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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
종 속에 숨었지
손혜수
˝좀 얌전히 가자꾸나, 응?˝
아저씨는 뒤뚱대는 자전거를 자꾸 달랬다.
이른 아침.
경주 박물관 하늘에 구름 하나가 구경 나와 있고, 마당에는 뚱뚱한 아저씨가 자전거 연습에 한창이었다.
˝어이쿠.˝
기어이 자전거는 꽃밭 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저씨도 꽃 틈에 묻혔다.
구름이 다 보았다. 부끄러워진 아저씨가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처음 타보니까 그렇지.˝
다시 벌렁 누워버린 아저씨는 맛있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자전거 바퀴는 얄밉게 아직도 비잉 빙 돌고 있었다.
어제 아저씨의 친구가 먼 고장으로 이사하면서 선물로 주고 간 낡은 자전거였다.
어젯밤에 아저씨는 잠이 안 왔다.
마음이 둥둥 자꾸만 떠올랐다. 아침아 오너라, 얼른 오너라. 아저씨는 밤 늦도록 아침만 기다렸다.
˝내가 너무 뚱뚱해서 이렇게 어렵나?˝
아저씨는 슬며시 걱정이었다.
저기 담 너머 벌판에서는 종일 아지랭이가 피어 올랐다. 새로 이사온 꽃 모종들은 경주 박물관 마당이 낯선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저씨는 키작은 꽃은 맨 앞줄에다 심어주었다. 열번째 심은 꽃은 달리아였다.
˝괜찮아. 지금은 서먹하겠지? 하지만 이제 봄비가 한 번 와 봐라. 서로 식구같이 될 테니까.˝
아저씨는 입을 꼭 다문 어린 달리아에게 다 안다는 듯 말해 주었다.
조용한 박물관 마당이 문득 아이들 소리로 가득 찼다.
아저씨는 허리를 펴고 돌아보았다. 아홉 살쯤 먹은 아이들이었다. 서른 명도 넘는 아이들은 한꺼번에 새떼처럼 종알댔다. 안경 쓴 예쁜 선생님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조잘거렸다.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혼자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아저씨가 일하고 있는 꽃밭 앞을 지나갔다.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얘들아, 어디서 왔니?˝
˝서울에서요.˝
아이들은 한꺼번에 노래하듯 대답했다. 아저씨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서울이라? 참 멀리서 왔구나. 아저씨는 아직 서울에 못 가 봤단다.˝
아이들은 아저씨 말을 못 들었는지 저희들끼리 웃으며 가버렸다.
˝정말인 걸.˝
아저씨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신라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꽃 모종을 심었다.
˝꽃을 다 심으면 자전거 연습을 해야겠다. 저녁에 집으로 갈때 동네 어귀에서 자전거에 달린 종을 찌릉찌릉 울려야지. 식구들이 깜짝 놀랄거야.˝
기분이 좋아진 아저씨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살랑 바람이 불었다. 어디선가 단냄새가 날아왔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봄이면 흙에서 나는 냄새구나. 아저씨는 몇 번이나 코를 벌름거리며 흙냄새를 맡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아저씨의 어깨는 어느새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햇빛이 가만히 등에 업혔다. 참 따뜻한 봄볕이었다.
송이가 왔다. 하지만 아저씨는 송이가 온 것도 모른 채 졸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송이는 웃음을 참았다.
˝응? 누구냐?˝
아저씨가 놀라 눈을 떴다. 꽃밭 앞에 송이가 서 있었다. 아저씨는 눈을 끔벅였다. 키작은 송이는 등에다 소풍 가방을 메고 있었다.
˝으응, 너도 서울서 왔구나?˝
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으로 된 임금님 모자는 보았겠지?˝
아저씨가 하품을 감추고 물었다.
˝저어기 보이는 저 방에는 말이다. 흙으로 만든 커다란 말방울이 있지.˝
˝다 보았는 걸요.˝
송이는 살그머니 꽃밭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아저씨는 그 아이를 보았을 거예요.˝
아저씨는 어리둥절해졌다.
˝누구? 오, 너 친구를 잃었구나?˝
송이는 가만히 도리질을 했다. 송이는 마당 가에 서 있는 에밀레종을 가리켰다.
˝저 종 속에 사는 아이 말이에요.˝
아저씨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저씨는 매일 여기서 일하시니까 그 아이를 보았을 거예요.˝
˝에밀레종 속에 누가 있다고?˝
아저씨가 떠듬떠듬 물었다.
˝신라 아이가 살아요. 종소리를 내는 아이 말이에요.˝
아저씨는 저기 에밀레종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면 선녀도 있고, 구름도 그려진 키 큰 종이었다. 아저씨가 매일 보는 종이었다.
˝송이야. 저 종 속에 신라 소녀가 있다고 누가 말해줬지?˝
송이는 생긋 웃었다.
˝선생님이 그랬어요. 에밀레종 소리가 예쁜 건 종 속에서 그 아이가 노래를 불러주기 때문이래요.˝
아저씨는 알았다는 듯 자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를 한 번 봤으면......˝
송이가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송이 얼굴을 한 번 보고, 에밀레종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매일 보았던 에밀레종이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부용이도 송이만하지.˝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이름이 부용이에요? 부용이...부용이...˝
아저씨는 잠에서 깬 사람같이 놀랐다.
˝으응? 내가 부용이라고 했나?˝
송이는 등에 메었던 가방 속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송이는 종이에다 ´부용이´라고 썼다. 왜 부용이 생각이 났지? 아저씨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저씨는 딸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딸 이름은 부용이가 좋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이제 흰 머리가 너무 많았다.
˝저, 송이야. 송이만 알고 있어라. 아저씨는 그 아이와 친하단다.˝
송이가 손뼉을 쳤다.
˝부용이하고요?˝
˝그래, 그 아이 이름은 부용이란다. 부용이는 연꽃이라는 뜻이라지.˝
송이가 사탕같은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 나도 부용이를 보고 싶어요.˝
송이는 아저씨를 졸랐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붉어졌다.
˝송이야. 그런데 부용이는 지금 없단다.˝
아저씨의 말에 송이는 금방 풀이 죽어 보였다.
˝어디 갔나요?˝
송이가 물었다.
˝글쎄다. 아저씨도 오래 못 보았구나. 아저씨도 궁금해서 매일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아이들이 손나팔을 하고 송이를 부르고 있었다.
˝네 친구들이 이제 가려나보다.˝
서운해진 아저씨가 말했다. 송이는 소풍 가방을 다시 메었다.
˝안녕, 아저씨. 서울에 가면 부용이한데 편지를 쓸 거예요.˝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송이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저씨 손에 흙이 묻어서 망설여졌다. 담배 냄새가 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옳지, 옳지.˝
어두워진 박물관 마당에 자전거가 동그라미를 돌고 있었다.
˝고맙다. 자전거야.˝
자전거가 말을 잘 들어 줘서 아저씨는 기분이 좋았다. 아저씨는 에밀레종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으흠.˝
아저씨는 짐짓 기침 소리를 내보았다. 종은 어둠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
˝얘, 부용아.˝
아저씨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나는 말이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란다. 나는 아직 널 보진 못했지만 네가 종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
종은 아무 대답도 안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종소리가 그렇게 예쁘지.˝
아저씨의 낡은 자전거는 경주 박물관을 떠나 벌판쪽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 느림보 별 하나가 허둥지둥 따라갔다. 이제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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