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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동아일보 신춘 당선작
삼색 나비목걸이 -김정옥
정원 어귀에 자리 잡은 조그만 연못엔 잉어들이 손바닥만한 구름을 한 입씩 베어 물고 있었다. 잉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송이는 참 심심했다. 송이는 살그머니 할머니 작업실을 들여다보았다.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꼿꼿하게 앉아 실을 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송이는 살며시 할머니 곁에 앉아 까만 눈동자를 굴려 가며 찬찬히 바라보았다.
˝할머니, 색깔이 참 곱게 나왔네요. 난 이 색이 좋더라.˝
할머니가 물들인 옥색 명주실을 보며 한마디 던졌으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작업할 때는 말을 안하는 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통 매듭을 한다.
한 달이면 두 세번은 제자들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배워 가기도 한다.
제자들에게 매듭을 가르칠 때에는 가끔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요즘은 한 번도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곧잘 나이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렇지만 유난히 엄마한테만큼은 버럭버럭 화를 잘 내는 할머니가 송이는 은근히 미웠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늘 매섭고 차가웠다. 송이는 실을 꼬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송이야, 재미있어 보이니? 할머니가 매듭 가르쳐 주랴?˝
할머니는 송이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말했다.
˝할머니, 정말이에요? 와! 신난다. 정말이죠?˝
˝그렇게도 좋으냐? 이리 가까이 앉아 봐라. 자, 이 끈이면 좋겠구나. 끈을 손에 대기 전에 매듭이란, 끈과 끈이 만나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작품이 된단다.˝
송이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할머니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말끔히 닦인 유리장 속에는 갖가지 모양의 주머니, 노리개, 안경집, 등 옛날 궁중에서 쓰던 모양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할머니, 이 붓주머니 참 곱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송이는 유리장 속의 자주색 주머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건 자색 향낭이란다. 옛날에 공주들이 지녔던 향 주머니지.˝
송이는 그 작품들과 친구가 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송이야, 매듭은 코, 몸, 손으로 구분한다. 코는 이렇게 잡고 돌리면서 자- 한 번 해 봐.˝
˝할머니, 이거 맞아요?˝
˝음, 그래. 그런데 끈이 이렇게 꼬이면 미워지지.˝
˝그럼, 다시 이런 식으로 돌리면 되지요?˝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송이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송이의 야물게 다문 입과 진지한 표정을 본 할머니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송이의 쬐끄만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송이는 신기하게도 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도 유독 매듭을 할 때만큼은 왼손을 써 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너무나 놀라워 송이에게 대뜸 물었다.
˝송이야, 보통 땐 무슨 손을 많이 쓰니?˝
˝네? 할머니, 이 손이요.˝
송이는 대번에 오른손을 내어 보였다.
˝아니, 그런데 지금은 왜 왼손을 쓰는 거냐?˝
˝어? 나도 모르게 왼손을 쓰고 있네.˝
송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였지만 할머니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나를 닮았다니....´ 할머니는 계속 혼잣말을 하였다.
송이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코를 만들면서 활짝 웃었다.
˝할머니, 이것 보세요. 잘했지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엄마는 왜 가르치다 말았어요? 계속했으면 엄마도 지금쯤 잘할텐데.˝
˝네, 어미는 안되겠더라.˝
갑자기 뾰로통해진 송이는 잡고 있는 실을 놓칠세라 손가락에 힘을 주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제자들 가르칠 때처럼 잘 가르쳐 주면 되잖아. 괜히 엄마한테는 화만 내고선. 할머닌 왜 엄마만 미워하는 거야!˝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할머니는 송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아비와 어미는 어울리지 않는 끈이 만난 거야. 휴-˝
˝할머니 무슨 말이야? 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송이는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 눈을 뜬 할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들이라도 하나 낳았더라면. 그 흔한 사내 녀석 하나 못 낳고 말이야.˝
할머니의 눈빛은 뭔지 모를 아픔이 잔물결 치고 있었다.
˝할머니, 송이가 있는데도 손자가 필요해요? 피, 그럼 난 뭐야?˝
송이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 할머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괜-찮아. 조금 있으면....˝
할머니의 힘겹고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송이는 급하게 엄마를 찾았다.
˝엄마, 엄마 큰일났어. 할머니가 갑자기 이상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쁘게 뛰었다.
˝어머님, 어머님 어디 편찮으세요?˝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번졌다.
˝괜찮다. 왜 이리 소란을 피우나? 나가서 일이나 봐.˝
할머니는 매정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그 후에도 몇 번의 가슴앓이가 있었으나 틈 나는 대로 송이에게 매듭을 가르쳐 주었다. 송이는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잘 돌려 댔다. 손가락에 송곳을 끼워 힘있게 잡아당길 줄도 알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심한 통증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할머니는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누워만 있었다.
송이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도 할머니는 몇 번 고개만 끄덕이었을 뿐,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갑자기 송이를 불렀다.
˝송이야, 내일 병원에 올 때는 매듭 바구니 가지고 오렴. 이 할미하고 다시 시작하자!˝
할머니의 눈망울엔 갑자기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솟았다.
송이는 잠자리 매듭도 만들었고, 국화 매듭, 매화 매듭, 하기 힘들다는 벌 매듭도 완성했다.
˝할머니, 천천히 가르쳐 주세요.˝
˝이 할미가 송이한테 가르쳐 줄 게 아직 많구나.˝
`내가 이렇게 마음이 바쁘면 안되지.´ 혼자 중얼거리는 할머니는 송이에게 매듭을 가르쳐 주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편안했다. 송이의 종알거림이 허전한 마음을 달래 주고, 서글픔도 이기게 해 주었다. 날이 갈 수록 할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자주 생겼다.
엄마가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또 숟가락에 밥을 떠서 할머니 입에 가져 갈 때도 할머니는 아무 말없이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할머니, 울지마. 할머니 우는 거 정말 싫어.˝
˝그래. 송이는 할미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구나.˝
˝선물이요?˝
˝송이는 이 할미에게 평온한 마음을 선물로 주었지.˝
`피, 난 또.´ 가볍게 콧방귀를 뀐 송이는 여러 색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제가 목걸이 만들어 진짜 선물 드릴게요. 이 분홍색 끈은 할머니고요, 이 연두색 끈은 엄마고요, 이 노란색 끈은 저예요. 아셨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할머니는 눈이 동그래졌다. 송이는 끈을 한 번 돌릴 때마다 할머니와 송이를 엮어서 맺고, 또 엄마와 할머니를 엮어서 맺고, 그리고 송이와 엄마를 엮어 맺으면서 나비를 만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를 업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는 할머니를 업어 드리고, 마지막엔 내가 엄마를 업어 주고. 자, 어때요?˝
˝어디 보자, 정말 기가 막히구나. 어떻게 세 가지 끈으로 이럴 수가?˝
˝할머니, 제법 잘하지요?˝
송이는 입을 샐록거리며 우쭐거렸다.
˝어디, 이 할미가 네 엄마를 업어 주었구나. 네 엄만 평생... ˝
˝이번엔 엄마가 할머니를 안으실 차례예요. 자 보세요. 맞지요?˝
˝그래. 네 엄마가 나를 안아 주니까 참 편하다. 점점 고운 나비가 되어 가는구나.˝
송이는 끈의 결이 꼬이지 않게 차근차근 고르게 조이면서 매듭을 맺어 갔다. 이윽고 나비매듭을 마친 후, 할머니 목 둘레에 맞게 길이를 재어 남기고 양 끝엔 조그만 방울 매듭을 하여 끝맺음을 하였다.
˝할머니, 나비가 나는 것 보세요.˝
송이는 나비 목걸이를 이리저리 흔들어 나는 시늉을 해 보이다가 할머니 목에 걸었다. 할머니는 송이의 왼손가락을 만지시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할머니의 가슴에는 늘 나비가 찰랑거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하고 열흘이 못되어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말았다. 할머니의 두 손엔 목걸이가 꼬옥 쥐어 있었다.
햇빛이 가만히 내려앉은 언덕 할머니의 무덤 가엔 작달막한 키의 노란 민들레와 보랏빛 엉겅퀴가 다복했다.
그 노란 민들레 위로 삼색 나비가 나폴 거리며 날아갔다.
송이는 다시는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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