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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조선일보] 달 우물역 철마가 간다 -

신춘문예 이희곤............... 조회 수 1502 추천 수 0 2005.02.28 23: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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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화

달우물역입니다.

승강장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철마가 으스스 몸을 떱니다. 섣달 매운바람이 철마의 온몸에 자꾸 몰아칩니다. 철마는 다 삭아 널브러진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군데군데 구멍 숭숭 뚫리고 녹슬어, 처참합니다.

철마가 쌩쌩 거침없이 달리던 철길엔 높이 쌓은 담이 턱 가로막고 있습니다. 담장 위엔 가시철조망이 촘촘히 쳐지고, 총을 든 군인들이 망을 보고있습니다.

철길 옆에 우뚝 서있는 그림판을 철마는 올려다봅니다. 흰 연기를 하늘로 흩날리며 기세 좋게 달리는 옛날의 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서울 104 KM. 원산 123 KM. 평강 19 KM. 금강산 70 KM 라 쓰여져 있습니다. 철마는 그 숫자들을 가만히 봅니다.
´뿌-우-욱´
우렁차게 내지르던 기적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털커덩철커덕´
철로를 달리던 바퀴소리도 아스라이 울려옵니다. 철마는 옆에 있는 기찻길을 내려다봅니다. 겨우 조금 남은 철길엔 녹이 잔뜩 쓸어있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철길을 이불처럼 덮고 있습니다. 철마는 다시 신나게 달리는 그림 속의 제 모습을 봅니다. 꼭 꿈속 일 같기만 합니다.

˝하나-앗, 두-울. 필승! 하-나-앗, 두-우-울. 필-승!˝
갈대밭 너머에서 들려오는 군인들 훈련받는 소리가 철마의 몸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언덕에 있는 필승교회의 종탑에서 댕그덩 댕그덩 종이 울립니다. 철마는 종소리를 듣습니다.
이 곳, 달우물역에서 폭격에 맞아 쓰러진 후, 지금까지 꼼짝 못하고 누워있습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흘렀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쏟아졌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날, 햇살이 쨍 내리쬐는 날도 있었습니다.

˝할머니, 오늘도 오셨네. 이 추운 날에. 어휴, 어지간하셔!˝
보초 선 군인의 말에 철마는 담장 옆에 있는 초소 쪽을 봅니다. 할머니가 허우적허우적 철마에게로 오고있습니다. 왼쪽에는 군인, 오른쪽엔 새한이가 할머니를 곁부축했습니다. 밤새 허리가 더 꼬부라지고, 머리는 더욱 새하얘진 것 같습니다.
˝내가 또 왔네. 잘 있었는가?˝
할머니가 마른 덤불 내려앉듯 철마 앞에 주저앉습니다. 눈에 띄게 쇠잔해지는 할머니 모습을 보자, 철마는 뾰족한 망치 코로 콩콩 두들겨 맞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립니다. 할머니의 무너지듯 앉은 모습이, 철마처럼 몸이 다 삭아 널브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할머니의 가슴도 철마의 몸처럼 구멍이 숭숭 뚫리고, 녹슬어 있을 거라고 철마는 생각합니다.
˝요즘, 부쩍 작은애 생각이 더 사무쳐. 죽을 때가 된 모양이야.˝
할머니는 철마를 살붙이 보듯 애틋하게 바라봅니다. 철마의 등을 살뜰히 쓰다듬습니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끝이 꼭 갈퀴처럼 철마의 마음을 할큅니다.
˝내 이렇게 맘에 밟힐 줄 알았으먼.....˝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며 갈대밭을 봅니다. 바람에 떨어져나간 철마의 몸 조각 하나가 풀숲에 쳐박혀 있습니다.
˝새한아, 저 저거......, 아니다. 내가, 내가 주워 와야지.˝
갈대밭을 가리키던 할머니가 일어나려고 끄응 힘을 줍니다.
˝왕할머니, 제가 가져올게요.˝
새한이가 잽싸게 달려가 종이처럼 얇아진 철마의 몸 조각을 가져왔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을 구멍난 철마의 몸에 끼워줍니다. 그 손길에, 서방님 저고리를 바느질하는 새악시처럼 정성이 담뿍 묻어납니다.
˝자네가 어여 일어나야지.˝
한참을 매만지던 할머니는 속바지에서 가운데 손가락 만한 플라스틱 물병을 꺼내어, 철마의 몸에 한 방울 한 방울 뿌립니다.
˝할머니, 오늘도 달우물에 갔었어요?˝
˝그럼, 가고말고.˝
˝에이, 왕할머니도 참. 아빠가 병나신다고 그렇게 말리는데도 매일 가요?˝
˝........ 새한이 너, 우리 마을 이름이 왜 달우물인지 아냐? 달님이 만들어 논 예쁜 우물이 있기 때문이란다.˝
할머니는 증손자를 가까이 오라 손짓합니다.
˝옛날 옛날에, 중병을 앓고 있는 홀아버지를 지극 정성 보살피던 처녀가 있었더란다. 달님한테 날마다 빌었지. 아버지 병을 낫게 해 주십사 하고.˝
새한이의 머리를 할머니는 가만가만 쓸어줍니다.
˝어느날, 달님의 화신이 나타나서 ´집 옆의 바위에 가면 물이 고여있을 거다. 날 새기 전까지 네 손에 물을 담아서 천 모금을 아버지께 먹여드려라´ 그랬단다.˝
˝손으로 떠서 천 모금이나요?˝
˝그래, 처녀가 어떻게 했겄냐?˝
˝한 두 모금이라면 몰라. 당연히 못 했을 거야.˝
˝예끼, 이 녀석. 물을 모아 담느라 바위에 긁혀 손에 피가 맺히는데도 처녀는 해냈다. 아버지 병은 나았지. 하늘에 처녀의 마음이 닿았던 게야. 달님도 감동했나 보다.˝
˝달님이 감동하면 그런 일이 생겨요?˝
˝아무렴. 달우물이 여태 있는 걸.˝
˝그럼, 우리도 저 사람들 감동시키면 마음이 서로 닿을 수 있겠네?˝
새한이가 철조망 너머를 손짓합니다. 할머니의 두 눈도 새한이의 손길을 따라갑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달우물의 물을 떠와서 철마의 몸에 고루고루 뿌려줍니다.
˝어여 일어나게나, 어여.˝
하면서. 그리곤 철길로 내려섭니다. 기역자로 꺾여진 허리를 툭툭 치면서 철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딛습니다. 할머니의 걸음으로도 몇 발작 걷지 않아 기찻길은 막혀버립니다. 할머니는 힘겹게 허리를 펴며,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높은 담장과, 뱅글뱅글 둘러쳐진 철조망을 하염없이 올려다봅니다. 그 모습은 할머니는 없고, 꼭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철마에겐 느껴집니다.
˝작은 애가 백설기 먹고 싶대는 걸 웬 호사스런 떡타령이냐, 혼찌검을 냈더니만....., 외갓집 다녀오면 해 주마고...... 아이고, 맘에 밟혀 이 일을 어쩔거나.˝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는 할머니의 눈이 벌겋게 물듭니다. 그걸 보는 철마의 가슴에도 붉은 녹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습니다.

철마는 기관사 아저씨와 아저씨의 하나뿐인 동생을 생각합니다. 철마를 몰던 기관사 아저씨는 할머니의 큰아들입니다. 아저씨는 철마를 끔찍이도 아껴주었습니다. 골안개 자오록한 날, 아저씨는 아우를 철마에 태워, 외갓집이 있는 달우물역 다음 정거장인 가곡역에 내려주었지요. 친정 어머니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약을 지어 작은아들 편에 보낸 겁니다. 그런데 한 몸이던 땅이 두 동강나고, 철길은 막혀버렸습니다. 아우는 영영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철마에게 와서
˝멀쩡히 서서 왜 꼼짝 않는 게야. 한 정거장만 가면 될 것을˝
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아저씨와 철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나고, 철마와 함께 있었던 아저씨는 철마가 폭격을 맞을 때, 돌아가셨지요. 그때부터 할머니는 철마에게 달우물 물을 떠오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이제 그만 가세요.˝
새한이가 할머니 어깨를 살며시 잡습니다.
˝저-쪽엔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대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구먼.˝
할머니가 꼬부랑 허리를 펴며 다시 가시철조망 너머 하늘을 봅니다.
˝새한이 너, 배곯은 적 없었지?˝
할머니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이 하르르 떨립니다. 그것을 보며 새한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철마는 보았습니다.
˝설움 중에서도 배고픈 설움이 첫찐데.... 어이구나, 가여워서 어쩐다냐.˝
할머니의 허리가 다시 폭삭 내려앉습니다. 밭고랑처럼 패여진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집니다.
˝설도 며칠 안 남았는데......, 내가 인제.... 얼마나 더 살겄냐. 흐-유-우.˝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듯, 할머니 몸이 꼭 허깨비 같습니다. 철마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그림판만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그날 밤부터, 달님을 올려다보며 동 터 올 때까지, 하늘에 마음이 닿으면, 하늘에 마음이 닿으면. 철마는 늘 되뇌었습니다.

오늘은 섣달 그믐. 까치설날입니다. 어스름이 내립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던 할머니가 며칠째 오지 않습니다. 철마는 갈대 스치는 소리에도 행여 할머니 발자국 소리인가 마음을 졸입니다.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닐 테지.´
혼잣말하던 철마의 가슴이 쿵 내 려앉습니다. 방정맞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어, 할머니 오랜만에 뵙네요. 근데 다 저녁 때 오셨네.˝
보초 선 군인의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에 철마의 몸이 꿈틀합니다. 걱정하던 할머니가 초소 앞에 있습니다. 할머니의 눈이 뀅합니다. 허리는 땅에 닿을 듯, 더 꼬부라졌구요. 부축하는 새한이가 힘들어 보입니다.
˝잘 있었는가? 앓아 누웠었다네. 그대로 저승 가는 줄 알았지. 내일이 설인데....., 그냥 있을 수가 없었네.˝
할머니는 들고있던 보자기에서 종이꾸러미를 꺼내 군인에게 줍니다.
˝백설기라네. 나눠 먹게나. 아직 따끈할 게야.˝
꾸러미에서 나온 하얀 김이, 할머니 얼굴을 스치며 북쪽으로 흩어집니다. 할머니는 철마에게로 왔습니다. 떨리는 두 팔로 떡보자기를 철마의 등에 놓았습니다. 그리곤 철마를 끌어안았어요.
˝이렇게 갈라져서 있을 순 없는 게야. 한 몸인 것을, 한 몸인 것을.....˝
철마가 두 동강 나 아파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철마를 쓸어줍니다. 내 손이 약손이다 하며 배탈난 손자 배 어루만지듯이.

어느새, 캄캄해졌습니다. 할머니가 속바지를 한참 더듬더니, 그만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아이고, 내가 달우물 물을 안 떠왔네 그려. 깜빡 했구먼. 이 일을 어째!˝
그때, 말없이 보고만 있던 새한이가 바지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며, 씨익 웃습니다.
˝할머니, 여기 있어요.˝
˝우리 새한이가! ..... 어여, 어여 네가 철마에게 뿌리려므나.˝
˝싫어요. 할머니랑 같이 해요.˝
˝오냐오냐, 그래그래. 오호호, 우리 새한이가!˝
할머니 입이 마냥 호물거립니다. 새한이 손과 할머니 손, 합쳐진 두 손이 철마에게 달우물 물을 발라줍니다.
그믐달, 실낱같은 달빛이 할머니와 철마, 새한이를 비춰줍니다.

그 때입니다. 그림판 속의 철마가, 누워있는 철마에게로 철커덩 내려앉으며 ´뿌우-뿌-욱´ 기적 소리를 냅니다. 흰 연기가 뭉턱뭉턱 피어오르며 가시철조망과 담장을 휘덮더니, 철마가 털컹털컹 달리기 시작합니다. 언덕 위의 종탑에서 댕그덩댕그덩 종이 울립니다. 짙은 어둠 속에, 새해
새 아침을 열 해님이 벌써 꿈틀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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