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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도시로 가는 얼룩소

창작동화 김여울............... 조회 수 1279 추천 수 0 2004.12.05 19:03:28
.........
농부의 집에 황소 한 마리가 있었다.
믿음직스럽고 튼실하게 생긴 황소였다. 황소의 잔등에는 농부의 손바닥 크기 만한 까만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점 때문일까? 농부의 황소는 마을 사람들에게 얼룩소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얼룩소는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여느 소들에 비해 유난히 힘이 센 데다, 주인을 도와 일을 할 때면 잔꾀를 피우는 법이 없이 무슨 일이건 척척 잘 해냈기 때문이다.
이런 얼룩소에게 소리 없는 불안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주인인 덕칠 아저씨가 얼룩소에게 좀처럼 일할 기회를 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철이 되어도 얼룩소에게 쟁기의 멍에를 지우지 않았다. 겨울이 닥쳐 산에 있는 땔감을 날라야 하는 데도 얼룩소에게 달구지를 끌도록 하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얼룩소는 하루 하루를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외양간을 어슬렁거리며 지내야만 했다. 편하게 먹고 놀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놀고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못할 노릇이었다.
˝심심하고 따분해서 더는 못 참겠군!˝
얼룩소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새삼 야들야들 탐스런 보리 춤이 물결치는 확 트인 들녘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쯤 논에서 쟁기질을 마치고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눈치껏 길섶의 보리 춤을 베어먹던 풋풋한 풀 냄새…. 피로에 지친 몸뚱이는 비록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겁고 팍팍한 나머지 입에서는 푸푸 쓴 냄새가 절로 터져 나와도 그렇듯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녁놀이 비껴 내린 보리밭 사잇길을 내달리며 불어대는 아이들의 풀피리 소리를 듣노라면 하루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 그럴 때면 기왕에 소로 태어난 이상 열심히 일을 해서 주인의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을 하고는 했던 얼룩소였다.
˝이상도 하지, 주인님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씀이야. 어째서 내게 일거리를 주시지 않는 걸까?˝
얼룩소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갔다.
얼룩소는 주인님이 그렇듯 야속할 수가 없었다. 주인 집 형편이 어려웠을 땐 미처 젖도 떨어지지 않은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장으로 팔려 가야만 했던 얼룩소의 조상들이었다.
˝음매- 음매-!˝
뒤늦게 팔려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목청을 늘여 빼며 울었다는 조상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눈에 선했다. 그것은 꼭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떠난다는 슬픔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렵고 구차한 생활 속에서도 가족처럼 애지중지 쓰다듬어 주고 어루만져 주던 주인 집 식구들과 헤어진다는 슬픔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터였다. 그만큼 얼룩소의 조상들은 주인을 위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를 했다.
˝주인님이 조금이라도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있다면 이 얼룩소를 이렇게까지 홀대하지는 않으실 텐데 말야.˝
얼룩소의 불만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거리를 주지 않는 것까지도 좋았다. 먹거리라고 던져 주는 삐삐 마른 풀을 대할 때면 주인님이 그렇듯 섭섭하고 서운하게 생각될 수가 없었다.
˝주인님은 너무도 내 마음을 몰라. 내가 먹고 싶어하는 풀은 이따위 삐삐 마른 풀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실까?˝
얼룩소가 먹고 싶어하는 먹거리는 따로 있었다. 볏짚을 몽글몽글 잘게 썬 여물에 콩깍지를 섞어 끓인 김이 무럭무럭 나는 들큰한 쇠죽이었다. 이제라도 당장 맛있는 쇠죽을 배불리 실컷 먹을 수만 있다면 주인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 따위는 봄눈 녹듯 사라질 것만 같았다.
˝콩깍지를 넣어 끓인 쇠죽의 맛이라니? 입에 착 달라붙는 달착지근한 쇠죽의 맛을 누구라서 알까? 우리나라 농촌에서 자란 소가 아니고서는 감히 맛볼 수 없는 꿀맛 같은 쇠죽….˝
얼룩소는 쇠죽의 맛을 생각만 해도 입안에 자르르 군침이 돌았다. 저도 모르게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감칠맛 나는 쇠죽을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언제였는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했다.
주인님인 덕칠 아저씨가 우루과이 라운든가 뭔가 하는 괴물을 이겨내기 위해 쌀 농사, 보리 농사 대신 소득이 높은 약초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약초 재배를 한답시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다가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만 쇠죽을 끓이는 일을 잊고 만 덕칠 아저씨였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무엇이기에 날마다 저렇게 주인님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법석을 떠는 걸까? 어쩌면 호랑이나 곰보다도 힘이 세고 무서운 괴물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덕칠 아저씨가 혼이 빠져 벌벌 떨며 약초를 재배하기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지는 않을 텐데 말야. 괴물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세어지는 약초를 많이 먹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거든.˝
덕칠 아저씨는 눈을 뜨기 무섭게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경운기를 집어 타고 집을 나가면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예사였다.
얄미운 경운기 같으니…. 얼룩소는 급기야 경운기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얼룩소는 도저히 경운기를 곱게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경운기를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얼룩소가 덕칠 아저씨에게 괄시를 받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경운기 때문이란 생각이었다. 경운기가 들어오면서부터 갑자기 얼룩소의 일거리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얼룩소가 천직처럼 도맡아 해 온 쟁기질을 괴상망측하게 생겨먹은 경운기가 단숨에 해치웠다. 땔감을 하러 다닐 때 끌던 달구지 구실도 경운기가 대신했다. 얼룩소는 기가 막혔다. 허락도 없이 남의 일을 제멋대로 가로채 간 경운기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경운기를 상대로 힘 겨루기를 하기로 했다.
˝어디 한번 내 뿔 맛이 어떤지 보여 주어야지.˝
얼룩소는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별렀다. 마침내 마당 가운데 있는 경운기를 향해 내달려가서는 냅다 들이받았다.
˝아구구!˝
갑자기 얼룩소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왕방울 눈에서 불똥이 번쩍 튀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경운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늙었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래봐도 마을의 소들 가운데 제일 힘이 세기로 소문난 얼룩소라고. 그런 내가 한낱 무쇠 덩어리나 다름없는 경운기 따위한테 지고 물러서야만 하다니….˝
경운기와의 대결에서 지고 난 얼룩소는 갑자기 밀려든 외로움과 서글픔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덕칠 아저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얼룩소였기에 외로움과 서글픔을 한층 더 진하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덕칠 아저씨는 얼룩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눈치였다. 맛있는 쇠죽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칠 아저씨는 날마다 경운기를 조이고 기름을 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칠 아저씨를 보다 못한 얼룩소가 난데없이 음매- 하고 목청을 뽑을 때면 그제야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마당 한 쪽에 그득 쌓아 놓은 삐삐 마른 꼴 다발을 들고 와서는 아무렇게나 외양간 바닥에 내팽개치듯 집어 던지는 것이었다. 그런 덕칠 아저씨의 행동은 마치 꼭 먹을 테면 먹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었다.

얼룩소는 그럴 때마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이렇게 성의 없이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루과이 라운드 괴물이 제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주인님이 오늘날 이만큼이나 살 수 있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렵고 힘들고 고된 일은 하나같이 모두 우리 소들이 해치우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죽도록 일을 해 주고도 모자라 주인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 밑천이 되기 위해 군소리 없이 팔려 나갔고, 주인 집 도련님의 대학교 학자금을 대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우리 소들이었다. 그 같은 우리 소들의 은혜를 눈꼽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처럼 푸대접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덕칠 아저씨가 던져 주는 삐삐 마른 꼴 다발만 해도 그랬다.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였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덥석 입에 물고 야금야금 되새김질을 하며 씹는 맛이 제법 괜찮다 싶었는데, 웬 걸 먹을수록 입맛이 뚝뚝 떨어지며 넌덜머리가 쳐졌다.
˝그 풀이름이 뭐라더라? 옳지,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삐삐 마른 풀 이름이 이탈리안 나이아그래스란 괴상한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농부들이 이걸 무더기로 논과 밭에 심어서 가축의 사료로 쓰고 있다지 뭔가. 척하면 삼천리라고 꼬부랑 말로 된 풀 이름이고 보니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나는 풀이 아닌 게 확실한데 우리가 왜 남의 나라 풀을 먹고살아야 한단 말인가?˝
얼룩소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자라는 향긋한 풀을 뜯고 싶었다. 꼬부랑 말을 하는 나라의 꼬부랑 이름의 풀은 쳐다보기조차도 싫었다.
˝주인님, 부탁입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괴물과 싸우시느라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제 먹거리만은 우리 산 우리 들에서 나는 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테니 콩깍지를 넣어 끓인 쇠죽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얼룩소는 되도록 덕칠 아저씨를 이해하려고 했다. 얼마나 바빴으면 쇠죽을 끓이지 못해 맛도 없는 꼬부랑 이름의 삐삐 마른 꼴 다발을 먹거리로 던져 주었겠는가?
얼룩소는 주인님의 바쁜 일손을 도와주지 못한 채 어슬렁거리며 놀고 있는 게 미안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가시 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까짓 우루과이 라운드 괴물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모르지만 주인님 대신 죽기 살기로 싸워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경운기처럼 못생긴 무쇠 덩어리라도 좋았다. 상대가 누구든 주인님을 못살게 괴롭히는 괴물이라면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오순도순 조용하기만 하던 우리나라 농촌을 마구 물어뜯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우루과이 라운드 괴물.
˝주인님, 언제까지 저를 답답하고 캄캄한 외양간에 가두어 두고 맛도 없는 삐삐 마른 꼬부랑 풀을 먹게 할 작정입니까? 제발 저를 묶고 있는 이 고삐를 풀어 주십시오. 주인님을 못살게 괴롭히는 우루과이 라운드 괴물을 주인님이 보는 앞에서 당장 거꾸러뜨리고 말 테니 어서 이 고삐를 끊어주시라고요?˝

얼룩소의 하소연도 아랑곳없이 덕칠 아저씨는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애써 지은 약초 농사가 꼬부랑 나라에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싸구려 약초 때문에 더 이상 농촌에서 눌러 살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한 덕칠 아저씨는 약초 재배를 하느라 진 산더미 같은 빚을 갚기 위해 얼룩소를 팔아야만 했다. 정 들여 살던 집도 팔아야만 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땅도 팔아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도시로 가기로 작정한 얼룩소의 주인인 덕칠 아저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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