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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이 찹니다.
˝엇, 추워!˝
달님은 움찔 한번 진저리를 치고는 ´끙´ 힘을 줍니다. 몸 속의 열을 높이는 것입니다. 달빛이 좀 더 환해집니다. 늦게까지 깨어서 보채던 바람도 그제서야 슬그머니 잠이 듭니다.
˝진작 그럴 일이지.... 가만 있거라, 오늘은 어딜 구경할까?˝
달님은 그 큰 눈을 들고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춰 봅니다. 푸른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며, 대도시의 고층 건물과 쏟아지는 불빛들, 깊은 산 속의 울창한 숲이며, 골짜기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 맑은 개울물.
˝아니, 저게 뭘까?˝
무심하게 이곳 저곳을 훑어 가던 달님의 눈길이 어느 시골집 담장 안에서 딱 멈췄습니다. 긴 흙담벽의 그림자에 가리긴 했지만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이 비친 것입니다.
늦가을 시골의 밤은 이르기 마련입니다. 일찌감치 저녁들을 해 먹고, 8시나 9시 경이면 대부분의 집에서는 불이 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입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진 달님은 몸을 쓱 움직여 그쪽으로 다가갑니다. 이윽고 담그늘에 가렸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옳아. 또 그 할머니였군.˝
담장 밑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두 손을 꼭 붙이고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할머니 앞에는 조그마한 상 하나가 놓였고, 그 위에는 가늘게 팔락이는 촛불과 함께 맑은 물이 가득 담긴 놋그릇이 얹혔습니다.
달님에게는 이 할머니가 낯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에 없지만, 한 해에 두어번씩은 꼭 이런 모습의 할머니를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달님은 고개를 갸웃이 젖히고 물그릇 안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면 그렇지.˝
물그릇 속에 세사람의 얼굴이 은은하게 나타나 보인 것입니다. 바로 할머니의 아들들입니다. 모두들 반듯하게 잘 생긴 얼굴입니다.
˝...오늘 밤엔 또 할머니 심부름을 해야겠군.˝
그러나 조금도 싫은 마음은 없습니다. 싫은 마음은 커녕 오히려 신명이 납니다. 어쩌다가 밤손님(?)들의 길이나 비춰주고, 술주정꾼들의 노리개가 되는데 비하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이 할머니에게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주 출세를 해서 어느 지방 법원의 판사님입니다. 둘째 아들도 역시 큰 회사의 부장님입니다. 세째 아들은 어떤 건설 회사의 건축 기사입니다.
아들들이 출세는 했지만, 모두 불효자인 모양이라구요? 천만에요. 오히려 그 반대랍니다. 아들들은 객지에 나가 살면서도 늘 할머니 뜻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착한 효자들이랍니다. 아하, 그렇게들 잘 되어 있으면서 왜 어머니를 모셔가지 않고 이렇게 혼자 살게 하느냐 하는 말씀이군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 집은 바로 할머니가 처음 시집와서 살던 집이거든요. 그리고 할머니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존경하던 할아버니가 살다가 돌아가신 집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언젠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집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할머니는 이 집을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은 몇 번이나 어머니를 모셔가려 햇지만 할머니가 한사코 거절하셨지요. 아들들도 결국은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매달 생활비나마 넉넉하게 보내고 틈만 나면 자주 찾아뵙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수 밖에요.
´어디 할머니 마음 속에 들어가 볼까?´
달님은 수많은 빛살 가운데서, 가장 날쌔고 영리한 빛을 몇 줄기 할머니 마음 속으로 쏘아 보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내 큰 아들 녀석에게 한없이 착하고 어진 마음을 심어 주소서. 이 늙은이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제발 덕분 달님 전에 비나이다....˝
할머니 마음 속으로 달려갔던 날쌘 빛줄기 중 하나가 제일 먼저 이런 기도를 간직하고 달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둘째 녀석의 하나뿐인 손주가 병약해서 걱정입니다. 제발 덕분 손주놈 건강하게 해 주옵소서....˝
두번째의 빛살은 이런 기도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세번째의 빛살도 돌아왔습니다. 성질 급하고 불평 많은 세째 아들이 마음 잡고 직장에 충실히 다니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글쎄,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디 그럼 큰 아들네부터 슬슬 찾아가 볼까?´
달님은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들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슬쩍 얼굴을 돌렸습니다.
금세 도회지 큰 아들네 2층 양옥집이 드러납니다.
큰 아들은 늦게까지 자리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지만 잔뜩 찡그린 이마가 달빛에 비칩니다. 내일 있을 재판의 판결을 생각합니다. 밤중에 자기 회사 사장집에 뛰어 들어가 금고를 털다가, 잠이 깬 사장을 찌르고 달아나다가 체포된 어느 가난한 직공에 대한 재판입니다.
˝괘씸한 놈, 큰 벌을 받아야 돼. 잘 사는 게 부러우면 저도 힘껏 노력해서 잘 살도록 해야지,
어디 강도질을 해. 그것도 자기가 모시고 있던 사장 집이 아닌가... 다행히 칼이 빗나갔기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나. 그 사장 덕분에 그래도 지금까지 온 가족들이 먹고 살았을 게 아닌가 말이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라도 이런 놈은 중벌을 내려야만 해.˝
큰 아들은 ´끙´ 신음 소리를 내면서 돌아눕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달님은 소중하게 가슴 속에 담고 있던 어머니의 첫번째 기도를 소리없이 큰 아들의 마음 속에 쏘아 보냈습니다.
´아, 어머니!´
아들은 갑지기 가슴 속에 살아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얘야, 큰애야. 이 세상에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란 없단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웟으면 그런 죄를 저질렀겠니? 훌룽한 재판관은 약한 사람의 편에 서는 거란다. 너도 배우지 못하고, 어긋난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니?˝
˝그렇지만 어머니. 그놈은 흉악범이에요....˝
˝글쎄다. 나는 법은 잘 모른다만,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된다고 알고 있단다. 너는 항상 사람을 죽이는 법관보다는 살리는 법관이 되겠다고 에미에게 말하지 않았니? 그 불쌍한 직공의 가족들을 생각해 보렴....˝
˝...어머니,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다시 한번 옳은 길로 들어서도록 기회를 주겠어요.˝
아들의 찌푸려졋던 얼굴이 환히 펴집니다. 편안하게 눕더니 금방 잠이 듭니다. 조금도 그늘이 없는 밝은 표정입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님은 흡족한 마음으로 거기를 떠났습니다. 곧 다른 도시에 있는 둘째아들네 집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아니, 저런. 큰일 났구나.´
둘째네 집의 창 안을 넘겨다 본 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그렇게도 걱정하고 계시는 손자가 ´끙끙´ 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는지 아이의 머리맡에는 약병들이 놓여 있습니다.
˝큰일 났어요. 열이 내리지 않아요.˝
아이 엄마가 울상이 되어, 곁에서 아이의 손을 쥐고 안절보절하고 있는 아이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열이 내려야 한다는데....˝
˝시골 어머님이 아시면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요?˝
˝어머니, 어머니, 이 녀석을 지켜주세요.˝
아이의 손에 이마를 부비면서 둘째는 마침내 무릎을 꿇습니다. 늙은 어머니의 걱정스런 얼굴이 머리 속에 가득히 떠오릅니다.
˝날 언제까지 이렇게 가두어 놓기만 할건가요?˝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가 달님의 가슴 속에서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진작부터 달님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만 하도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깜빡 잊어버렸어. 얼른 가 보아라.˝
달님은 주저하지 않고 두번째 기도를 힘껏 쏘았습니다.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는 아이의 몸 속으로 화살처럼 빠르게 스며듭니다.
˝아가, 내 손주야. 나다 할미다. 힘을 내라, 응. 이 할미가 도와줄께.˝
마구 열에 들떠서 아버지의 소리도 어머니의 소리도 못 알아듣던 아이는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은 차립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우릴 방해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아이의 몸 안에서 아이를 괴롭히고 있던 나쁜 병균들이 눈을 부라리며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에 달려듭니다.
˝썩 물러가거라. 고이얀 것들. 이 아이가 누군데, 얼마나 소중한 내 손준데, 이 손이 약손이다. 어디 덤빌려거든 덤벼 봐, 이 못된 것들!˝
병균들은 기겁을 해서 뿔뿔히 달아납니다. 더러는 아이가 내뿜는 코로, 입으로 달아나기도 햇지만 고약한 놈들은 아이의 항문으로도 코를 싸쥐고 달아납니다.
˝아, 열이 내렸어요. 여보, 열이 내렸어요.˝
어머니가 기쁨에 차서 아버지의 어깨를 흔듭니다.
˝응, 열이 내렸다고?˝
아버지의 손이 아이의 이마를 짚자, 아이가 눈을 살며시 뜹니다.
˝...아빠, 할머니는?˝
˝아니, 갑자기 할머니라니....˝
˝얘야, 정신이 드니?˝
˝이상하다. 할머니가 왔었는데....˝
아이는 이상한 듯 두어번 눈을 굴리다가, 곧 편안하게 잠이 듭니다. 병과의 싸움에 무척 지친 모양입니다. 그러나 숨결은 아주 고릅니다. 이제 한숨 푹 자고 나면 병이 깨끗이 나아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 틀림 없습니다.
˝고마운 일이야. 고마운 일이야.˝
달님은 줄곧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시울을 훔치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이젠 여기가 마지막이로구나.˝
이번에 달님이 눈길을 준 곳은 어떤 큰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공사장입니다. 공사장 한 켠에 임시로 지어진 허름한 판자집이 보입니다.그 판자집 바깥에 하 젊은이가 술에 취한 채 혼자 서 있습니다. 아직도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습니다. 할머니의 세째 아들입니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인데 그냥 이렇게 바깥에서 밤을 세울 모양입니다. 문짝에 기대다시피 하고 있으면서도 몸이 건들건들하는 걸 보면 취해도 많이 취한 모양입니다.
˝시시하단 말이야, 시시해. 내가 왜 이따위 일이나 해야 되는냐 이거야....
김기사 이것 해, 김기사 저것 해. 내가 뭐 누구 종놈인가? 쥐뿔도 나보다 나은 게 없는 것들이 과장이면 다야? 소장이면 다냔 말이야? 나를 어떻게 보고 이래, 이래도 학교 다닐 적에는 항상 1등에다가 반장을 도맡아 햇다 이거야. 치워, 때려 치운다고.... 이까짓 일에 내가 평생을 바칠 것 같애?˝
더 듣고 있기가 민망합니다. 달님은 얼른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할머니의 세번째 기도를 젊은이의 마음 속에 쏘아 보냇습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밝아....˝
아마 너무 취한 탓이겠지요. 세째는 할머니의 기도가 닿았는데도 쉽게 마음 속에 집어넣지를 못합니다. 그저 헛소리를 하며 멀뚱하게 달님을 올려다 봅니다. 얼른 달님은 할머니의 모습을 세째에게 비쳐 보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째의 마음 속에 기도가 가 닿은 모양입니다.
˝아,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고마운 우리 엄마, 엄마가 날 보고 있었군요.˝
˝...세째야, 이 녀석아. 왜 또 그렇게 이 늙은 에미 가슴을 쥐어뜯니?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있는 일이냐? 지금 다 세워져 가고 있는 건물을 보렴. 이제 얼마 후면 그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리고 막내야, 세상 일이란 무엇이고 항상 밑에서부터 착실히 쌓아가야 하는 거란다. 단번에 과장님이 되고, 단번에 사장님이 어떻게 되겟니?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란다. 지금 하고 잇는 네 일에 온 정신을 쏟다 보면 언젠가는 네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네가 되고 싶어 하는 무엇이라도 될 수가 있는 거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다른 더 큰 일에도 쓸모가 있는 법이다.
세째야. 이에미는 널 믿는단다. 제발 기운을 내라, 응. 내 아들아.˝
˝...잘못 햇어요, 엄마. 제가 잘못햇어요.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께요.흔들리지 않고, 엄마의 소원대로 내 하는 일에 충실할께요.˝
마침내 세째 아들은 멏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멀리 던집니다. 어디선가 먼 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님은 홀가분하 마음으로 그것을 떠났습니다. 시골 할머니네 담장 안을 다시 기웃거려 봅니다. 이미 집채에 가려서 담장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쯤은 할머니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 꿈 속에서 세 아들들을 만나고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새 동쪽 산등성이가 부윰해집니다. 이제 곧 아침이 올 모양입니다. 달밤보다 더 밝고 환한 아침이 말입니다. <*>
˝엇, 추워!˝
달님은 움찔 한번 진저리를 치고는 ´끙´ 힘을 줍니다. 몸 속의 열을 높이는 것입니다. 달빛이 좀 더 환해집니다. 늦게까지 깨어서 보채던 바람도 그제서야 슬그머니 잠이 듭니다.
˝진작 그럴 일이지.... 가만 있거라, 오늘은 어딜 구경할까?˝
달님은 그 큰 눈을 들고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춰 봅니다. 푸른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며, 대도시의 고층 건물과 쏟아지는 불빛들, 깊은 산 속의 울창한 숲이며, 골짜기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 맑은 개울물.
˝아니, 저게 뭘까?˝
무심하게 이곳 저곳을 훑어 가던 달님의 눈길이 어느 시골집 담장 안에서 딱 멈췄습니다. 긴 흙담벽의 그림자에 가리긴 했지만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이 비친 것입니다.
늦가을 시골의 밤은 이르기 마련입니다. 일찌감치 저녁들을 해 먹고, 8시나 9시 경이면 대부분의 집에서는 불이 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입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진 달님은 몸을 쓱 움직여 그쪽으로 다가갑니다. 이윽고 담그늘에 가렸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옳아. 또 그 할머니였군.˝
담장 밑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두 손을 꼭 붙이고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할머니 앞에는 조그마한 상 하나가 놓였고, 그 위에는 가늘게 팔락이는 촛불과 함께 맑은 물이 가득 담긴 놋그릇이 얹혔습니다.
달님에게는 이 할머니가 낯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에 없지만, 한 해에 두어번씩은 꼭 이런 모습의 할머니를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달님은 고개를 갸웃이 젖히고 물그릇 안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면 그렇지.˝
물그릇 속에 세사람의 얼굴이 은은하게 나타나 보인 것입니다. 바로 할머니의 아들들입니다. 모두들 반듯하게 잘 생긴 얼굴입니다.
˝...오늘 밤엔 또 할머니 심부름을 해야겠군.˝
그러나 조금도 싫은 마음은 없습니다. 싫은 마음은 커녕 오히려 신명이 납니다. 어쩌다가 밤손님(?)들의 길이나 비춰주고, 술주정꾼들의 노리개가 되는데 비하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이 할머니에게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주 출세를 해서 어느 지방 법원의 판사님입니다. 둘째 아들도 역시 큰 회사의 부장님입니다. 세째 아들은 어떤 건설 회사의 건축 기사입니다.
아들들이 출세는 했지만, 모두 불효자인 모양이라구요? 천만에요. 오히려 그 반대랍니다. 아들들은 객지에 나가 살면서도 늘 할머니 뜻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착한 효자들이랍니다. 아하, 그렇게들 잘 되어 있으면서 왜 어머니를 모셔가지 않고 이렇게 혼자 살게 하느냐 하는 말씀이군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 집은 바로 할머니가 처음 시집와서 살던 집이거든요. 그리고 할머니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존경하던 할아버니가 살다가 돌아가신 집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언젠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집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할머니는 이 집을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은 몇 번이나 어머니를 모셔가려 햇지만 할머니가 한사코 거절하셨지요. 아들들도 결국은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매달 생활비나마 넉넉하게 보내고 틈만 나면 자주 찾아뵙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수 밖에요.
´어디 할머니 마음 속에 들어가 볼까?´
달님은 수많은 빛살 가운데서, 가장 날쌔고 영리한 빛을 몇 줄기 할머니 마음 속으로 쏘아 보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내 큰 아들 녀석에게 한없이 착하고 어진 마음을 심어 주소서. 이 늙은이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제발 덕분 달님 전에 비나이다....˝
할머니 마음 속으로 달려갔던 날쌘 빛줄기 중 하나가 제일 먼저 이런 기도를 간직하고 달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둘째 녀석의 하나뿐인 손주가 병약해서 걱정입니다. 제발 덕분 손주놈 건강하게 해 주옵소서....˝
두번째의 빛살은 이런 기도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세번째의 빛살도 돌아왔습니다. 성질 급하고 불평 많은 세째 아들이 마음 잡고 직장에 충실히 다니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글쎄,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디 그럼 큰 아들네부터 슬슬 찾아가 볼까?´
달님은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들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슬쩍 얼굴을 돌렸습니다.
금세 도회지 큰 아들네 2층 양옥집이 드러납니다.
큰 아들은 늦게까지 자리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지만 잔뜩 찡그린 이마가 달빛에 비칩니다. 내일 있을 재판의 판결을 생각합니다. 밤중에 자기 회사 사장집에 뛰어 들어가 금고를 털다가, 잠이 깬 사장을 찌르고 달아나다가 체포된 어느 가난한 직공에 대한 재판입니다.
˝괘씸한 놈, 큰 벌을 받아야 돼. 잘 사는 게 부러우면 저도 힘껏 노력해서 잘 살도록 해야지,
어디 강도질을 해. 그것도 자기가 모시고 있던 사장 집이 아닌가... 다행히 칼이 빗나갔기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나. 그 사장 덕분에 그래도 지금까지 온 가족들이 먹고 살았을 게 아닌가 말이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라도 이런 놈은 중벌을 내려야만 해.˝
큰 아들은 ´끙´ 신음 소리를 내면서 돌아눕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달님은 소중하게 가슴 속에 담고 있던 어머니의 첫번째 기도를 소리없이 큰 아들의 마음 속에 쏘아 보냈습니다.
´아, 어머니!´
아들은 갑지기 가슴 속에 살아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얘야, 큰애야. 이 세상에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란 없단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웟으면 그런 죄를 저질렀겠니? 훌룽한 재판관은 약한 사람의 편에 서는 거란다. 너도 배우지 못하고, 어긋난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니?˝
˝그렇지만 어머니. 그놈은 흉악범이에요....˝
˝글쎄다. 나는 법은 잘 모른다만,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된다고 알고 있단다. 너는 항상 사람을 죽이는 법관보다는 살리는 법관이 되겠다고 에미에게 말하지 않았니? 그 불쌍한 직공의 가족들을 생각해 보렴....˝
˝...어머니,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다시 한번 옳은 길로 들어서도록 기회를 주겠어요.˝
아들의 찌푸려졋던 얼굴이 환히 펴집니다. 편안하게 눕더니 금방 잠이 듭니다. 조금도 그늘이 없는 밝은 표정입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님은 흡족한 마음으로 거기를 떠났습니다. 곧 다른 도시에 있는 둘째아들네 집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아니, 저런. 큰일 났구나.´
둘째네 집의 창 안을 넘겨다 본 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그렇게도 걱정하고 계시는 손자가 ´끙끙´ 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는지 아이의 머리맡에는 약병들이 놓여 있습니다.
˝큰일 났어요. 열이 내리지 않아요.˝
아이 엄마가 울상이 되어, 곁에서 아이의 손을 쥐고 안절보절하고 있는 아이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열이 내려야 한다는데....˝
˝시골 어머님이 아시면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요?˝
˝어머니, 어머니, 이 녀석을 지켜주세요.˝
아이의 손에 이마를 부비면서 둘째는 마침내 무릎을 꿇습니다. 늙은 어머니의 걱정스런 얼굴이 머리 속에 가득히 떠오릅니다.
˝날 언제까지 이렇게 가두어 놓기만 할건가요?˝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가 달님의 가슴 속에서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진작부터 달님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만 하도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깜빡 잊어버렸어. 얼른 가 보아라.˝
달님은 주저하지 않고 두번째 기도를 힘껏 쏘았습니다.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는 아이의 몸 속으로 화살처럼 빠르게 스며듭니다.
˝아가, 내 손주야. 나다 할미다. 힘을 내라, 응. 이 할미가 도와줄께.˝
마구 열에 들떠서 아버지의 소리도 어머니의 소리도 못 알아듣던 아이는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은 차립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우릴 방해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아이의 몸 안에서 아이를 괴롭히고 있던 나쁜 병균들이 눈을 부라리며 할머니의 두번째 기도에 달려듭니다.
˝썩 물러가거라. 고이얀 것들. 이 아이가 누군데, 얼마나 소중한 내 손준데, 이 손이 약손이다. 어디 덤빌려거든 덤벼 봐, 이 못된 것들!˝
병균들은 기겁을 해서 뿔뿔히 달아납니다. 더러는 아이가 내뿜는 코로, 입으로 달아나기도 햇지만 고약한 놈들은 아이의 항문으로도 코를 싸쥐고 달아납니다.
˝아, 열이 내렸어요. 여보, 열이 내렸어요.˝
어머니가 기쁨에 차서 아버지의 어깨를 흔듭니다.
˝응, 열이 내렸다고?˝
아버지의 손이 아이의 이마를 짚자, 아이가 눈을 살며시 뜹니다.
˝...아빠, 할머니는?˝
˝아니, 갑자기 할머니라니....˝
˝얘야, 정신이 드니?˝
˝이상하다. 할머니가 왔었는데....˝
아이는 이상한 듯 두어번 눈을 굴리다가, 곧 편안하게 잠이 듭니다. 병과의 싸움에 무척 지친 모양입니다. 그러나 숨결은 아주 고릅니다. 이제 한숨 푹 자고 나면 병이 깨끗이 나아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 틀림 없습니다.
˝고마운 일이야. 고마운 일이야.˝
달님은 줄곧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시울을 훔치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이젠 여기가 마지막이로구나.˝
이번에 달님이 눈길을 준 곳은 어떤 큰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공사장입니다. 공사장 한 켠에 임시로 지어진 허름한 판자집이 보입니다.그 판자집 바깥에 하 젊은이가 술에 취한 채 혼자 서 있습니다. 아직도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습니다. 할머니의 세째 아들입니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인데 그냥 이렇게 바깥에서 밤을 세울 모양입니다. 문짝에 기대다시피 하고 있으면서도 몸이 건들건들하는 걸 보면 취해도 많이 취한 모양입니다.
˝시시하단 말이야, 시시해. 내가 왜 이따위 일이나 해야 되는냐 이거야....
김기사 이것 해, 김기사 저것 해. 내가 뭐 누구 종놈인가? 쥐뿔도 나보다 나은 게 없는 것들이 과장이면 다야? 소장이면 다냔 말이야? 나를 어떻게 보고 이래, 이래도 학교 다닐 적에는 항상 1등에다가 반장을 도맡아 햇다 이거야. 치워, 때려 치운다고.... 이까짓 일에 내가 평생을 바칠 것 같애?˝
더 듣고 있기가 민망합니다. 달님은 얼른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할머니의 세번째 기도를 젊은이의 마음 속에 쏘아 보냇습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밝아....˝
아마 너무 취한 탓이겠지요. 세째는 할머니의 기도가 닿았는데도 쉽게 마음 속에 집어넣지를 못합니다. 그저 헛소리를 하며 멀뚱하게 달님을 올려다 봅니다. 얼른 달님은 할머니의 모습을 세째에게 비쳐 보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째의 마음 속에 기도가 가 닿은 모양입니다.
˝아,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고마운 우리 엄마, 엄마가 날 보고 있었군요.˝
˝...세째야, 이 녀석아. 왜 또 그렇게 이 늙은 에미 가슴을 쥐어뜯니?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있는 일이냐? 지금 다 세워져 가고 있는 건물을 보렴. 이제 얼마 후면 그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리고 막내야, 세상 일이란 무엇이고 항상 밑에서부터 착실히 쌓아가야 하는 거란다. 단번에 과장님이 되고, 단번에 사장님이 어떻게 되겟니?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란다. 지금 하고 잇는 네 일에 온 정신을 쏟다 보면 언젠가는 네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네가 되고 싶어 하는 무엇이라도 될 수가 있는 거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다른 더 큰 일에도 쓸모가 있는 법이다.
세째야. 이에미는 널 믿는단다. 제발 기운을 내라, 응. 내 아들아.˝
˝...잘못 햇어요, 엄마. 제가 잘못햇어요.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께요.흔들리지 않고, 엄마의 소원대로 내 하는 일에 충실할께요.˝
마침내 세째 아들은 멏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멀리 던집니다. 어디선가 먼 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님은 홀가분하 마음으로 그것을 떠났습니다. 시골 할머니네 담장 안을 다시 기웃거려 봅니다. 이미 집채에 가려서 담장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쯤은 할머니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 꿈 속에서 세 아들들을 만나고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새 동쪽 산등성이가 부윰해집니다. 이제 곧 아침이 올 모양입니다. 달밤보다 더 밝고 환한 아침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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