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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뿌리를 내린 들꽃처럼 한자리에 붙박혀 있었습니다.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는 혼자 쓸쓸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허수아비는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한숨쉬는 소리에 휘파람 소리가 딸려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버들피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허수아비는 쓸쓸한 마음이 들어 언젠가 주인집 아들인 수봉이가 불던 버들피리 소리를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삘릴리-삘릴리-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 별들에게로 날아가 닿았습니다.
별들도 저들끼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쓸쓸한지 허수아비를 따라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오늘처럼 별빛이 흔들리는 날이면 영락없이 큰바람이 불어온다니까.˝
허수아비가 옷깃을 여미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어이, 추워.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겨울을 나야 하다니…´
허수아비는 눈보라칠 겨울이 걱정되었습니다.
지난 겨울만 해도 허수아비는 헛간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생쥐가 밀짚모자를 쏠아서 구멍이 나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생쥐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미 쥐가 아기 쥐를 낳을 때, 밀짚모자를 요람으로 빌려 썼기 때문에 쥐생원 부부는 허수아비를 퍽 고맙게 여겼습니다.
´아마 지금쯤 아기 생쥐들도 꽤 컸을거야.´
벼이삭이 팰 무렵 주인 어르신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허수아비는 추수가 다 끝나도록 벌판에 그대로 남겨진 것이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지금도 제 몸을 손수 만들어 주신 주인 어르신네의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 어르신네는 마치 허수아비가 아들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들여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르신네가 입던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 허수아비는 노들리에서 가장 멋쟁이 허수아비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참새들도 깜빡 주인 어르신네인 줄 알고 속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주인 어르신네의 상여가 허수아비 곁을 지날 때, 허수아비는 그만 털썩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구름처럼 흰 깃발이 고샅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수아비는 손지붕을 하고 북망길에 오른 주인 어르신네를 지켜보았습니다.
에헤이 에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이 어허
누굴 마다고 가시는가
어허이 어허
인생 한 번 죽어지면
움이 날까 싹이 틀까
한 번 가면 영절이라
백설이 흩날리면
그때 한 번 올려는가
에헤에 에헤
상여꾼들의 상여 소리가 산모롱이를 돌아갔습니다.
눈보라가 치던 그 해 겨울 주인 마나님은 어린 아들 수봉이를 데리고 눈길을 밟으며 먼길을 떠났습니다.
수봉이는 허수아비의 모자가 바람에 벗겨지면 다시 씌워 주곤 하던 그 손을 흔들며 그렇게 떠났습니다.
흰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가는 수봉이를 보자 허수아비는 주인 어르신네의 상여가 나가던 날, 바람에 펄렁이던 깃발을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허수아비는 두 팔을 벌리고 수봉이가 가는 길을 막아서고 싶었습니다.
눈송이가 송이송이 녹아 허수아비의 눈에 그렁그렁 매달렸습니다.
울며 잠이 들다 이튿날 잠을 깨어 보니 아침 햇살에 수봉이의 발자국이 살며시 녹아 없어졌습니다.
´꿈이었을까?´
노들이에서 더 이상 수봉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허수아비는 주인 어르신네의 아들이 떠난 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허수아비는 겨울 들판에 두 팔을 벌리고 홀로 버티어 서서 온 몸으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마치 노들리의 바람을 두 팔 벌려 혼자 온 몸으로 막아서듯이.
겨우내 동상이 걸린 듯 발 밑이 간지럽더니 발바닥에 실뿌리가 돋아난 듯 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놀랍게도 허수아비의 팔에 파릇파릇 새잎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연초록 잎새가 옷소매 끝으로 삐져 나왔습니다.
˝이게 뭐야?˝ 내 손끝에서 잎이 돋아나잖아?˝
허수아비는 손바닥을 펴듯이 잎새를 한 번 쫙 펴 보았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아이처럼 잎새가 퍼졌습니다. 게다가 햇살에 비춰 보니 손금처럼 잎새에 실금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허수아비는 너무 기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머리가 하늘까지 닿도록 뛰어 보고 싶었지만 발 밑에 뿌리가 돋아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허수아비의 눈물은 실개천의 나무들처럼 쑥쑥 키를 크게했습니다.
˝저런! 키다리 허수아비 좀 봐. 소매 끝에서 잎이 돋아나고 있잖아?˝
˝그러게. 주인도 없는 논을 겨우내 지키고 섰더니 잎이 돋아나네.˝
˝봄에는 부지깽이도 거꾸로 꽂으면 싹이 튼다지만 허수아비 팔뚝에 잎이 돋아나는 건 처음 보는 걸. 아무래도 우리 노들리에 좋은 일이 생길 징조가 틀림없어.˝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데도 말인가?˝
˝그래서 아마 키다리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리고 막아 서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일하던 농부들이 점점 키가 자라는 바람에 옹이 배꼽이 다 드러난 허수아비를 보면서 쑥덕거렸습니다.
지나가던 참새 떼들이 조잘대며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어머머, 얘들아! 저 허수아비 좀 봐. 창피한 줄 도 모르고 옹이 배꼽을 다 드러내고 있잖아?˝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니? 옷소매 끝에서 잎이 돋아나다니…˝
˝구멍 난 밀짚모자에서 삐져 나온 잎새 좀 봐. 꼭 도깨비 뿔처럼 돋아나 꼴불견이라니까.˝
장난꾸러기 참새들이 허수아비의 옹이 배꼽을 콕콕 쪼아댔습니다.
그럴 때마다 허수아비는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점점 키가 컸습니다.
두 팔 끝에 물이 올라 새 가지가 뻗고 새잎이 돋아나 바람이 불 때마다 잎새 손을 흔드는 듯 했습니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버드나무였습니다.
해가 바뀌자 허수아비는 어엿한 한 그루 나무로 논두렁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버드나무는 허수아비 시절 밀짚모자가 벗겨지면 씌워 주곤 하던 주인집 아들 수봉이를 잊지 못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허수아비는, 아니 어엿한 한 그루 버드나무는 행여 수봉이가 제 발자국을 되짚어 밟고 오지 않을까 고개를 내밀고 동구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참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지. 지금쯤 수봉이도 어른이 되었을 게야. 우물집 경묵이처럼 장가를 들어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둘이는 깨벗게 친구였으니까.˝
버드나무는 옛 생각에 잠겼습니다.
˝수봉이가 내 발등에 쉬를 했을 때, 처음에는 화가 났었지. 하지만 수봉이가 내 꽁꽁 언 발을 녹여 준 걸 깨달았을 때 마음이 참 따뜻했었지.˝
훠어이 훠어이 새를 쫓던 허수아비의 팔뚝에는 아기 참새들이 지즐대며 조롱조롱 앉아 쉬어갔습니다.
물 오른 푸른 나무 그늘 밑에서는 농부들이 일손을 놓고 새참을 먹으면서 쉬어갔습니다.
명주실처럼 고운 봄비가 휘영청 늘어진 긴 머리를 감겨주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어느 새 비가 그치고 청보리밭을 질러온 바람이 사알랑 불어와 버드나무의 젖은 머리를 빗겨 주었습니다.
저 멀리 동구 밖에서 두 사람이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노들리 개울가에 놓인 징검돌처럼 낯익은 모습이었습니다.
˝저기 저 버드나무가 서 있는 곳부터 우리 논이었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논두렁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이 한참 흘렀구나.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났을 때가 꼭 너만했을 때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 버드나무는 못 보던 나무로구나. 그땐 저 버드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허수아비가 서 있었지. 그 허수아비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곤 했었는데…˝
아버지는 나중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는 농부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노들리에 큰 가뭄 없이 풍년이 드는 건 바로 이 나무 덕이지 뭔가.˝
˝그러게 말일세. 이 나무가 허수아비일 적 옷소매에 처음 잎이 돋아났을 때 마을 사람들을 얼마나 놀래켰었나. 그때가 엊그제 같더니……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황토 빛 이마에 밭고랑처럼 주름이 깊게 패인 농부들이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쉬어갔습니다.
˝이 나무가 바로 허수아비였다니…˝
아버지는 나무 기둥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허수아비의 옛 모습을 찾아보려고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들에게 버들피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삘릴리-삘릴릴리-
그 소리는 버드나무가 오랜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휘파람 소리였습니다.
˝아아, 내 몸 속에 휘파람 소리가 숨어 있었구니!˝
버드나무는 허수아비 시절 옷소매에서 푸른 잎새가 삐져 나올 때처럼 너무 기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는 혼자 쓸쓸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허수아비는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한숨쉬는 소리에 휘파람 소리가 딸려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버들피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허수아비는 쓸쓸한 마음이 들어 언젠가 주인집 아들인 수봉이가 불던 버들피리 소리를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삘릴리-삘릴리-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 별들에게로 날아가 닿았습니다.
별들도 저들끼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쓸쓸한지 허수아비를 따라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오늘처럼 별빛이 흔들리는 날이면 영락없이 큰바람이 불어온다니까.˝
허수아비가 옷깃을 여미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어이, 추워.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겨울을 나야 하다니…´
허수아비는 눈보라칠 겨울이 걱정되었습니다.
지난 겨울만 해도 허수아비는 헛간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생쥐가 밀짚모자를 쏠아서 구멍이 나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생쥐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미 쥐가 아기 쥐를 낳을 때, 밀짚모자를 요람으로 빌려 썼기 때문에 쥐생원 부부는 허수아비를 퍽 고맙게 여겼습니다.
´아마 지금쯤 아기 생쥐들도 꽤 컸을거야.´
벼이삭이 팰 무렵 주인 어르신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허수아비는 추수가 다 끝나도록 벌판에 그대로 남겨진 것이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지금도 제 몸을 손수 만들어 주신 주인 어르신네의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 어르신네는 마치 허수아비가 아들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들여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르신네가 입던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 허수아비는 노들리에서 가장 멋쟁이 허수아비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참새들도 깜빡 주인 어르신네인 줄 알고 속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주인 어르신네의 상여가 허수아비 곁을 지날 때, 허수아비는 그만 털썩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구름처럼 흰 깃발이 고샅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수아비는 손지붕을 하고 북망길에 오른 주인 어르신네를 지켜보았습니다.
에헤이 에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이 어허
누굴 마다고 가시는가
어허이 어허
인생 한 번 죽어지면
움이 날까 싹이 틀까
한 번 가면 영절이라
백설이 흩날리면
그때 한 번 올려는가
에헤에 에헤
상여꾼들의 상여 소리가 산모롱이를 돌아갔습니다.
눈보라가 치던 그 해 겨울 주인 마나님은 어린 아들 수봉이를 데리고 눈길을 밟으며 먼길을 떠났습니다.
수봉이는 허수아비의 모자가 바람에 벗겨지면 다시 씌워 주곤 하던 그 손을 흔들며 그렇게 떠났습니다.
흰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가는 수봉이를 보자 허수아비는 주인 어르신네의 상여가 나가던 날, 바람에 펄렁이던 깃발을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허수아비는 두 팔을 벌리고 수봉이가 가는 길을 막아서고 싶었습니다.
눈송이가 송이송이 녹아 허수아비의 눈에 그렁그렁 매달렸습니다.
울며 잠이 들다 이튿날 잠을 깨어 보니 아침 햇살에 수봉이의 발자국이 살며시 녹아 없어졌습니다.
´꿈이었을까?´
노들이에서 더 이상 수봉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허수아비는 주인 어르신네의 아들이 떠난 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허수아비는 겨울 들판에 두 팔을 벌리고 홀로 버티어 서서 온 몸으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마치 노들리의 바람을 두 팔 벌려 혼자 온 몸으로 막아서듯이.
겨우내 동상이 걸린 듯 발 밑이 간지럽더니 발바닥에 실뿌리가 돋아난 듯 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놀랍게도 허수아비의 팔에 파릇파릇 새잎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연초록 잎새가 옷소매 끝으로 삐져 나왔습니다.
˝이게 뭐야?˝ 내 손끝에서 잎이 돋아나잖아?˝
허수아비는 손바닥을 펴듯이 잎새를 한 번 쫙 펴 보았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아이처럼 잎새가 퍼졌습니다. 게다가 햇살에 비춰 보니 손금처럼 잎새에 실금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허수아비는 너무 기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머리가 하늘까지 닿도록 뛰어 보고 싶었지만 발 밑에 뿌리가 돋아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허수아비의 눈물은 실개천의 나무들처럼 쑥쑥 키를 크게했습니다.
˝저런! 키다리 허수아비 좀 봐. 소매 끝에서 잎이 돋아나고 있잖아?˝
˝그러게. 주인도 없는 논을 겨우내 지키고 섰더니 잎이 돋아나네.˝
˝봄에는 부지깽이도 거꾸로 꽂으면 싹이 튼다지만 허수아비 팔뚝에 잎이 돋아나는 건 처음 보는 걸. 아무래도 우리 노들리에 좋은 일이 생길 징조가 틀림없어.˝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데도 말인가?˝
˝그래서 아마 키다리 허수아비가 두 팔을 벌리고 막아 서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일하던 농부들이 점점 키가 자라는 바람에 옹이 배꼽이 다 드러난 허수아비를 보면서 쑥덕거렸습니다.
지나가던 참새 떼들이 조잘대며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어머머, 얘들아! 저 허수아비 좀 봐. 창피한 줄 도 모르고 옹이 배꼽을 다 드러내고 있잖아?˝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니? 옷소매 끝에서 잎이 돋아나다니…˝
˝구멍 난 밀짚모자에서 삐져 나온 잎새 좀 봐. 꼭 도깨비 뿔처럼 돋아나 꼴불견이라니까.˝
장난꾸러기 참새들이 허수아비의 옹이 배꼽을 콕콕 쪼아댔습니다.
그럴 때마다 허수아비는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점점 키가 컸습니다.
두 팔 끝에 물이 올라 새 가지가 뻗고 새잎이 돋아나 바람이 불 때마다 잎새 손을 흔드는 듯 했습니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버드나무였습니다.
해가 바뀌자 허수아비는 어엿한 한 그루 나무로 논두렁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버드나무는 허수아비 시절 밀짚모자가 벗겨지면 씌워 주곤 하던 주인집 아들 수봉이를 잊지 못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허수아비는, 아니 어엿한 한 그루 버드나무는 행여 수봉이가 제 발자국을 되짚어 밟고 오지 않을까 고개를 내밀고 동구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참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지. 지금쯤 수봉이도 어른이 되었을 게야. 우물집 경묵이처럼 장가를 들어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둘이는 깨벗게 친구였으니까.˝
버드나무는 옛 생각에 잠겼습니다.
˝수봉이가 내 발등에 쉬를 했을 때, 처음에는 화가 났었지. 하지만 수봉이가 내 꽁꽁 언 발을 녹여 준 걸 깨달았을 때 마음이 참 따뜻했었지.˝
훠어이 훠어이 새를 쫓던 허수아비의 팔뚝에는 아기 참새들이 지즐대며 조롱조롱 앉아 쉬어갔습니다.
물 오른 푸른 나무 그늘 밑에서는 농부들이 일손을 놓고 새참을 먹으면서 쉬어갔습니다.
명주실처럼 고운 봄비가 휘영청 늘어진 긴 머리를 감겨주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어느 새 비가 그치고 청보리밭을 질러온 바람이 사알랑 불어와 버드나무의 젖은 머리를 빗겨 주었습니다.
저 멀리 동구 밖에서 두 사람이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노들리 개울가에 놓인 징검돌처럼 낯익은 모습이었습니다.
˝저기 저 버드나무가 서 있는 곳부터 우리 논이었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논두렁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이 한참 흘렀구나.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났을 때가 꼭 너만했을 때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 버드나무는 못 보던 나무로구나. 그땐 저 버드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허수아비가 서 있었지. 그 허수아비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곤 했었는데…˝
아버지는 나중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는 농부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노들리에 큰 가뭄 없이 풍년이 드는 건 바로 이 나무 덕이지 뭔가.˝
˝그러게 말일세. 이 나무가 허수아비일 적 옷소매에 처음 잎이 돋아났을 때 마을 사람들을 얼마나 놀래켰었나. 그때가 엊그제 같더니……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황토 빛 이마에 밭고랑처럼 주름이 깊게 패인 농부들이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쉬어갔습니다.
˝이 나무가 바로 허수아비였다니…˝
아버지는 나무 기둥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허수아비의 옛 모습을 찾아보려고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들에게 버들피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삘릴리-삘릴릴리-
그 소리는 버드나무가 오랜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휘파람 소리였습니다.
˝아아, 내 몸 속에 휘파람 소리가 숨어 있었구니!˝
버드나무는 허수아비 시절 옷소매에서 푸른 잎새가 삐져 나올 때처럼 너무 기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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