자니까 옆으로 퍼지기만 하지. 아이고, 먼지 좀 피우지 말고 가란 말야!˝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홍어가 달아나자, 줄무늬조개는 잠시 조개 껍데기를 덮어야 했습니다.
모래먼지가 가라앉자, 바닷속은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는 또 심심해졌습니다. 이럴 때면 소라가 생각납니다.
˝소라는 어찌 됐을까?˝
줄무늬조개가 중얼거렸습니다.
˝글쎄......˝
진주조개도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소라의 꿈은 언제나 바닷가에 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소라가 그리는 하얀 물새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 하얀 물새가 스칠 듯 바다 위를 날면 소라는 미칠 듯이 가슴이 뛰곤 했습니다.
어느 날, 소라는 하얀 물새를 좀더 가까이 보고 싶어, 얕은 바위턱까지 기어 올라가 먼 빛으로 바닷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마침, 하얀 물새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몸매, 새하얀 날개, 그리고...... 아! -
소라는 보았습니다.
걸음을 멈춘 하얀 물새는 긴 부리를 뽑고 어느 조개랑 오랫동안 입맞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나도 저럴 수만 있다면.)
마침내 소라는 하얀 물새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라는 그의 결심을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에게 말했습니다.
줄무늬조개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이구, 바보처럼! 넌 그 물새가 조개를 사랑해서 그런 줄 아니? 너 정말 큰일날 소리 하는구나. 바닷가에 나갔다간 넌 단박에 물새 밥이 되는 거야.˝
물새 밥이 된다고? 소라는 줄무늬조개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설마 그 아름다운 물새가 남을 해치는 일을 할라구.)
이렇게 생각되었습니다.
˝줄무늬조개 언니는 괜히 샘이 나서 그러지?˝
˝아니야, 우리들의 엄마 아빠도 하얀 물새가 물어 간 거야.˝
소라는 줄무늬조개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 아빠도 하얀 물새님을 찾아 바닷가로 간 걸 거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줄무늬조개 언니, 진주조개 오빠, 잘 있어. 언니 오빠들의 꿈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해요. 그럼, 안녕.˝
소라는 훌훌 떠나 버렸습니다.
˝얘, 진주조개야, 지금쯤 소라는 바닷가에 있을까?˝
˝글쎄......˝

그 때, 머리 위에서 무엇이 ´탕!´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쳐다보니 무엇이 비뚤거리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산산이 조각난 햇살이 다시 제자리에 모아졌을 때,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는 자기들 곁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은 소라 하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모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아니, 소라가 아냐?˝
줄무늬조개가 달려가서 소리쳤습니다.
˝소라야, 정신 좀 차려 봐. 어떻게 된 노릇이니?˝
진주조개도 다그쳐 물었습니다.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는 모로 누워 있는 소라를 바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라는 줄무늬 조개와 진주조개를 보더니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둘은 더욱 영문을 몰라 서로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친 소라는, 아직도 서러운 꿈에서 덜 깬 아기 모양 흑흑 느끼며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어. 바닷가는 온통 흙탕물이고 파도는 산더미로 몰려와서는 바닷가를 때리곤 했어. 나는 세찬 파도에 밀려 정신 차릴 새 없이 어디론가 자꾸 굴러 갔어.
얼마 만에 눈을 뜨고 사방을 휘둘러보니까 밤이었어. 그리고 나는 긴 모래펄에 홀로 나뒹굴어 있는 거야. 파도에 밀려온 거야. 그 파도는 언제 그랬냐 싶게 멀찍이 물러나 찰싹대고 있겠지.
달빛을 부스러뜨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야.
나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어.
˝아!˝
나도 모르게 나는 소리쳤어. 진줏빛보다도 더 고운 빛들이 하늘에 수없이 박혀 있겠지.
˝산호빛보다도 곱구나!˝
나는 그 빛나고 아름다운 빛을 보자, 언뜻 언니 오빠 생각이 난 거야.
˝진주조개 오빠가 저 빛을 보면 더 영롱한 진주를 만들텐데. 줄무늬조개 언니도 더 멋지게 머릴 꾸밀텐데.˝
하고 말야. 나는 바닷속에 아무리 고운 것이 있더라도 저만큼 아름답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 때 바람이 흘러가면서 말해 주었어.
˝저건 별들이란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구요?˝
˝그럼.˝
˝그러면 바람님, 저 별 하나 구할 수 없을까요.˝
바람님은 웃었어.
˝당치 않은 일이야. 내 긴 바람 끝도 저 별에는 미칠 수 없단다. 하지만 네가 여기 온 것을 반기는 뜻으로 꽃 향기나 뿜어 주지. 저 육지에 핀 해당화꽃 향기야. 그럼, 또 만나자.˝
바람은 해당화꽃 냄새만 내 목에 두르고 떠나가 버렸어.
아름다운 별빛 아래서 물새를 생각하느라고 나는 한밤내 한잠도 이룰 수 없었어.

이윽고 아침이 되었어. 바다 위를 불끈 솟아오른 해님...... 빙글빙글 주황바퀴를 돌리듯 반짝이는 빛가루를 한없이 쏘아 보내는 거야. 나는 온몸을 모래펄에 드러내 놓고 나의 부푼 가슴을 펼쳐 그 빛살을 꼭 껴안았어. 그리고 기다렸어. 하얀 물새님을 기다린 거야.
그 때,
˝얘, 넌 누구니?˝
하고, 묻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나보다도 더 작은 달랑게 한 마리가 집게발을 들어 손가락질하며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냐.
나는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어.
그런데 달랑게는,
˝얘 소라야, 조금 있으면 하얀 물새가 나타날 거야. 너도 나처럼 모래굴 속에 빨리 숨을 궁리나 해.˝
하고 일러 주는 거야.
˝물새님이 나타난다고?˝
나는 펄쩍 뛰도록 기뻤어.
아니다 다를까, 조금 있으려니까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하얀 물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에 떠 있었어.
나는 숫제 눈을 꼭 감고 마음 속으로 빌었어.
˝하얀 물새님, 제발 저에게 날아와 주세요......˝
하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얀 물새는 정말 내 마음의 소릴 듣고 날아온 듯 바로 내 옆에서 날개를 치고 있었어.
˝하얀 물새님.˝
나는 간신히 소릴 내어 물새님을 불렀어.
˝아니!˝
순간 나의 목소리는 짧게 끊어지고 말았어. 나를 바라보는 하얀 물새님의 눈빛은 내가 그리던 그런 다정한 눈빛이 아니었거든, 나를 노려보는 그 눈이 아주 아주 무서웠어.
그러나 그 하얀 물새는 사뿐사뿐 나에게 다가오자, 나는 다시 마음이 가벼워졌어.
(저 아름다운 몸매, 새하얀 날개, 낯선 아이에게 처음부터 다정한 눈빛을 누가 보내겠어. 내가 먼저 물새님에게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해야지.)
나는 이렇게 마음을 돌리고 하얀 물새님에게 말했어.
˝하얀 물새님, 저는 하얀 물새님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워한다고? 그리운 게 뭔데.˝
걸음을 멈춘 하얀 물새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묻지 않겠어.
나는 기가 꺾였지만 간신히 힘을 내어 말했어.
˝내 사랑을 물새님께 드리고 싶어요.˝
˝사랑이라고, 사랑은 또 뭐야?˝
˝나의 모든 것을......˝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
˝아, 너의 모든 것이라고.˝
하얀 물새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두어번 끼룩끼룩 소리쳤어.
그리고
˝그러니까, 너의 사랑이라는 게 우리네 법칙하고 똑같은 것이구나.˝
하잖아.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어.
˝우리네 법칙이란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지.˝
나는 물새님이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말에 이제야 나의 꿈을 이루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하얀 물새님, 어서 법칙대로 하세요.˝
하고, 크게 말했지. 그랬더니 하얀 물새는,
˝법칙이란 바로 이거다.˝
하고, 단박에 나를 덥석 무는 거야.
순간 굉장한 아픔이 나의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갔어.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어. 다만 어디론가 한없이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어.
(나는 지금 물새와 한몸이 되어 날고 있구나.)
물새와 나는 그 때 하나의 눈부신 별이 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이제는 아무런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어. 그러더니 곧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 오겠지.
˝안 되겠다, 넌 아직 어려. 바닷물 좀 더 마시고 더 커가지고 나와.˝
이런 소리가 들렸고, 나는 어디론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

소라의 이야기를 듣고 난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소라가 돌아온 것만이 큰 기쁨이었으니까요.
한낮의 햇살도 기울고, 하얀 달빛이 눈부시게 조개 껍데기처럼 바닷물 위에 흩어 뿌려지고 있습니다.
해초도 물고기들도 모두들 잠자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줄무늬조개와 진주조개는 소라가 돌아온 기쁨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 조개들의 꿈이란 이 바닷속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란다. 줄무늬조개 언니가 갖고 싶어하는 산호꽃이나 내가 바라도 진주도, 모두 바닷속에서 찾을 수 있는거구. 소라야, 너도 바닷속에서 네 꿈을 찾아보려무나. 바닷속은 아주 넓고 아름답단다. 그리고, 아주 멋진 친구들도 많이 있구.˝
진주조개의 말은 밤바다 속에서 엄마의 자장가 소리 모양 소라의 귀에 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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