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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동화] 물에서 나온 새

정채봉동화 정채봉............... 조회 수 1333 추천 수 0 2005.03.13 20:03:49
.........
달반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 묻은 손으로 땅을 쓸었습니다.
어머니가 홍두깨로 떡 반죽을 넓게 밀 때처럼 티 하나 없게 땅을 고른 다음 사금파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름달 같은 동그라미 안에 깊숙한 샘 같은 눈과 버들강아지 같은 눈썹을 그렸습니다.
달반이는 바가지 모양의 입을 그리다가 입가에 소리 없이 배어드는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달반이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달반이 앞에는 어느새 와 있었는지 키가 큰 아저씨가 서 있었습니다.
달반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는 신 열매를 깨문 것처럼 찡긋 기울었던 눈에 웃음을 띄며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우리 엄마예요.”
“어머니라아……. 네 어머니 표정은 항상 그러시니?”
“아녜요. 지금은 달을 베어 잡수시느라 그래요.”
“달을 베어 잡수시다니?”
“어머니는 달을 베어 잡수신 꿈을 꾸고서 저를 낳았대요. 그래서 제 이름도 달반이어요.”
“그래?”
“네.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얼굴을 하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이가 아린 듯한 이런 표정을 지으셨어요. 눈 속의 소나무처럼 항상 푸르게 살아라면서요.”
“사랑이 깊으신 분이구나.”
“사랑이 깊으시면 그런가요?”
“그렇지. 참는 것을 아니까.”
“전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요. 조금 전에 이 동네 아이들이 절 거지라고 놀리며 마구 때렸어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해 내려고 이렇게 어머니 얼굴을 그리는 것이어요.”
밤에 우는 풀벌레 소리처럼 달반이의 목소리는 가늘어졌습니다.
“그럼 너희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 일찍 돌아가셨어요. 전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고아로구나.”
“그러나 전 울지 않아요. 어머니 말씀대로 달처럼 둥글게 살아요.”
어깨가 잘 맞추어지지 않은 돌 틈으로 바람이 새어 나와 아저씨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달반이는 돌담 틈에 사금파리를 끼워 놓고 일어섰습니다.
행여 아저씨의 큰 그림자를 밟을까 비켜 가는 달반이를 아저씨가 불렀습니다.
“달반아, 너 오늘부터 날 따라가서 살지 않을래?”
“아저씨하고 살아요?”
“그래. 나도 너처럼 혼자 살거든.”
달반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달반이의 손목을 가만히 거머쥐었습니다.
황룡사 처마 끝에 둥근 달이 떴습니다. 여기저기 피어 있는 풀꽃들의 색깔마저 드러낼 만큼 하늘은 고요하고 달빛은 밝았습니다.
달빛 아래 엎드려 있는 황룡사는 낮에 볼 때보다 더 커 보였습니다.
고래등처럼 보이는 용마루며 코끼리 몸뚱이 같은 대들보하며 대웅전과 구층탑, 그리고 연못……. 어느 것 하나 웅장하지 않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절에 아직 안되어 있는 것은 달반이네 아저씨가 맡고 있는 벽화뿐이었습니다.
어서 그려 달라고 주지스님이 재촉할 때마다 아저씨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그립니까?”
날마다 아저씨는 탑을 돌았습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수없이 외었습니다.
아저씨는 오늘밤에도 탑을 백여덟 바퀴나 돌았습니다. 땀이 이마에도 등에도 송골송골 솟아올랐습니다.
아저씨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으로 방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옷 보퉁이를 맡고 있는 달반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저씨는 달반이를 찾았습니다.
뜰을 둘러보고, 종각을 지나서 대웅전 앞에도 가보았지만 달반이는 없었습니다.
“달반아! 달반아!”
뒤뜰을 지나서 연못가로 나오던 아저씨는 우뚝 발을 멈추었습니다.
저쪽 늙은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아이는 달반이가 틀림없었습니다.
“달반아!”
아저씨는 반가워 뛰어갔습니다.
“쉬이.”
달반이는 둘째손가락을 세워서 입술에 대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아저씨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습니다.
달반이의 어깨 너머로 연못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연못에는 눈이 시리게 피어 있는 연꽃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저기, 저기요.”
“저기라니? 그 쪽에는 연꽃 줄기도 없지 않느냐?”
“아이, 아저씨두. 저기 저 물 속을 보세요.”
“물 속을? 물 속은 왜?”
“달이 떠 있잖아요. 늙은 소나무도 있고 물안개도 피어있고요.”
“달, 소나무…… 오오, 그렇구나. 물안개도…….”
아저씨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달반이가 보고 있는 것은 물 밖의 풍경이 아니라 물 속의 풍경이었던 것입니다.
“아저씨, 새도 있어요.”
“새라니?”
아저씨는 연못 속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정말이었습니다. 둥근 달을 조각 내는 소나무 가지 위에서 새 두 마리가 서로의 깃에 고개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있구나.”
“세 마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마리는 아저씨의 발소리에 놀라서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밖으로 나와버리다니?”
“물 밖으로요.”
“물 밖으로? 새가 물고기라도 된단 말이냐?”
“그럼요. 새가 날아서 나왔어요. 정말이어요.”
바람이 쏴아아 불었습니다.
체의 그물처럼 가는 물살이 일었습니다.
연못 속의 풍경이 물살 따라 어질어질 밀려서 주름이 졌습니다.
달반이는 아저씨의 팔을 꽉 붙들며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조금만 있어 보셔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저씨는 뒷머리를 긁으며 기다려보았습니다.
바람이 저만큼 지나며 처마끝의 풍경을 울릴 때였습니다. 정말 물 속 세상이 조금 전처럼 환하게 돌아왔습니다.
둥근 달도, 늙은 소나무도, 물안개도, 그리고 새 두 마리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습니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아저씨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와락 늙은 소나무를 끌어안았습니다.
달이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를 벗어나서 연못 한가운데로 나섰을 때에야 아저씨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저씨의 눈동자는 검은 하늘을 가르는 번갯불처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름 잡혀 있던 이마가 시원하게 개었습니다.
아저씨는 너울너울 춤을 추듯이 그림 도구를 챙겨 들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낮이 지나고, 또 밤이 지나갔습니다.
또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도 법당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낮과 밤이 오며 가며 하루가 더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아저씨가 법당에 들어간 지 이레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서라벌 골골이 안개가 가득하였습니다.
달반이는 그날 아침도 안개 속에 묻혀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벽화가 궁금한 주지스님도 여러 스님들과 함께 불경을 외며 뜰에 서 있었습니다.
인경이 저렁저렁 울었습니다.
실바람이 지나며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묻은 안개를 살살 쓸어갔습니다.
인경 소리에 떠밀리듯, 소리도 없이 법당 문이 열렸습니다.
안개를 헤치며 아저씨가 조용히 나타났습니다.
“아저씨.”
달반이는 아저씨 품에 안겨서 ‘쏴아아’하고 법당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바람소리를 들었습니다.
벽화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벽화는 꼭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달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고, 그리고 물안개도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듯한 벽화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람들이 아, 하고 비명에 가까운 환성을 질렀습니다.
벽화의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 두 마리 사이로 포르릉 날아 들어가는 새 한 마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맞아요. 연못 속에서 날아간 새예요.”
달반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맞아요. 연못 속에서 날아간 새예요.”
달반이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지는 골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줄기줄기 번지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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