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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어떤 호사스러운 여행의 끝

창작동화 이영호............... 조회 수 1555 추천 수 0 2005.04.07 13:36:23
.........
[방정환 문학상 수상작품]

자, 이제 출발이다!
기영이 아저씨는 자전거 안장 위에 엉덩이를 올려 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오늘은 마산이렸다. 그래, 마산이야. 마산은 항구 도시지. 꽤 큰 항구 도시란 말이야.
기영이 아저씨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웬만한 국민학교 학생까지 다 아는 그런 상식적인 말을 되뇌는 것은 마산이 기영이 아저씨에게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행을 위해서 어젯밤 사이에 기영이 아저씨는 마산에 대해 무지무지하게 공부했습니다.
마산의 인구, 마산의 경치, 마산의 명물, 마산 아이들의 마음씨까지 모조리 말입니다.
아름다운 무학산, 추산공원, 남빛 아름다운 바다, 수출자유지역 안에 있는 그 많은 공장들, 그리고 마산의 불종거리까지,기영이 아저씨는 모르는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라…….
기영이 아저씨는 페달을 밟는 다리에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하며 중얼거립니다. 자전거는 씽씽 잘도 달립니다.
마산은 기영이 아저씨가 사는 곳에서 천리도 더 되는 아주 먼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기영이 아저씨가 탄 자전거는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휙휙 가파른 고개를 넘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비행기보다도 더 빨리 기영이 아저씨를 목적지까지 태
워다 주기도 합니다.
기영이 아저씨의 입에서는 어느 틈에 허덕허덕 가쁜 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은 페달을 밟는 다리가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닙니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기영이 아저씨는 페달을 밟는 다리에 더욱 힘을 줍니다. 자전거는 씽씽 날듯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기영이 아저씨의 귓가에 시원한 바람이 불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에 모닥불을 끌어붓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확확 끼얹어져 옵니다.

´뚜당뚜당 뚜당땅 뚜당땅…….´
어디선가 대장간에서 치는 쇠망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쇠망치 소리는 귀청이 따갑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페달을 밟는 다리에 더욱 힘을 줍니다. 얼굴에는 더욱 뜨거운 불기가 화끈화끈 끼얹어 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어디서 잠시 쉬어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출발하면 기영이 아저씨의 자전거는 아저씨의 마음대로 도중에서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쉬어도 좋다고 누군가가 허락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에잇 빨리나 가야지, 그래서 마산에서 신나게 구경이나 하면 피곤한 것을 느끼지 않겠지, 달려라 달려라…….

기영이 아저씨는 조바심이 나서 자전거를 하늘로 휙 나르게 했습니다. 비행기보다도 더 빨리 나르게 했습니다. 저 아래로, 까마득한 저 아래로 아름다운 경치가 지나갑니다.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옹기종기 서있는 게 내려다보입니다. 고갯마루로 헐떡이며 올라가는 시골 버스가 보입니다. 띠처럼 꼬불꼬불 산허리를 감고 나 있는 오솔길이 보입니다.
그 길로 개미처럼 꼬물꼬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오늘 어디선가 장이 서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어느 마을에 잔치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흰옷 입은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나들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 둘 중 어느 하나의 이유 때문일 것이 분명합니다.

´따당땅 따당땅 따당땅 뚜당땅당……´
쇠망치 소리는 이제 제법 박자를 맞추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어디엔가 분명히 대장간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 눈을 두리번거립니다. 뚜당땅 뚜당땅, 아! 보입니다. 대장간이 보입니다. 아니 먼저 본 것은 대장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시장이었
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의 집들보다 시장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시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천가에 누런 소잔등이 우글거리는 우시장이 있고, 그 우시장 한켠에 다리를 묶인 돼지들이 꽥꽥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갈팔질팡하고 있고, 그 바로
옆에 대장간이 있습니다.
쇠망치를 든 두사람이 번갈아가며 시뻘겋게 달궈진 시우쇠를 ´뚜당땅 뚜당땅´ 박자를 맞춰 신명나게 두들기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돼지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바로 그 쇠망치 소리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쇠집게로 벌겋게 달궈진 시우쇠를 씌어들고 망치질하는 둥근 쇠판 위에 정확히 이리저리 뒤집고 대장장이의 얼굴은 아주 침착하고 무표정합니다. 그 옆에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곤 하면서 화로에 ´찌익풀럭 찌익풀럭´ 풀무질을 하고 있는 사람도 보입니다.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 화로 앞에 앉아서 풀물질을 하는 탓으로 풀물질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쇠망치 소리는 딱 질색인 모양입니다. 이따금 움찔움찔 놀라기까지 하는 게 틀림없이 그런 모양입니다. 쳇,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주제에 쇠망치 소리가 듣기 싫다니 어디가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피식 코웃음을 칩니다. 어쩌면 꼭 자기를 닮은 풀무질장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불이 잘 피었으니 이제 좀 천천히 바람을 돌려.˝
´찌이익 푸울럭, 찌이익 푸울럭´ 풀무질하는 소리가 이제 아까보다 훨씬 느려졌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도 헐떡거리며 주머니에 든 걸레같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이제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새 기영이 아저씨의 자전거는 산을 몇 개나 넘어서 수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왔으니 피곤할 만도 합니다.

저만치 남빛 바다가 보입니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입니다. 부두에는 수십층 빌딩 크기만한 커다란 배가 여러 척 정박해 있고, 바다 가운데는 돛단배가 한가롭게 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마산항이다! 분명히 마산항에 도착한거야! 시가지 동쪽의 바닷가 공장 지대가 바로 수출자유지역임이 틀림없어. 무학산, 추산공원, 불종거리, 텅 빈 쓸쓸한 가포 해수욕장, 소주 공장, 간장 공장……그래 마산은 물맛이 좋아서 음료수가 유명하지, 아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이 그립구나. 그래, 빨리 가서 마산의 물맛을 보아야지. 그리고 귀엽고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아이들도 여럿 만나봐야지, 되도록 여럿 말이지.
기영이 아저씨는 잘 닦인 포장길 위로 자전거를 급강하시킵니다. 마산의 골목을 자전거로 누비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걸레 같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얼굴에 함뿍 행복하고 기대에 찬 웃음을 떠올립니다.

자, 오늘도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지, 정직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을 말이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을까? 가슴속에 꿈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이곳에 얼마나 있는 것일까? 그러자면 역시 꼬마 친구들을 만나는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생활의 때가 디레디레 낀 어른들의 거짓 웃음은 이제 질색이야. 딱 잘색이란 말이야. 마산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또 실망하고 말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어른들의 말에는 이미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아. 그들의 가슴 저 깊숙이에 들어 있는 양심의 문은 무겁고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져버린 지 이미 오래란 말야.
기영이 아저씨는 천천히 시가지로 접어들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그런 사람을 만나보려고 가는 곳마다 눈을 두리번거려 봤지만, 번번이 실망만 했으니 그런 생각도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만세! 기영이 아저씨 환영!˝
느닷없이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가 싱그럽도록 귀엽고 카랑한 목소리입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바라봤습니다. 작고 귀여운 꼬마 하나가 발발이와 나란히 길가의 작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며 기영이 아저씨를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감격해서 화알짝 웃는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었습니다.
발발이는 기영이 아저씨보다도 더 요란하게 꼬리를 흔들며 콩콩 앙징스럽게 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의 멀고 먼 여행 길에서 피로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면 맨 먼저 달려나와 기영이 아저씨를 마중하는 기영이 아저씨네 복술이와 너무도 닮은 발발이입니다.
˝고맙다, 고마워. 그래 내가 오늘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너는 어떻게 알았니? 누가 알려주던?˝
˝우리 복순이가 말해준 기라예. 그래서 아침부터 여기 서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안 있었습니꺼.˝
꼬마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볼수록 귀여운 얼굴입니다. 복순이가 다시 입을 하늘로 치켜들면서 콩콩 짖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네 복술이가 새벽같이 나한테 소식을 보내왔걸라요. 히히히, 그래서 우리 종길이한테 얼른 알려줬지러예.˝
복순이가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복술이와 복순이는 오뉘일까? 이름을 들으니 그럴 것도 같군. 기영이 아저씨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복순이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고녀석 참 귀엽구먼. 기영이 아저씨는 달려가 한번 꼬옥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왈칵 들었습니다. 그러나
참아야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부지랑 옴마는 아저씨가 미쳤다고 하는 기라예. 그렇지만 나는 참말로 아저씨가 좋은 기라예. 세상 일을 전부 돈과 밥으로만 따지는 다른 어른들보다 돈도 밥도 안 나오는 그런 일에 미친 아저씨가 더 좋은 기라예.˝
아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저 헛인사로 해보는 말은 절대로 아닌 표정이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그런 아이를 향해 다시 한 번 활짝 웃는 얼굴로 한 손을 번쩍 들어보였습니다.
네 말이 맞다. 그래 나를 알아줘서 고맙구나. 기영이 아저씨는 이렇게 마주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아이들 교육을 망치는 미치광이라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마저 부러뜨리겠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환영해줘서 고맙다. 자, 그럼 잘 있거라.˝
기영이 아저씨는 아이와 복순이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지나쳐 시가지 중심으로 자전거를 몰고 갔습니다. 북마산 역전의 침침하고 우중충한 모습이 이내 기영이 아저씨의 시야에 다가왔습니다. 항구 도시의 역치고는 무척 한적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이윽고 기영이 아저씨는 북마산역을 지나 창동으로 들어섰습니다. 제법 번화하고 웅성거리는 거리입니다. 붐비는 사람과 차들 때문에 자전거를 더욱 천천히 몰아야 했습니다. 커다란 인형을 안고 있는 귀여운 꼬마 하나가, 번화한 거리로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기영이 아저씨가 이상해 보이는지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안녕, 인형보다 더 귀여운 아가씨야.˝
기영이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꼬마 아가씨가 방긋 수줍게 웃고는 인형의 머리칼에 얼굴을 문지르며 아저씨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인형의 노란 머리칼이 어쩌면 그렇게 낯설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소녀의 새까만 머리칼을 가만가만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는 그곳을 떠나려다 말고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에 뽀뽀를 해줬습니다.
˝인형의 머리칼이 너와 닮지 않아서 밉구나, 빠이빠이.˝
기영이 아저씨는 소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자전거가 오른쪽 큰길로 꺾어들었을 때 기영이 아저씨는 어디선가 어슴프레 들려오는 함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군중들이 지르는 함성이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소리나는 쪽으로 자전거를 들입다 몰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빨리 가서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철둑 아래로 난 비탈진 아스팔트 길을 쏜살같이 내려오자, 기영이 아저씨는 수많은 군중이 웅성거리고 뭐라 함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마다 손을 휘두르며 소리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히 데모대의 농성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갑자기 십오 년 전 옛일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기영이 아저씨는 부정 선거를 다시 하라고 친구들과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어찌나 심하게 맞았던지 그때부터 몸이 엉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만 기영이
아저씨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만 봐도 그때 생각이 울컥 떠올라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군중들 가까이로 바싹 다가갔습니다. 대부분이 학생들인 그들 군중의 한가운데에는 높다란 탑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탑의 꼭대기에는 횃불을 든 남녀 학생과 젊은이가 어깨를 걸고 함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기영이 아저씨가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붙들고 말을 걸었습니다.
˝아니, 당신에게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단 말씀입니까? 우리의 함성이 들린다는 겁니까?˝
그 사람은 놀라운 사실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빛내며 물어왔습니다 섬짓하도록 빛나는 눈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 많은 군중이 보이지 않다니 내가 장님인 줄 압니까? 나는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우릴 알아보는 사람은 오늘 형씨 하나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게 원통해서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었던 횃불이 왜 이처럼 쉽게 꺼져야 합니까? 우리가 흘린 피가 왜 쉽게
잊혀져야 합니까?˝
그 사람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피라니오?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그러나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하기는 커녕 이미 그 사람은 연기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느 틈에 그 많았던 군중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흡사 도깨비에 홀린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기념 촬영 하나 하십시오. 보아하니 여행객이신 모양인데 마산의 얼이 담긴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은 맹세코 평생 기념이 될 것입니다.˝
그때 카메라를 목에 건 한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기영이 아저씨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습니다.
˝마산의 얼이 담겨 있다구요?˝
˝그럼요. 3·15 부정 선거를 다시 하자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데모를 벌이고, 종내 전국에 자유의 함성이 터지게 하고, 드디어 4·19혁명을 불러 일으킨 곳이 바로 이곳이고, 저 기념탑은 그 얼을 영원히 새겨 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저 학생들이 말입니다.˝
사진사는 기념탑 위에 서 있는 구리로 만든 학생상을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기영이 아저씨는 속으로 짧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방금 유령처럼 사라진 그 사람의 말을 그제사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 귀에는 저 젊은 학생들의 함성이 들립니까?˝
기영이 아저씨는 사진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뭐라구요? 아, 저건 기념 동상이오.˝
˝그럴테지요. 그럼 저런 동상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많이 붙잡아 당신의 카메라로 그 사람들을 저 젊은이들 앞에 영원히 세워 두시오.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히 뻣뻣이 벌을 세우시오.˝
기영이 아저씨는 왜 그처럼 사진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멍청해져 서 있는 사진사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습니다.
´뚜당땅 따당 뚜당땅 따당…….´
또 시우쇠를 두들기는 대장간의 망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빨리 달려! 바람을 더 세게 일으키란 말야.˝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기영이 아저씨는 자전거 페달을 더욱 힘껏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빨리 마산을 돌아보는 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영이 아저씨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헉헉거리며 페달을 밟아대야 했습니다. 지금은 오직 잠시라도 빨리 마산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빨리 다른 곳으로 가자. 다른 곳으로! 어디로, 어디로 가지?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멀었는데 어디로 가지? 어디로…….
기영이 아저씨는 달리면서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적당한 여행지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 이럴수가…….´
기영이 아저씨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나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전국 어느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젠 가볼 데가 하나도 없구나. 다 돌아본 거야. 도망칠 곳이 없어졌어.´
기영이 아저씨는 낙담한 얼굴로 중얼거렸습니다. 갑자기 딱 버티고 선 절벽 앞에 마주 선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가슴이 답답해지고 다리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리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기운이라는 기운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이 전신을 휩싸는 것이었습니다.
˝달려! 더 힘껏 바람을 넣으라니까!˝
누군가가 소리를 다시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기영이 아저씨의 커다란 몸뚱이가 기우뚱하는가 했더니 그만 자전거 아래로 물 먹은 종이처럼 널브러져 버렸습니다.
˝아, 아니 이 사람이 왜이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고함을 질렀던 사람이 쇠망치를 둘러메다 말고 비명 소리 같은 고함을 지르며 기영이 아저씨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시뻘겋게 단 시우쇠를 쇠판 위에 얹고 있던 무표정한 대장장이도 집게를 놓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기절했나 봅니다. 아침부터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끝내 이런 꼴로 쓰러지고 마는군요.˝
망치를 휘두르던 사람이 쇠망치 소리만큼이나 카랑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둘러 기영이 아저씨를 등에 들쳐 업었습니다.
˝어쩔려고 그러나?˝
대장장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돈은 나중의 문제고 우선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요.˝
일꾼이 대장간을 나서며 말했습니다. 대장장이도 망치장이의 등에 업힌 기영이 아저씨의 축 늘어진 손을 잡고 따라 나섰습니다.
˝내내 기분이 좋은 얼굴이던데 갑자기 왜 이 꼴이 되는걸까?˝
˝손으로 풀무질하던 것을 치우고 자전거 체인에 연결해서 풀무질을 하게 되고부터 내내 기분이 좋았었지요.˝
˝그랬었지.˝
˝뭣 때문인지 아십니까?˝
˝손으로 하는 것보다 힘이 덜 드니까 그럴테지 뭐.˝
˝그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풀무질하는 자전거를 타고 늘 정신없이 전국 방방 곡곡을 신나게 쏘다니며 여행하는 꿈을 꾸고 있었단 말입니다. 마음속으로 말입니다. 오늘은 경주, 내일은 속리산, 법주사, 내장산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즐거울 수밖에요. 저녁에는 미리 여행갈 곳에 대해 열심히 책을 보아서 지리를 화안히 익히는 게 일이었습니다.˝
˝쯧쯧쯧……별 희한한 이야기도 다 듣는군.˝
˝지겨운 일을 되풀이하면서도 즐거웠던 건 그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마음속으로 여행한 곳을 자랑스럽게 나한테 이야기하곤 했지요. 언제던가 그런 실없는 짓은 집어치우라고 했더니 얼마나 실망하는 표정이던지요. 그래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지요. 사람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나 원. 이런 몸으로 너무 과한 여행을 한거야.˝
망치장이가 기영이 아저씨의 늘어진 몸을 추스르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쯧쯧쯧……마음도 몸도 너무 어질어서 이 모양이지.˝
대장장이도 뒤따라가며 연방 혀를 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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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창작동화 [창작동화] 바람 이야기 이재희 2005-03-25 1564
273 창작동화 [창작동화] 파란 우산 이은경 2005-03-25 1428
272 창작동화 [창작동화] 박과 봉숭아 마해송 2005-03-25 1603
271 외국동화 [일본동화] 도토리와 산고양이 [1] 미야자와 켄지 2005-03-25 1726
270 창작동화 [창작동화] 나는 그냥 나야 선안나 2005-03-13 1338
269 외국동화 [외국동화]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헬렌 2005-03-1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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