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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광주일보] 할머니의 약속 -김미아

신춘문예 김미아............... 조회 수 1461 추천 수 0 2005.02.28 23: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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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화


헐머니의 약속 -김미아



날이 밝으면 안개는 다홍치마처럼 저수지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안개 주의보가 내리지 않아도 이 저수지에는 날마다 안개꽃이 듬뿍 피어 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저수지를 ´운천 저수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수지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솜이네 집 마당으로도 안개가 자꾸 들락거립니다.
다솜이네 식구들은 날마다 안개로 세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다솜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저수지에 가서 놉니다. 저수지에는 구경거리도 많고 놀이감도 풍부하니까요.

저수지 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엄마 젖가슴처럼 불툭 튀어나와 있습니다. 다솜이는 올 여름에 꼭 뗏목을 만들어 저 섬에 가려고 계획을 짜 놨습니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두 달이나 남았는데도 오늘도 다솜이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저수지 구경을 하러 나왔습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저수지가 그려진 약도에 하나하나 표시를 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에서처럼 탐험대원이나 된 듯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솜이는 뗏목을 만들 피티병을 무려 오백 개나 모아 놨습니다. 문제는 여름이 빨리 오기만 하면 됩니다. 다솜이가 제일 먼저 뗏목에 태우고 싶은 사람은 바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다솜이가 2학년에 다닐 때부터 운천저수지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직도 저 섬에 산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곳에서는 저수지에 섬이 하나도 없었단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일이야. 전쟁 중에 마을 사람들이 서로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있었지. ...... 음 그래 그 전쟁 맞다 맞아. 우리 손주 똑똑하구나.
책에서 읽었구나....... 사람들은 서로 좋은 세상을 꿈꾸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그래서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거나 죽게 되었지. ........ 그래 그래 바로 너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공산주의자들이야....... 그런데
국군이 다시 힘이 쎄져 돌아오게 되었는데 처음에 힘이 세었던 사람들이 그만 그 전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몽땅 이 저수지에 버리고 도망갔단다. 그 때부터 저수지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 사람들은 버려진 시체들의 울음소리라고 했어. ...... 뭐 거짓말이라고, 얘야. 세상에는 말로 설명 안 되는 것도 많이 있단다. ...... 뭐? 영혼이 무엇이냐고? 그건.......˝

일년이 지난 지금도 다솜이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다솜이가 따지기만 하면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다솜이를 잠못 들게 하니까요. 다솜이는 할머니는 뗏목에 태우고 직접 그 섬에 가서 할머니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몇주 전부터 할머니는 방안에 틀어 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솜이는 문득 할머니의 개성인 그 구부러진 그림자를 보고 싶어 졌습니다. 단숨에 달음박질쳐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보 이제 우리 어머님을 치매 전문 병원에 입원시킵시다. 더 이상 당신 고생하는 꼴을 못 보겠어요. 다솜이에게까지 숨기면서 저렇게 가두어 두어야 되겠소?˝

˝안 돼요. 다솜이가 알면 큰 충격이에요. 다솜이가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 병원에서는 집에서 병시중 드는 것만큼 정성스럽게 치료도 안 해준다고 그러대요. 조금만 참아 보게요. 제가 힘닿는데 까지 치료해 보겠어요.˝

˝여보∼, 고맙구려.˝

다솜이는 큰 방 문 앞에서 아빠와 엄마의 말을 엿듣고 말았습니다.

˝아빠가 치매가 무엇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와 다급하게 묻는 다솜이를 보고 아빠와 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 들었구나. 할 수 없지. 너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니 다 알아들을거다.˝

다솜이 엄마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다솜이 아빠는 말을 이었습니다.

˝치매란 별거 아니다. 엄마 아빠도 나이가 들면 걸리는 병인데 할머니께서 너무 늙으셔서, 약간 기억력을 잃어버린 것뿐이란다.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볼 때도 있으니, 너도 할머니가 조금 못 알아보더라도 실망하지 말아라.˝

다솜이 아빠는 말을 다 마치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럼 정말 나를 못알 본단 말이에요. 아빠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다솜이는 아빠가 대답을 해주지 않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마라. 이 엄마가 정성껏 보살펴 드리면 꼭 나으실 거다. 그리고 가끔 기억을 되찾을 때도 있으니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다솜이 엄마가 다솜이를 위로해 주었지만 다솜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솜이는 어느새 저수지 둑길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둑길 끝에 있는 큰 바위까지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와 같이 앉아 있었던 큰바위가 다솜이에게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벌써 해가 뒷산에 머물고 햇무리가 저수지 수면 위를 핥고 있었습니다. 붉은 빛으로 물든 저수지도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이런 저녁 저수지에서 다솜이의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작은 섬을 바라보곤 했는데 오늘은 다솜이 혼자 외롭게 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섬을 바라보고 다솜이는 다시 할머니와 걷던 길을 따라 집으로 왔습니다.

˝ 아휴∼, 우리 손자 이렇게 늦게 어디 갔다 오누. 빨리 들어 와서 밥먹지 않고…….˝

할머니는 언제 아팠냐는 식으로 다솜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할머니, 이젠 안 아퍼? 이젠 다 낫은 거야?˝

˝아니 이 녀석이 왜 이러지? 내가 언제 아팠다고 그러냐?˝

정말 할머니는 아픈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할머니는 살이 조금 빠진 것을 빼고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아팠었잖아요? 2주일씩이나 할머니 방에서 앓고 있었으면서……˝

˝야, 에미야. 다솜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통 모르겠다. 다솜이가 어디 다친 거 아니냐?˝
˝다솜아, 얼른 씻고 밥 먹어라. ˝

부엌에서 달려나오신 다솜이 엄마는 할머니 뒤에서 다솜이게게 윙크를 하며 말했습니다.

˝아∼, 알았어요. 지금 씻고 갈게요.˝

다솜이는 낮에 엄마가 한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기억을 찾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는 그 말이 말입니다.

오랜만에 저녁상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할머니는 다솜이 밥 위에다 반찬을 얹어 주시고 다솜이 아빠 엄마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하였습니다.

˝할머니 저하고 약속하신 거 기억나세요?˝
˝무엇 말이냐?˝
˝그것 있잖아요. 섬에 가보는 것.˝
˝그럼∼ 기억하고 말고. 이번 여름에 가기로 했잖니?˝

다솜이는 할머니가 이젠 하나도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솜이네 식구들은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먼 산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해님이 제일 먼저 운천저수지의 안개에 세수를 하고 깨끗한 얼굴로 마을로 향했습니다. 다솜이집 마당에도 햇살비가 쏟아집니다.

다솜이는 일어나자마자 할머니 방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일찍 일어나셨을 할머니가 계속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일어나세요. 벌써 해님이 저수지 안개를 해치웠다고요.˝

할머니는 그래도 계속 잠만 잤습니다. 다솜이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할머니, 일어나세요? 제발∼.˝

할머니는 부시시 눈을 떴습니다.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아버지 얼른 숨으세요. 그놈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올지 몰라요. 어서 여기 숨으세요.˝

할머니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다솜이에게 이상한 말을 하고 자꾸 이불 속에 숨으라고 말했습니다. 다솜이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할머니∼. 나예요. 다솜이란 말이예요. 정신 차리세요?˝

다솜이가 울먹이며 할머니에게 말할 때 아버지가 놀라서 달려 오셨습니다.

˝네 이놈들, 우리 아버지는 데려가지 못한다. 절대 너희들한테 우리 아버지를 줄 수 없다.˝

할머니는 다솜이 아버지를 보고 성난 파도처럼 달려들며 아버지를 밀쳤습니다. 다솜이 아버지도 어리둥절해 하며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달랬습니다. 다솜이는 할머니가 무서워 엄마한테 달려갔습니다.

다솜이는 학교에서도 온통 할머니 생각뿐이었습니다.

미술시간에 걸어다니는 할머니의 그림자를 그린 기억만이 겨우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다솜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양이 걸음으로 할머니 방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할머니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설마 병원에 간 것을 아닐까?˝

다솜이는 할머니가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헐떡거리며 들어왔습니다.

˝다솜아 할머니가 사라지셨다. 나랑 같이 찾아보자.˝

˝할머니가요?˝

˝그래, 오전 내내 6.25 전쟁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만 찾더니 겨우 잠이 들었단다. 그래서 조금 안심을 하고 밖에 나갔다 와 보니 할머니가 안 계시지 뭐냐. 너 혹시 할머니가 가실 만한 데를 알고 있니?˝

아버지의 말에 다솜이는 갑자기 큰 바위가 떠올랐습니다. 다솜이는 얼른 아버지와 큰 바위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는 정말 큰 바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입가엔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작은 섬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싱글거렸습니다.

할머니를 업고 돌아오는 길에 다솜이 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솜이게게 들려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작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똑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중에 증조 할아버지가 끼어 있다는 게 할머니 이야기와는 달랐습니다. 다솜이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 때 까지도 아버지 등위에서 싱글거리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계속 웃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다솜이 아버지는 할머니가 저수지에 빠질까 봐 할머니를 치매 전문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다솜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잊어 먹을까 봐 오랫동안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져 살기 싫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편지지를 꺼내 편지를 썼습니다.

작은 섬에 사는 증조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 저는 증손자 다솜이예요. 저는 증조 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증조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증조 할아버지가 작은 섬에 산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알았어요. 할머니게 왜 그렇게 작은 섬에 가보고 싶어하는지도 알았구요.

그런데 할머니와 저는 이제 증조 할아버지를 만나러 섬에 갈 수 없어요. 할머니가 너무 아프거든요. 우리 둘이는 단짝 친구인데 한 친구가 아프니 작년에 한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요. 증조 할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할머니를 빨리 낫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증조 할아버지를 뗏목에 태워 마을에 와서 육지 구경을 시켜 줄게요.

꼭 약속해 주세요. 그럼 기다릴게요.

다솜이는 얼른 큰 바위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편지지로 접은 종이배 하나를 물 위에 띄웠습니다. 종이배는 물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작은 섬 쪽으로 흘러 갔습니다.
다솜이 마음도 점점 할머니가 계신 곳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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