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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읽는어른

[창작동화] 오세암

창작동화 정채봉............... 조회 수 1237 추천 수 0 2004.11.23 13:40:38
.........
스님은 그 거지 남매와 포구에서 만났다.
수만 마리의 하얀 나비들이 나는 듯 눈발로 가득한 바다를 보고 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누나, 눈이 바다보다 넓게 내린다.˝
스님이 돌아보니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장님 소녀의 손목을 잡고 소나무와 나란히 서 있었다.
작은 나무 그릇을 하나씩 든 것으로 보아 얻어먹고 다니는 아이들이 틀림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스님은 아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서 빤히 스님을 쳐다보았다. 가을 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이었다.
˝스님 눈썹에도 눈송이가 떨어졌는 걸.˝
스님의 손이 눈 위로 올라가자 아이가 다시 말했다.
˝콧등에도야.˝
장님 소녀가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누구니?˝
˝스님이야. 머리에 머리카락씨만 부려져 있는 사람이야.˝
˝머리카락씨만 뿌려져 있다고? 고 녀석 참…….˝
스님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웃음이 물리었다.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색깔 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 하더라?˝
˝재색이라고 하지.˝
스님이 대답하였다.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장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겠다. 그러니까 때 지난 나물국빛이다 이거지?˝
스님은 웃음을 거두고, 사내아이의 나무 그릇에 돈을 놓았다.
스님이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 그들 남매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바다로부터 물새 우는 소리가 쫓아와서 스님을 한참 동안 꺼억꺼억 하고 따라다녔다.

첫눈이어서 그런지, 눈발은 쌓이지 않고 금방금방 녹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체로 밖을 내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스님은 탁발 그릇 속의 눈을 비우고 산 쪽으로 돌아섰다. 주막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 설악 자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가의 짚가리 속에서 이이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누나, 식은 나물국 스님이 가고 있다.˝
스님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짚더미를 헤쳐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장님 소녀와 그 아이가 노랑지빠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너희들 왜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니?˝
˝우리는 집이 없어.˝
˝그럼 여기서 자겠단 말이냐?˝
˝응.˝
˝눈이 그치면 눈보라가 칠 텐데…….˝
˝괜찮아. 우리가 싸우지만 않으면 돼. 우리가 사이좋게 있으면 매운 바람도 우릴 비켜가는 걸.˝
˝허허, 녀석들 참…….˝
스님은 돌아서서 걸었다.
그런데 어린것들이 눈바람 속에서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새 울음소리로 나타나서 걸음을 더디게 했다.
스님은 얼음이 서리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발길을 돌렸다.
짚더미를 헤치고 아이들을 불렀다.
˝너희들 날 따라가지 않을래?˝
˝어디로 가는데요?˝
이번에는 장님 소녀가 말대답을 하였다.
˝절로 가지. 내가 묵고 있는 절에 가면 따듯한 방도 있고 밥도 있단다.˝
˝정말이야? 스님!˝
사내아이가 벌떡 일어나면서 손뼉을 쳤다.
스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내면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길손이야. 누나 이름은 감이구.˝
˝길손이와 감이라아… 거참 흔치 않은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향교 문지기 아저씨가 지어 주었어. 떠돌이라는 뜻이래. 감이 누나 이름은 내가 지었구.˝
˝감이라는 뜻은 무엇인데?˝
˝아이, 스님도 답답하다. 감이는 그냥 감이라는 뜻이야. 눈을 감았으니까. 그래서 감이야.˝
˝허허 고녀석 참…….˝
˝스님, 우리를 데려가도 높은 사람이 눈치 안 해? 향교에서도 그래서 쫓겨났는데…….˝
˝그러면 조카들이라고 해야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부모 잃은 내 조카가 되는 거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등에서 눈발은 서서히 성글어 졌다.
˝누나, 이 산의 나무들은 말이야. 갈대로 만든 자리를 세운 것 같아. 죽죽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았거든. 저기 저 언덕바지에 있는 전나무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다.˝
˝누나, 아줌마 셋이가 대웅전에서 절을 하고 있어. 복 달라고, 명 달라고 비는 거야. 할머니 둘은 또 탑을 돌고 있어. 저 할머닌 뭘 달라고 저럴까? 극락가게 해 달라고 그러겠지?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그지,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까. 나 같으면 부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겠는데… 에이…….˝
˝내가 누나의 댕기를 잡아당긴 게 아니야. 바람이었어. 바람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아유 답답하다, 답답해. 바람은 우리 눈에 안 보여. 비, 눈, 서리는 보이지. 그러나 바람은 안 보인단 말이야.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만 보여. 굴러가는 낙엽, 흔들리는 나뭇가지, 바람이 짚고 다니는 손자국 발자국만 보인단 말이야. 부처님도 못 보냐구? 그건 모르겠는데. 그래, 맞아. 부처님은 바람을 볼 지도 몰라. 누나, 우리 스님한테 가서 그걸 물어 보자.˝
스님은 우물가에서 발을 닦고 있었다.
˝스님, 하나 물어 봐도 돼?˝
˝무언데?˝
˝부처님 눈에는 바람이 보여?˝
˝바람이라니?˝
˝저기 저 전나무 가지를 흔드는 손님 말이야.˝
˝부처님 눈에는… 그래. 바람이 보이지.˝
˝어떻게 바람이 보이지?˝
˝마음의 눈을 뜨고 계시니까.˝
˝마음의 눈이란 것도 있어?˝
˝그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수많은 눈의 창문이 있단다. 지금 감이는 육신의 창문이 닫힌 거구, 길손이와 나는 마음의 창문이 닫혀 있는 거지.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하나 창문이 열리거든. 그 맨 안쪽 마지막 창까지를 연 분이 부처님이란다. 그땐 바람도 보이고 하늘 뒤란도 보이는 거지.˝
˝스님, 나도 마음의 눈을 뜨고 싶어. 바람도 보고 하늘 뒤란도 보고 싶어. 그래서 우리 감이 누나한테 이 바깥 세상을 더 잘 말해 주고 싶어.˝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해. 나는 내일부터 공부하러 다른 데로 가려고 하는데 길손이 너도 날 따라갈래?˝
˝야, 신난다!˝
길손이는 좋아라 깡총강총 뛰었다.
˝그러려면 감이 누나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데…….˝
˝왜? 감이 누나와 왜 함께 못 가는 거야?˝
길손이의 얼굴에 금방 어둠이 널렸다.
˝산이 험하기 때문에 감이가 거기에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거기가 어딘데?˝
˝마등령 중턱에 있는 관음암이다.˝
이때까지 말없이 옷섶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감이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머물 건가요?˝
˝봄이 오면 내려와야지.˝
˝그렇다면 전 여기 남아 있을게요. 우리 길손이를 데리고 가서 공부만 많이 시켜 주세요.˝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텐데?˝
˝괜찮아요. 전 참을 수 있어요.˝
감이가 의외로 물러서는 바람에 스님의 걱정은 쉽게 풀렸다. 감이와 길손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스님은 내내 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님이 길손이를 데리고 암자로 가기로 마음먹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길손이가 장난이 심하여 절의 젊은 스님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감이는 눈이 멀었어도 제법 부엌일도 거들고 해서 제 밥값은 하는 편이었으나 길손이는 날마다 말썽만 피워댈 뿐이었다. 밤에 이불에다 오줌 싸는 일은 사흘에 한 번꼴, 조용해야 할 선방으로 날짐승을 몰아와서 우당탕거리는 일은 이틀에 한 번꼴, 법회 때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방귀를 뽕 소리가 나게 뀌지를 않나, 불개미를 잡아 와서 스님들의 바지가랑이 속으로 들여보내지를 않나.

길손이는 한사코 작은 물초롱을 들고 나섰다.
˝거기에도 좋은 샘이 있다니까 그러는구나.˝
˝스님 바보야. 내가 물 가져가는 것 같아?˝
˝그럼 물이 아니고 무엇이냐?˝
˝흰구름을 넣어 가지고 가는 거야. 요 앞날 개울에서 건져왔거든.˝
˝고 녀석 참…….˝
˝스님, 저기 저 뭉게구름 속에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 이름이 무어야?˝
˝귀떼기청봉이다.˝
˝귀떼기청봉? 그럼 코떼기청봉도 있겠네.˝
길손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길손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를 일구자 큰 노루, 작은 토끼가 귀를 세우고 달렸다. 굴러가는 메아리를 물어오기나 할 것처럼.
길손이와 스님이 관음암에 당도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암자는 한동안 도망가는 산짐승들의 발소리로 수선스러웠다.
˝아냐, 아냐. 너희들이랑 함께 살려고 왔어. 달아나지 마. 도망가지 말라니까!˝
산양이며 장끼를 쫓아다니는 길손이의 뒤에서 스님은 조용히 염주를 굴렸다.
˝고 녀석 참…….˝
겨울잠에 빠져 있던 암자는 길손이의 소리로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벌집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다람쥐굴을 파헤쳤다. 어떤 날은 벌한테 쏘여서 머리에 혹이 났고, 어떤 날은 뱀굴을 다람쥐굴로 잘못 알고 건드렸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솜다리를 보고 놀라기도 하였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바위틈 얼음 속에 발을 묻고 피었어. 누나, 병아리의 가슴털을 만져 본 적이 있지? 그래. 그처럼 꽃이 아주아주 보송보송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 봐.˝
스님의 발소리가 났다.
스님은 빨래를 널고 오는 길이었다.
스님이 물었다.
˝너 조금 전에 누구한테 말을 했느냐?˝
˝감이 누나한테 했어.˝
˝감이는 아래 큰절에 있지 않느냐?˝
˝아유 답답해. 누난 내 곁에도 지금 있는 거야. 감이 누나가 그랬어. 내가 있는 곳엔 어디고 감이 누나 마음도 따라와 있겠다고.˝
˝고 녀석 참…….˝
스님은 뒷머리를 만지며 돌아섰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선방안으로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길손이가 갑자기 두 주먹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선방 문을 열고 스님을 불렀다.
˝스님!˝
그러나 스님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었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 나하고 좀 놀아.˝
그래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 있기만 하면 뭣해! 벽에 뭐가 있어? 솜다리꽃 하나도 피우지 못하구서!˝
길손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문을 닫았다.
볕이 잘 드는 툇마루로 와서 벌렁 누웠다. 참나무의 떨어지고 남은 이파리 하나가 대롱거리는 그림자를 툇마루 위에까지 보내왔다. 사각사각 문종이 위를 기어가는 파리의 발소리도 들려왔다.
길손이는 벌떡 일어났다.
우물가로 가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흰구름은 산 너머로 놀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기만 해 봐라, 혼내 놓을 테니.˝
어깨가 처져서 돌아오는 길손이는 새앙쥐 한 마리가 마루밑으로 숨는 것을 보았다.
˝옳지, 저 마루 밑 어둠 속을 뒤져보자. 밤이고 낮이고 캄캄하기만 한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길손이는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 후 마루 밑에서 나온 길손이의 손에는 깨어진 바릿대와 풀어진 염주알이 세 개 들려 있었다.
길손이가 암자의 구석진 곳을 뒤지는 것으로 재미를 삼은 것은 이날부터였다.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었다.
길손이는 아까부터 뒤란 맨 끝에 있는 골방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 동안 장독대며 다락, 헛간까지를 다 뒤지고 오직 길손이의 손이 못 미친 곳은 이 골방 하나뿐이었다.
˝그 방은 문둥병에 걸린 스님이 묵고 있다가 죽은 곳이란다.˝
언젠가 밥을 먹다 말고 길손이가 물었을 때 스님이 일러 준 말이었다. 문둥병, 듣기만 해도 길손이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감이 누나와 함께 얻어먹으면서 여기저기를 흘러다녔을 때 가장 싫었던 이들이 문둥병자였었다.
˝누나, 방도 무섭게 생겼지? 문에 먼지만 가득해. 그래도 한번 들어가 볼까? 누나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래? 나 금방 들어갔다 나올게.˝
길손이는 감이 누나가 마치 곁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까딱해 보였다. 가만가만히 발꿈치를 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마룻장이 삐꺽거렸다. 길손이는 살며시 문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발로 문턱을 받치고 두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이 와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길손이는 문고리를 움켜쥔 채 마룻바닥에 넘어졌다.
도깨비가 떠다 밀었는가 하고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조용하기만 했다. 떨어진 문 사이로 골방 안이 들여다보였다. 묵은 목침과 질화로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길손이는 살금살금 골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넓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도롱이를 들어냈다. 그러자 갑자기 방안이 밝아졌다. 도롱이가 결려 있던 자리가 들창이었다.
˝누나, 저 창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관음봉이야. 스님이 말해 주었어. 여기서 보니까 아주 바로 보이지?˝
방을 나오려던 길손이는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폭을 보았다.
˝아, 누나, 가만. 벽에 그림이 있다. 머리에 관을 쓴 보살님이야. 연꽃에 떠받혀서 서 있는 걸. 살며시 웃고 있어.˝
길손이는 그림을 향해 절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전 길손이예요. 오늘 너무 떠들어서 미안해요.˝
길손이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문짝을 전처럼 기대 놓다 말고 다시 골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내일부터 놀러 와도 돼요?˝
한참 있다가 길손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그럼 내일 또 올게요. 안녕!˝

이튿날 길손이는 아침밥 숟가락을 놓자마자 골방으로 달려왔다. 목침을 치우고 질화로를 들어냈다. 도롱이는 아예 마루밑에다 쑤셔박아 버렸다. 비로 쓸고 걸레질도 하였다.
길손이는 그림 앞에 앉아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였다.
˝계곡의 고드름이 하늘에서 늘어뜨린 동아줄 같아요. 스님은 김치를 꺼내다가 얼음 조각에 손가락을 베었어요. 보살님도 춥지요? 가만 있어요. 내가 솔가리 긁어 와서 군불 넣어 드릴게요.˝
길손이는 그림 속에 계시는 분을 소리내어 웃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흉내를 내었다.
토끼가 귀를 세우고 뛰어가는 깡총거리는 걸음을,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는 스님의 흉내를, 그리고 슬며시 소리 안 나게 방귀를 뀌어 놓고서 살피기도 하였다.
˝아유 냄새! 보살님이 뀌었지?˝
그러나 그 분은 소리없이 웃기만 하였다.
이래도 가물가물 웃고, 저래도 가물가물 웃는 그림 속의 보살님이 길손이는 마냥 좋았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엄마가 없어요. 엄마 얼굴도 모르는 걸요. 정말이어요. 내 소원을 말할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약속하지요? 내 소원은… 내 소원은… 저… 엄마를… 엄마를 가지는 거예요. 저… 엄… 마… 엄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흰구름이 우물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낮잠을 자는 오후였다.
그 시간에도 길손이는 골방에 와서 놀고 있었다.
˝엄마, 삶은 밤이어요. 스님이 다섯 개를 주셨어요. 내가 네 개를 먹었지만 가장 큰 것은 남겨 왔어요. 어서 잡수세요. 참, 맛있어요.˝
˝내 동무 흰구름이 어떻게 있는지 알아요? 이렇게 웅크리고 잠을 잤어요. 두레박을 풍덩 집어넣었는데도 일어나지 않아요. 잠꾸러기지요?˝
˝엄마, 스님이 찾고 있어요. 얼른 갔다올게 밤 잡숫고 계세요. 안녕.˝
스님은 쌀을 씻고 있었다.
˝그 방에는 드나들지 말랬지 않느냐.˝
˝엄마가 있는데?˝
˝엄마라니?˝
˝우리 엄마……˝
˝탱화를 보고 하는 말이로군. 고 녀석 참……. 그건 그렇고 너 내일은 혼자 있어야겠다.˝
˝왜?˝
˝내가 저잣거리에 좀 다녀와야 할까부다.˝
˝무엇 하러 가는데?˝
˝이것저것 구해 올 것이 많다.˝
˝싫어. 나 혼자 있지 않을 테야.˝
˝그러나 양식이 떨어졌는데 어떡하니?˝
˝나 혼자는 무섭단 말이야.˝
˝무섭긴, 부처님도 계시고 관세음보살님도 계시고 사천대왕도 있는데.˝
˝금방 갔다오는 거야?˝
˝그럼, 금방 오고 말고. 길손아, 내일 내가 없는 동안에 무섭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관세음보살님을 찾거라. 알았지?˝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이 오셔?˝
˝오고 말고. 네가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꼭 오시지.˝
˝마음을 다해 부르면? 그러면 엄마가 온단 말이지?˝
˝인석아, 엄마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이라니까.˝
길손이는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스님은 부랴부랴 장터를 벗어 나오면서 또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낮인데도 바람이 자고 하늘이 가라앉는 것이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장사꾼들도 서둘러서 짐보퉁이를 꾸리고 있었다.
˝큰눈이 오겠는걸. 설악 쪽은 벌써 어두워졌어.˝
대장간 노인이 풀무에서 손을 놓으며 하는 말이 스님의 가슴을 더욱 죄었다.
스님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소달구지 위에 올랐다가 다시 내렸다. 짐의 멜빵을 당기고 남이 한 걸음 걸을 때 두 걸음 세 걸음을 서둘러 떼어놓았다.
그러나 눈은 스님이 버덩말에도 이르기 전에 쏟아졌다.
눈송이는 목화송이 만큼씩 해서 금방 산과 들을 하얗게 덮었다. 처음 보는 폭설이었다. 이내 눈속에 스님의 발목이 빠지고 정강이가 빠졌다.
˝안 돼! 길손이가 혼자 있어! 먹을 것도 없는 암자에 어린아이만 혼자 있다고!˝
스님은 정신이 반은 나간 채 허위적거렸다. 그러나 길조차도 눈속으로 숨어 버렸다. 스님은 부처님을 부르며, 길손이를 부르며 눈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스님이 눈을 떠보니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 안방이었다.
스님은 옆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노인한테 물었다.
˝나무를 해오던 우리 아들이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스님을 발견해서 업고 왔지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어찌나 눈이 많이 왔는지 쌓인 눈이 마루끝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먹을 것 하나 있지 않은 암자에 혼자 있습니다.˝
˝그 암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등령 고개턱에 있습니다.˝
˝네에? 거기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였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 갑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은 그날부터 앓았다. 길손이를 부르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스님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큰절에 있는 감이를 데리고 관음암을 향해 다시 오른 것은 스님이 길손이를 관음암에 혼자 남겨 두고 떠나온 날로부터 한달하고 스무 날 째가 되던 날이었다.

눈이 녹았다지만 길은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눈 녹은 물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빙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케도 발이 나아가는 것은 길바닥에 드러나 있는 무수한 나무 뿌리들 덕이었다. 줄줄 미끄러지다가도 신발이 나무 등걸에 걸리는 통에 몸을 가누게 되었다.
˝감이야, 이젠 비탈이 가파르니 내 등에 업혀야겠다.˝
˝괜찮아요, 스님. 조금 더 걷겠어요.˝
감이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났다.
오랜만에 나타나는 사람이 신기했던지 노루가 빠끔히 나무 사이로 내다보다가는 사라졌다.
장끼는 깃을 하나 떨어뜨려 놓고 등 너머로 날아갔다.
˝봄이 어우러지는지 흙내음이 나요.˝
감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였다.
˝저 곰골 허리도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구나. 저것도 봄기운이지.˝
스님이 감이의 팔을 잡아 주며 말하였다.
봄물이 오르는 물푸레나무 가지에는 밀화부리새가 앉아서 울고있었다.
마등령 고개가 시작되는 데서부터였다. 감이의 귀가 자주 쫑긋거리었다. 눈가의 눈썹도 움찔움찔 움직이었다.
˝스님, 냄새가 나요.˝
˝사향노루 내음 말이냐?˝
˝아냐요. 우리 길손이 내음이어요.˝
˝허허 고 녀석 참…….˝
스님은 감이를 업었다. 한참을 걸었다.
갑자기 감이가 스님을 불렀다.
˝스님,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 지금 윙윙거리는 저 소리는 전나무를 울리는 바람 소리인데.˝
˝아냐요. 바람소리 말고!˝
˝바람소리 말고? 아, 그거야 새 우는 소리 아니냐.˝
˝새 우는 소리 말고,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스님?˝
스님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늙은 마가목나무를 쳐다본 스님은 하, 하고 얼굴을 풀었다.
˝감이야, 그건 딱다구리라는 새가 고목을 쪼는 소리란다.˝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라구요? 아, 들은 적이 있어요. 언젠가 길손이가 말해 주었어요. 날개는 까맣고 입부리가 긴 새라고 했어요. 그 새가 묵은 나무 틈새에 사는 벌레를 잡아먹느라고 따따따 입부리로 쫀다구요.˝
˝그래. 조금 전에 네가 들은 소리가 바로 그 딱다구리 소리란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스님, 우리 길손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님은 헛기침으로 크음, 눈물을 삼키고 나서 감이를 일으켰다. 능선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암자가 있는 산허리로부터 솔바람이 한줄기 흘러 내려왔다.
˝스님, 딱다구리 소리가 아니어요!˝
감이가 펄쩍 주저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스님도 들었다. 바람을 타고 멀어졌다, 가까와졌다 하며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는 목탁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암자에 떠돌이 스님이라도 와서 묵고 있단 말인가.˝
스님은 살갗이 활시위처럼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서 가 보자.˝
스님은 서둘러서 감이를 업었다. 잡목 숲속으로 난 작은 길을 숨가쁘게 걸었다.
관음암의 지붕이 보이는 잔솔밭 언덕에서 감이가 잠깐 내리고 싶다고 하였다.
스님이 땅에 내려 주자, 감이는 서너 걸음 더듬거리고 앞으로 나갔다. 찰피나무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었다.
˝왜? 이번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감이는 손짓으로 말하였다. 어서 와 보세요, 어서요, 하고.
˝무슨 일이 있느냐?˝
˝들어 보세요. 들리지 않으세요?˝
˝고 녀석 참. 나한테는 목탁 소리밖에 안 들리는구나.˝
˝가만히 들어 봐요. 저봐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잖아요.˝
˝저… 저… 저… 소리는……˝
스님은 감이의 팔을 끌고 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와졌다.
스님은 암자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무릎을 꿇었다. 막 길손이를 부르려는데 소리없이 법당문이 열리었다.
살며시 걸어나오는 발, 그것은 길손이의 빨간 맨발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 길손이 네가 살아 있다니?˝
스님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주었어요.˝
길손이의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뒷산 관음봉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소리도 없이 내려오는 것을 스님은 보았다.
여인은 길손이를 가만히 품에 안으며 말하였다.
˝이 어린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도 얘기해 주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꽃과 대화를 나누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과연 이 어린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이 순간 우물 속의 흰구름이 빨갛게 변하였다.
그 때였다. 감이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진 것은.
˝스님, 파랑새가 날아가고 있어요!˝
댓돌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스님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관세음보살님이 파랑새로 몸을 바꾸어 날아가고 있구나. 그런데 눈이 먼 감이 네가 어떻게 보느냐? 아니, 이게 웬일이냐? 감이 너 눈을 떴지 않느냐?˝
˝네, 스님. 모든 게 보여요. 햇빛도 보이고, 스님도 보여요. 마루 위에 잠이 들에 누워 있는 길손이도 보여요.˝
˝아아, 부처님.˝
스님은 길손이한테 계속해서 절을 하였다. 눈을 이제 막 뜬 감이도 스님을 따라서 절을 하였다.
감이는 길손이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누나!˝ 하고 일어나서 장난을 걸 것 같아서 길손이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길손이는 엄마의 그윽한 품에 아주 편안히 누운 것 같았다. 뺨에 손바닥을 괴고 모로 누운 모습이 재미있는 놀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 시간에 설악산에는 꽃비가 내렸다.
솜다리 금낭화 금강초롱 철쭉꽃이 온통 산을 덮었다. 그리고 다람쥐, 오소리, 토끼, 사슴들이 꽃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관음암을 향하여 달려왔다.

사흘 후에 길손이의 장례식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여러 절과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암자가 생기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건봉사의 방장 스님도 오시고, 신흥사 백담사의 주지 스님도 오시고, 멀리 월정사와 상원사의 큰스님, 작은 스님들도 줄을 지어서 찾아왔다. 강릉에 사는 한 양반 어른은 가마를 타고 왔다가 길이 험해서 올라오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만 양양에 사는 한 할머니는 아들의 지게 위에 올라앉아서 무사히 도착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골방으로 가서 길손이가 만나 본 탱화 속의 관세음보살님을 향하여 자꾸자꾸 절을 하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뒤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앞사람의 엉덩이에 부딪치기도 하였다. 그나마도 나중에 온 사람들은 암자의 뜰이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자 밖에서 멀리 관음봉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
다.
스님들은 한때 길손이를 구박했던 자기들의 순진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깊이깊이 뉘우쳤다.
그리고 스님들은 이 암자의 이름을 아예 바꾸기로 하였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부처님이 된 곳이라고 해서 이후부터는 오세암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길손이를 돌보아 온 설정 스님의 괴로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감이의 슬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정 스님은 부처님 공부에 대해서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감이는 막상 눈을 뜨고 보니 길손이가 설명해 주던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이 세상 풍경에 실망하고 더욱 더 길손이를 그리워하였다.

오후가 되어 장작불이 타올랐다.
연기는 곧게 하늘로 올라가서 흰구름과 함께 조용히 흘러갔다. 스님들은 모두 염불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절을 하였다. 감이만이 울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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