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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꽃샘눈 오시는 날

창작동화 선안나............... 조회 수 1013 추천 수 0 2004.09.25 09:07:55
.........
꽃샘눈 오시는 날

선안나
      
  아이가 분황사 절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연이다, 연이가 온 거야!´
내 몸은 기쁨으로 마구 떨렸다.
난 어린 동백나무다. 작고 아름다운 섬에 살다가 이 곳 분황사로 온지 반 년이 넘었다.
그런데 난 여태도 땅에다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 곳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남아 있지 절은 흔적도 없고, 주인처럼 절 마당을 지키고 있는 3층 석탑은 무뚝뚝하게만 보였다. 종이며 돌우물이며 절 마당의 나무들까지, 모두가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 동무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살던 섬은 그렇지 않았다. 저만큼에서 달려와 벼랑을 때리며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수평선 너머에서 뭉싯뭉싯 피어 오르던 구름, 내 잎사귀를 간지럽히곤 하던 짭잘한 바람... 그 모든 것이 내 동무였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섬 아이들은 동백 숲 그늘에서 즐겨 소꿉놀이를 하였는데, 연이는 바로 그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연이야! 나 여기 있어.´
나는 힘껏 소리쳤다.
내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가 힐끗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꼭 그만한 키에 그만한 몸집이지만, 그 애는 연이가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연이가 여기까지 올 리가 있겠어? 그 애는 어쩜 나 같은 건 옛날에 잊어버렸을 거야.´
난 슬픔에 목이 메어 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다. 마른 바람이 절 마당의 낙엽을 날리며 우우 소리를 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 혼자만 푸르게 깨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에 별들도 추운 듯 떨고 있었다.
´이 곳은 너무 쓸쓸해. 내가 살 만한 곳이 아니야.´
내 마음속엔, 올 겨울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날이 밝았다. 밤 사이 바람마저 얼어붙었는지, 나무들의 잔가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나무 꼭대기의 홍시를 쪼아 먹느라, 까치만 깍깍 신바람이 났다.
삐이꺽-.
무거운 소리를 내며 나무 대문이 열렸다. 어제 보았던 바로 그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저럴 수가´
더듬더듬 걸음을 옮겨놓는 아이를 보고, 난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린 듯 까만 눈썹 아래, 아이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어제는 왜 그걸 몰랐는지, 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너무 나 혼자의 생각에만 빠져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내 마음은 금방 그 아이에게로 기울었다. 왜냐면, 그 애도 나처럼 자기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이는 분황사에 나타났다. 그 아이 엄마와 스님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아이 이름이 다솜이라는 것과 눈을 고치기 위해 백일 기도를 드린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석탑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할아버지. 다솜이 말인데요. 예쁘게 생긴 아이가 참 안됐어요.˝
˝세상에 안타까운 일이 어디 그뿐이겠느냐.˝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석탑 할아버지였는데,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다솜이 엄마는 다솜이를 왜 이리로 데려왔을까요. 눈을 고치려면 병원으로 가야 하잖아요.˝
˝아마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 봤을 게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 보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좀더 큰 절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옛부터 여기 분황사 약사여래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하셨단다. 또, 천수대비관음상 앞에서 기도를 드려 눈을 뜬 희명이란 여인의 아이도 있었지. 아득한 신라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할아버지, 그럼 다솜이도 눈을 뜰 수 있을까요.?˝
˝글쎄다. 정성이 지극하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 내 생각엔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비는 편이 옳을 것 같구나.˝
˝마음의 눈?˝
˝육신의 눈은 어리석단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알거든.˝
˝...... .˝
˝하나를 잃었다고 나머지 아홉을 포기해선 안될 텐데... .˝
석탑 할아버지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부끄러운 생각에 슬며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석탑 할아버지의 말씀은 꼭 나를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잃어버린 고향 생각에 빠져서 뿌리도 못 내리고 시들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맞아. 하나를 잃었다고 아홉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 날 이후, 나는 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날은 추웠고,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애쓰는 만큼 내 뿌리는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한 이레 두 이레... 내 잎사귀는 푸른 빛으로 싱그럽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이 기특했는지, 스님은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곧 시들어 버릴 것 같더니 용케도 기운을 차렸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이 곳 절 마당에 살게 된 것도 다 보이지 않는 뜻이 있었던 게야. 그러니 기운을 내서 네 몫의 일을 다해야 하고 말고.˝
스님의 말은 메아리가 되어 종일 내 마음에 울렸다.
내 몫의 일이라니, 나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동백나무한테 맡겨진 일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일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오래오래 생각하던 나는 마음을 정했다. 우선 열심히 뿌리를 뻗어 씩씩하게 자라나기로.
고향 섬의 동백나무들처럼 크고 아름답게 되면, 어쩌면 귀하게 쓰여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보물을 가진 것처럼 뿌듯해졌다.
그러나 다솜이를 볼 때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종이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에 표정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눈과 함께 아이다운 웃음마저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안타까웠다.
´다솜아, 기운을 내. 마음을 다해 열심히 기도 드리면 꼭 부처님의 대답이 계실 거야.´
´날 좀 보렴.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들어 가고 있었잖니.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생생해질 수도 있구나.´
´다솜아, 나처럼 보잘것없는 나무한테도 맡겨진 일이 있대. 그러니 다솜이 너한테는 더 크고 소중한 일이 맡겨져 있는지 몰라... .´
그러나 다솜이의 얼굴은 어두워지기만 했다. 어떤 날은, 기도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엄마한테 마구 떼를 썼다.
다솜이가 알아듣건 말건, 나는 날마다 말을 걸었다.
´다솜아, 오늘이 소한이야. 석탑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오늘이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이래. 대한이 소한 집에 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 너도 들어 봤니?´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아. 다솜이 너도 그랬지? 하지만 추운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은 더욱 따뜻할 거야.´
´다솜아, 네 마음에도 빨리 봄이 왔음 좋겠다. 그래서 활짝 웃는 네 모습을 보고 싶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솜이에게 마음을 쏟을수록 내 몸은 훈훈하게 더워지는 것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이번에는 온몸에 열꽃이 돋아 오르는 듯 싶었다.
밤새 잠 못 자고 뒤척인 다음 날이었다.
´아!´
눈부시도록 빨간 보석이, 내 가지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두 송이의 꽃.
마침, 아침 예불을 끝낸 다솜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구 소리쳤다.
´다솜아, 이것 봐. 내가 꽃을 피웠단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빨간 꽃송이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다솜이가 말했다.
˝참 좋은 냄새가 나요. 꽃향기 같아요.˝
˝그럴 리가 있니. 이런 겨울에 무슨 꽃이 핀다고... .˝
˝아니에요. 틀림없다니까요.˝
서툴지만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다솜이는 내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두 팔을 벌렸다.
´... ....?´
영문을 모르고 쳐다보던 나는, 다솜이의 얼굴에 떠오른 맑디맑은 웃음을 보았다.
˝눈이에요, 엄마. 꽃샘눈이 와요!˝
정말 정말 잿빛 하늘에서 하얀 점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하얀 점은 금세 수백 개, 아니 수백만 개로 불어났다.
춤추는 은가루 속에서, 나도 우쭐우쭐 춤을 추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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