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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길

창작동화 최인걸............... 조회 수 984 추천 수 0 2004.09.21 13: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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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걸

벼가 누렇게 익은 가을의 어느날, 따스한 남쪽나라로 향하는 제비의 날개짓을 따라 밤나무 이파리들이 허공 중에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이파리들이 손에 손을 모아가며 밤송이를 하늘 끝까지 도르르 휘감아 올렸습니다. 심술궂은 바람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목을 기다랗게 빼내고는 한껏 크게 입을 벌렸습니다. 밤송이를 한꺼번에 꿀꺼덕 삼키려고 말입니다. 바람의 속셈을 알아챈 밤송이는 재빨리 몸을 부풀리면서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웠습니다. 바람이 밤송이를 입에 꽉 무는 순간, 밤송이의 가시가 바람을 쿡 찔렀습니다. 바람은 ´아야!´하고 비명을 지르며 밤송이를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바람은 곧장 땅으로 곤두박질치더니 산과 들을 데굴데굴 굴러다녔습니다.
바람이 구를 때마다 낙엽들이 땅바닥에 그림자를 던지며 불꽃처럼 타
올랐습니다. 한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푸하하하!´ 밤송이가 가시 속에 감추었던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는 맘껏 웃고 있었습니다. 밤송이의 웃음소리가 걷잡을 수없이 커져가자 하늘이 들썩거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밤송이의 벌어진 입 가득히 물려있던 알밤들이 웃음에 떠밀려 그만 튕겨나가고 말았습니다.

훈이네 집 슬레이트 지붕 위로 알밤이 톡, 하고 떨어집니다. 떽데구르르.... 훈이는 안방에서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톡, 떽데구르르.... 그러나 훈이는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 했습니다. 그리고는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훈이의 마음은 제비의 텅빈 둥지처럼 쓸쓸했습니다. 연거푸 내쉬는 한숨 속으로 몸뚱이가 폭삭 내려앉는 듯 했습니다. 훈이는 한숨 끝에 나직한 음성으로 친구들 이름을 불러봅니다. 친구들의 이름이 훈이의 귀 밑을 간지럽혔습니다. 훈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봅니다. 뒤안 대밭으로 몰려든 바람이 소란스럽습니다. 마치 저희들끼리 신이 나서 노는 듯 싶었습니다. 훈이는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훈이는 벌떡 일어서 뒷문을 열었습니다. 훈이의 동그랗게 떠진 눈망울 속으로 서늘한 가을 바람이 스며듭니다. 어느새 훈이는 눈망울에 물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훈이의 깊게 패인 볼우물에는 눈물이 괴었습니다. 훈이는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울음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켰습니다. 울음이 꿀꺽 삼켜지자 가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훈이의 물기 어린 눈망울에 올망졸망한 얼굴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가는 사라졌습니다. 훈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보고싶은 얼굴들이 훈이의 손에 뭉클뭉클, 잡힐 것만 같습니다.

밭이랑은 내리쬐는 가을볕을 질끈 깨물고 있었습니다. 잔뜩 풀이 죽은 훈이의 눈망울에 고추의 붉은 빛이 어른거렸습니다. 훈이의 속눈썹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가 맵고 뜨거운 입김을 훅 끼얹습니다. 훈이는 눈이 아려오면서 눈꺼풀이 떨려옴을 느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가을의 풍경은 훈이가 눈썹 하나만 까딱해도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고추잠자리의 날개짓을 따라 길이 열립니다. 마을에서 시작된 길은 세상 끝까지 뻗어있을 겁니다. 길가에 가지런히 심어진 코스모스꽃들은 마치 일렬로 늘어서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랬습니다. 너도나도 말끔히 포장된 이길을 통해서 도시로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밤이 되어도 불을 밝히지 않는 집들이 자꾸만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사람들은 지금쯤 뭘하며 지낼까요? 어느새 훈이의 마음은 길을 따라 한없이 달려갔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길은 돌투성이의 황톳길이었습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먼지가 풀풀 날렸습니다. 뽀오얗게 피어오르는 먼지의 막은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했습니다. 한없이 낮게 깔리는 바람 위로 하얗게 떠오른 길을 따라 서푼서푼 걷다보면 하늘까지 다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까지도 훈이는 이 길을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가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려고요.

하늘이 길 위로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은 바람개비처럼 어지럽게 돌아가며 들판에 눈부신 햇살을 흩뿌립니다. 산봉오리를 넘어온 바람이 훈이의 목덜미에 휘감깁니다. 바람을 한 입 베어물면 ´뽀도독!´ 하고 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 훈이의 시선은 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 꽃망울에 얹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만해도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올려다 봐야했던 코스모스는 훈이가 5학년이 된 지금에 와선 고개를 푸욱 숙이고 내려다 봐야 한답니다. 그만큼 훈이가 쑥쑥 자란 겁니다.
훈이의 입에서 픽,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훈이는 입술을 모아서 둥글게 내민 다음 코스모스의 앙증맞은 입술에다 입을 맞췄습니다.
어느새 환한 웃음이 훈이의 뺨을 타고 붉게 번져갑니다. 아마 그 웃음은 코스모스 꽃망울에서 언뜻 선영이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훈이는 저절로 고개가 빼어 내밀어지고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서울로 전학을 간 선영이가 오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토요일이라서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훈이는 곧장 마을 공터에 자리잡은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습니다.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훈이의 시선은 길을 따라 쭉 뻗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버스가 오기만을 조바심을 태우며 기다렸습니다. 훈이의 시선이 가 닿은 곳에서 버스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훈이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버스는 훈이의 눈망울 속으로 빨려드는 듯싶게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버스가 정차하고 손님이 다 내린 다음에도 선영이는 훈이의 눈망울 속으로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싶었습니다. 훈이는 한 시간 후에 오는 다음 버스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훈이의 시선은 다시 길을 향해 뻗어갔습니다. 모든 만남은 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선영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막차가 끊어지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훈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큼큼, 하는 소리에 훈이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내내 어디선가 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무슨 말로 온몸으로 풀이 죽은 훈이의 마음을 달래줄까 생각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훈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단다.˝
아버지의 말에 훈이는 왠지 화가 났습니다.
˝아빠, 우리도 서울 가서 살아요.˝
훈이는 아무 생각없이 말을 쏟아냈습니다.
˝도시에서 살았으면 엄마는 살아계셨을 거예요.˝
그때 아버지의 눈은, 툭 건드리면 눈물이 나올 것처럼 일렁거렸습니다. 훈이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입을 실룩거리던 훈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그만 돌아서버렸습니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걷다보니 선영이네 집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선영이네가 이사 가기 전만해도 훈이는 곧잘 선영이네 집에서 놀곤 했었습니다. 훈이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문 앞에 다다르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에 선뜻 들어가기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마당을
빼곡히 채운 잡초가 쌀쌀맞게 손바닥을 펼쳐 내저으며 훈이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훈이는 용기를 내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겨갔습니다.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훈이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훈이의 나직한 속삭임에도, 내리쉬는 한숨에도 방문이 벌컥 열릴 것만 같았습니다. 쪼르르 달려나온 선영이의 말간 웃음이 보일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방문은 여전히 닫혀있었습니다. 싸늘한 가을 바람이 훈이의 귓전에 스치고 지나갈 따름입니다. 사람은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집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훈이는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방문을 열었습니다. 훈이가 열어젖힌 문이 끼익하고 기분 나쁜 비명을 냈습니다. 어깨죽지가 후득후득, 떨려왔습니다. 가슴이 털컥 내려앉
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쥐는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방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먼지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다 보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도 같았습니다. 먼지 부스러기가 친구들을 대신할 수는 없는 까닭에 훈이는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훈이는 흘끔흘끔 뒷걸음질을 쳐 집을 나왔습니다. 선영이네 집이 저만큼 물러가자 훈이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끝끝내 집을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는 꿈이 있으십니다. 빛과 같은 꿈이랍니다. 전등불 하나에도 수천마리 날벌레가 모여들기 마련이랍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한 꿈을 가꾸어 나간다면 언젠가는 꿈의 영롱한 빛을 좇아서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느새 훈이는 논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빛에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이 훈이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우리 훈이가 왔구나.˝
아버지는 호박빛 웃음을 입에 머금고 훈이의 볼을 쓰다듬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아버지는 들녘을 향해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버지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봅니다. 마치 창밖의 풍경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유리창을 닦듯이 말입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눈앞에 펼쳐진 들녘에 금을 긋습니다.
˝봐라, 훈아. 여기서 저기까지가 우리 논이다. 훈이와 아빠가 여기서 나는 곡식으로 먹고 사는거지. 어디 그뿐이냐. 이 곡식들이 도시로 나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거란다.˝
항상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오늘따라 그 말엔 힘이 실려있습니다. 그 말이 훈이의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왔습니다. 훈이는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습니다. 훈이는 고개를 젖혀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훈이는 송글송글한 아버지의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쓱쓱 문지른 다음,
˝아빠, 힘드시죠.˝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입가에 웃음을 빼어 무셨습니다. 덩달아 훈이의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이 번졌습니다. 차츰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드높아갑니다. 훈이도 한바탕 웃어젖힙니다. 아버지와 훈이의 웃음소리가 알알이 여문 열매로 들판을 촘촘히 채우며 끝없이 번져갔습니다. 어느덧 웃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던 해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이 산비탈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립니다. 산그늘 속으로 빠져든 마을은 텅빈 듯이 고요합니다. 어둠 속에 잠긴 마을에 개구리의 왁자지껄한 울음소리가 자갈밭처럼 깔립니다. 새까만 어둠 위로 보고싶은 얼굴들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아득히 멀고 어두운 하늘에는 별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었습니다. 훈이는 마당 한복판에 놓여있는 평상 위에 반듯이 드러누웠습니다. 가을 바람이 제법 싸늘하게 훈이의 등줄기를 쓸어내립니다.
달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립니다. 바람결을 타고 별빛이 내려옵니다. 별빛이 스며드는 훈이의 눈망울은 꿈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훈이는 몸뚱이를 굴려봅니다. 그랬더니 하늘과 땅이 어지럽게 맴을 그립니다. 맴을 돌때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됩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불빛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그린 동그라미 속에서 마을은 깊게 잠들어 있습니다. 훈이는 목 안에 고인 들뜬 숨을 후, 하고 내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아봅니다.
눈꺼풀 속으로 어둠이 밀려듭니다. 잇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듭니다. 그러는 사이 잠이 훈이의 몸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옵니다. 별들이 일렬로 늘어선 꿈길이 열립니다. 꿈길을 밟으며 아버지가 오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간 사람들이 꿈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사람들의 기쁜 마음이
훈이의 입술에 말간 웃음으로 아로새겨집니다. 밤이 꿈으로 깊어만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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