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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자유로이
6.
나는 오랫동안 헤매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잔뜩 낀 미치광이 형상을 빌어 안내자가 내게 찾아왔고, 절망에 빠진 나는 이제 그 애의 손에 횃불을 넘겨주고 있었다. 그 애가 이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 곳에서 우리를 끌어내 주기를 바라면서.
불러도 메이 아줌마가 나타나지 않았던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오브 아저씨가 서글프게 한쪽 길로 떠나고, 나는 나대로 참담하게 나머지 한쪽 길로 걸어간 그 다음 날, 국어 시간에 배운 ´대단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날의 일을 계기로 우리의 삶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했고, 우리 세 사람은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었으며, 동화책에 나오는 도로시와 허수아비와 겁쟁이 사자처럼 진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 에메랄드 시에서 오브 아저씨의 영혼에 안식을 찾아 줄 뭔가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메이 아줌마가 오지 않았던 그 다음 날 아침, 오브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나는 악몽을 꾸다가 불현듯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주 중요한 뭔가를 놓쳐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물론 그 중 하나는 통학 버스였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아저씨가 웬일인지 5시 반에 나를 깨워 주지 않았다. 나는 7시에 일어났지만, 학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하느님은 내가 집에 남아 있도록 일부러 늦잠을 재우셨는지도 모른다. 그 날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트레일러 맞은편 끝에 있는 오브 아저씨의 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이 문을 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고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저씨가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면서, 이미 마음 속으로는 아저씨가 누울 관과 아저씨가 맬 마지막 넥타이까지 골라 놓았을 정도였다. 오늘 아침이 바로 그 날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서머냐?˝
아저씨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해서 침대에 누운 아저씨의 앙상한 몸만 어렴풋이 보일 따름이었다. 아저씨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아저씨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저씨?˝
아저씨가 손을 들어 내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 손을 자꾸만, 자꾸만 도닥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아저씨의 얼굴이 잿빛으로 보였다. 아저씨는 꼭 의학 실습실에 뉜 가엾은 희생양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듯한 침침한 방 안에서, 아저씨가 흘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늦잠을 잤구나.˝
아저씨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단 하루도 늦잠을 자지 않았고,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침 해처럼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누구나 늦잠을 자는걸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더 주무시고 싶으면 계속 주무세요. 저는 가서 커피 끓일 게요. 그리고 일어나시면 달걀 프라이랑 코코아도 만들어 드릴게요.˝
오브 아저씨는 말리지 않았다. 창피해서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나는 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우리한테 서로의 모습을 글로 써 보라고 했다. 그 글들을 반 아이들에게 읽어 주며 누구를 그렸는지 알아맞히게 하겠다면서.
선생님이 읽은 글들 가운데에는 옷이나 머리 모양이 궁상맞게 그려진 점으로 보아 몹시 불우한 어린이라고 짐작되는 여자아이에 대한 글이 있었다. 반 아이들은 그 애가 누구인지 다 안다는 표정들이었다. 오직 그 글의 주인공만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그 때만큼 내가 사정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한 순간도 없었다. 그 글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아니 그 글을 쓴 아이의 눈에 비친 나를 깨닫는 순간, 나는 한시라도 빨리 든든한 아줌마와 아저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내 방이라는 안식처에 틀어박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틈에 앉아 있어야 했다. 나를 훤히 드러내놓고서.
혼자 있고 싶은 아저씨의 심정, 이해가 간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학교에 전화를 걸어 결석하겠다고 한 다음, 커피를 끓였다. 그 날 아침 낡은 56번 버스는 정류장에서 평소보다 몇 분 더 오래 서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외투를 대충 걸친 채 교과서들을 떨어뜨리며 언덕을 넘어 헐레벌떡 뛰어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 날 기다려 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집에 가정 의학책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책에는 아저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는 메이 아줌마가 보던 스폭 박사의 「유아와 어린이 건강」이라는 낡은 책 한 권뿐이었다. 아줌마는 내가 어렸을 때 토할 적마다 그 책을 펼쳐 보곤 했다. 하지만 그 책을 뒤져 봤자, 부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노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말도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혹시 운이 좋으면 거기 나오는 아트 울린 박사가 슬픔에 지쳐 늦잠을 자는 노인을 치료할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에 매달려서 말이다. 하지만 그 날 아침의 주제는 여드름이었고(클리터스가 그걸 못 본 게 안타까웠다.) 그러니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상식밖에 기댈 데가 없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따져 보니 내 안에서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서 귀를 막았다. 하지만 9시쯤 되자 나는 아저씨가 단순히 실수로 늦잠을 잔 게 아니라 마음이 깊이 지쳐서 늦잠을 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메이 아줌마에 대한 기다림에 지치고, 슬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데 지쳤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의 관계도 끝내 버렸는지 모른다.
얼마 안 있어 오브 아저씨가 발을 질질 끌며 방에서 나왔다. 아저씨는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귀찮은지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냉기가 내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금방이라도 요양원이나 무덤에 들어갈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저씨를 죽이고 싶을 만큼 너무도 화가 났다. 아저씨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아침을 차리는 동안, 아저씨는 코코아를 마시며 현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5시 45분에 아침을 먹는데, 메이 아줌마는 항상 푸짐하고 따끈따끈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오브 아저씨는 나한테 시리얼과 토스트를 차려 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직접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식탁에 앉아서 먹기 시작하자, 서먹했던 분위기도 풀려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예전에 아저씨와 내가 흥미로워했던 얘깃거리들을 열심히 찾았다. 개를 키우는 게 어떨까요? 읍내 철물점 총각은 술에 취한 거예요, 아니면 원래 말을 더듬는 거예요? 새 봄에는 우리도 ´잡초 귀신´ 같은 제초제를 하나 사서 그 고물 자동차 주위에 난 잡초들을 깨끗이 없애 버리면 좋겠죠?
하지만 잡초 귀신이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얘기할 즈음, 아저씨는 반쯤 남긴 아침식사를 옆에다 밀어 놓고는 슬픈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가 말했다.
˝서머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뭘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집안 살림을 전혀 모르잖니. 진작에 배워 뒀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고, 그러니 이 집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나.˝
아저씨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살피는 일을. 트레일러야 내버려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도 가만 내버려두면 알아서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저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힘겹게 침을 삼키더니,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있었으면 네가 네 일을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아가야, 우린 널 우리 손으로 잘 키우려고 여기로 데려왔어. 그 사람은 네가 바로 이 곳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랐지. 나 같은 늙은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니. 그 사람이 가 버리고 나니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잖니?˝
이상하고 뜻밖이긴 하지만, 아저씨의 그 말을 듣자 나는 넋이라도 나갈 만큼 기뻤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저씨가 우리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안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만일 아저씨가 늦잠을 자고 나서 하루 종일 잠옷바람으로 앉아 미안하다는 변명만 되풀이했다면, 아니 더 심하게는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면, 나는 아저씨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자신이 생활을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희망이 생겼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새 바람개비들을 만들어 보세요. 잠시 다른 일에 열중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살림은 제가 할 수 있어요. 아저씨가 기운을 차리실 때까지 제가 집안을 꾸려 나갈게요.˝
하지만 아저씨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이 늙은이의 머릿속에는 만들고 싶은 바람개비가 하나도 없단다, 아가야.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단다. 우리를 두고 떠난 그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만 하게 돼. 밭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그 가엾은 사람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꼭 그 날처럼 내 심장이 얼어붙는단다. 다 끝난 일이건만, 난 그렇게 되지 않는구나.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어. 내 속엔 이제 바람개비가 없단다. 그 가엾은 할망구 생각밖에 없다구. 이 세상 누구도, 어떤 것도 내 생각을 메이한테서 떼놓지 못할 게다. 나도 그러기 싫단다. 어쨌든 나는 언제까지나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의 팔을 어루만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저씨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저씨한테도, 나한테도 해답을 말해 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저씨한테 코코아를 한잔 더 따라 주고, 내 잔에도 커피를 더 따르고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3시 25분에 클리터스 언더우드가 그 여행 가방을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나타났고, 우리는 마침내 오즈의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7.
˝무슨 교회냐?˝
오브 아저씨는 클리터스의 어깨 너머로 그 여행 가방에서 나온 신문 기사 쪼가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심령 교회요. 글렌 메도즈 심령 교회라고 씌어 있네요. 퍼트넘 군에 있대요.˝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안락의자에 기대어 혹시 클리터스가 사람 행세를 하는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아저씨나 내가 온갖 가지 도넛을 다 준다고 해도 절대로 교회에 다니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아저씨한테 그 기사를 건네 주면서 계속 떠들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죽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대요. 교회란 모름지기 그런 일을 해야 한대요. 이 세상이랑 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일을요. 이 교회는 보통 교회랑 달라요. 작년에 그 여자 목사님의 사진이 맘에 들어서 그 기사를 오려 놓았죠. ´미리엄 B. 영 목사, 광활한 세계 속의 작은 매개자´. 멋지지 않아요? 나는 나중에 크면 꼭 신문 기사에다 제목을 달아보고 싶어요. 아무튼 이 목사님은 박쥐를 애완 동물로 키운다고 ´박쥐 여인´이라고도 한대요. 또 맨날 흰옷만 입고 있어서 ´흰옷의 여인´이라고도 하고요.
클리터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때맞춰 나타난 여인´이라고 하고 싶어요. 정말 딱 때맞춰 나타났잖아요. 더 늦기 전에 우리를 메이 아줌마한테 데려다 주려고 때맞춰서 내 가방 속에 나타난 거라고요.˝
아저씨는 웃지 않았다. 아저씨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이 새로운 제안이 지난번 제안처럼 터무니없다고 판단하고, 만약 클리터스가 퍼트넘 군에 가자고 한다면 파인빌 요양원에 가서 검사나 받아 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래, 그 말을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단어를 고르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퍼트넘 군까지 가는 데 차로 얼마나 걸리지?˝
나는 버럭 소리쳤다.
˝아저씨! 지금 제 정신이세요? 박쥐 여인인지 뭔지 만나러 퍼트넘 군까지 갈 순 없어요!˝
오브 아저씨와 클리터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물었다.
˝가면 왜 안 되는데? 학교 쉬는 날에 달리 할 일이라도 있니?˝
˝학교 쉬는 날에요? 학교 쉬는 날, 퍼트넘 군에 간다고요? 심령술 교회에요?˝
˝그냥 심령 교회야.˝
클리터스가 내 말을 고쳐 주었다.
오브 아저씨가 클리터스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 못 갈 거 없지. 아무튼 한두 가지라도 알 수 있을지 모르잖니?˝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고, 적어도 얼마간은 아저씨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셋이서 박쥐를 키운다는 그 여자 목사를 찾아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바보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저씨가 웃음을 되찾고 희망을 품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아저씨를 따라나서야 했다.
˝세 시간요.˝
클리터스가 대답했다.
˝뭐라고?˝
˝거기 가는 데 세 시간쯤 걸릴 거라고요. 미리 지도를 찾아봤거든요. 길은 쉬워요. 고속도로만 죽 따라가면 되니까요. 돌아오는 길에 찰스턴 시에 들러서, 주 의사당에도 가볼 수 있어요. 난 아직 한 번도 주 의사당에 안 가 봤거든요. 하긴 롤리 군 중부랑 파예트 군 중부 지역말고는 가 본 데가 없으니까. 겨우 이 정도밖에 못 가 봐서야, 르네상스 인간이 되긴 힘들지.˝
˝무슨 인간?˝
오브 아저씨가 물었다.
˝르네상스 인간요. 역사 시간에 배웠어요. 옛날에 유럽에는 르네상스 인간이라고 하는 팔방미인들이 있었대요.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연주하고, 시도 쓰는 사람들요. 그러면서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도 토론했대요. 그러니까 여러 분야에 대해 많이 아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르네상스 인간이라고 불렀대요.˝
클리터스는 조금 뻐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훈련하고 있어요. 딥 워터에서도 르네상스 인간이 좀 나와야 되지 않겠어요?˝
˝하하!˝
오브 아저씨는 웃으면서 클리터스의 무릎을 툭 쳤다.
˝이 녀석, 파트넘에 다녀오면 렌터세앙스 인간이 되었다고 으스대겠구나!˝
두 사람은 즐겁게 웃어댔지만,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냉장고로 가서 콜라를 꺼냈다. 클리터스가 금방 돌아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애는 저녁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그러다가 아저씨와 내가 땅콩 버터로 저녁을 때울 게 분명해 보이자, 그제야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클리터스는 내가 왜 그 날 결석했는지 묻지 않았다. 오브 아저씨의 잠옷 차림에 대해서도 절대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분명히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메이 아줌마도 그 애를 좋아했을 것이다. 오브 아저씨처럼 ´기발하기 그지없는´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겠지. 아줌마는 언제나 특이한 사람들, 얼핏 보아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천국에서도 아줌마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천국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곳일 테니까. 땅 위에서처럼 꼭 정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적어도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복 중 하나일 것이다.
오브 아저씨와 나는 토요일에 클리터스네 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을 만나서, 다음 주에 퍼트넘 군에 갈 때 클리터스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곧 우리 셋은 아저씨의 밸리언트 자동차를 타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동방 박사들처럼 메이 아줌마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줄 별을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나는 두렵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내게 중요한 것들을 잃었기에, 퍼트넘 군에 가서 더 이상 뭔가를 잃고 싶지는 않다.
클리터스는 항상 희망과 확신이 넘치는 것 같다. 그 애는 자기가 아저씨 문제를 풀 열쇠를 발견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열쇠를 집으러 고속도로를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박쥐 여인이 사기꾼이라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것인가. 메이 아줌마가 우리 곁에 있지 않겠다고 하거나, 아예 퍼트넘 군에 나타나지 않거나, 아저씨가 애타고 바라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곳 딥 워터의 집으로 돌아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때쯤이면 우리는 너무나 멀리,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 있을 테니까. 다시는 가정을 이룰 수 없을 만큼, 멀리.
클리터스는 이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8.
메이 아줌마는 박쥐를 좋아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그 여인도 박쥐를 좋아한다고 하니, 어쩌면 좋은 징조일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툭하면 트레일러 안에 박쥐가 들어오곤 했다. 박쥐가 겨울잠을 자는 시기에는 거의 일 주일에 한 마리씩 들어왔다.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거실에서 박쥐의 보드라운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낯선 기분을 어떤 면에서는 즐기면서 몇 분간 그대로 누워 있곤 했다. 그리고는 칭얼대면서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한테 가려고 일어났다. 그러려면 거실을 지나야 했는데, 트레일러의 천장이 낮아서 박쥐와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 짐승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의 품에서 자라고 있었으니까.
나는 박쥐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나중에 좀더 자라서 사람들이 대부분 박쥐라면 기겁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두려움이란 우리를 키워 주는 사람한테서 물려받는 게 아닐까.
메이 아줌마는 제일 먼저 거실에 나와, 길 잃은 박쥐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가엾은 것. 얼마나 놀랐을까. 이런 고물 트레일러 같은데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그러면 잠시 후에 오브 아저씨가 눈을 비비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와 잠을 깨려고 일부러 심한 욕을 몇 마디 했다. 아저씨는, 욕을 하는 것은 독한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욕을 하면 몸이 풀리면서 몸 속의 기관이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저씨와 아줌마는 번갈아 가며 머리 주위로 날아다니는 박쥐에게 담요를 덮어 씌우려고 애썼고, 얼마 안 있어 둘 중 한 사람이 담요를 싸들고 나가 그 보드랍고 새까만 짐승이 어둠 속으로 자유롭게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번은 메이 아줌마가 실수로 박쥐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박쥐가 앉아서 자고 있는 창문을 확 열어젖히는 바람에 박쥐가 창문 틈에 끼이고 말았다.
아줌마는 그 박쥐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상자에다 따뜻한 수건을 폭신하게 깔고 그 위에 박쥐를 뉘고는, 바나나 조각이나 아저씨가 뒤뜰에서 파낸 죽은 벌레들을 접시에 담아 넣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일 주일 동안 우리 세 사람은 번갈아 박쥐한테 가서 박쥐가 뭐라도 먹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 보니, 박쥐는 접시로 다가가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바나나 조각을 핥았다. 그 박쥐는 너무도 조그맣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날개 달린 작은 짐승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박쥐는 죽어 있었고, 결국 메이 아줌마의 밭에 묻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오브 아저씨는 마침내 사람을 불러다가 트레일러를 점검했고, 박쥐들이 난방 파이프를 통해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철조망으로 파이프들을 죄다 막았다. 그러고 나자 더 이상 길을 잃거나 무리와 떨어져 집 안에 들어온 박쥐들을 놓아주거나 땅에 묻는 일은 없어졌다.
그 주에 오브 아저씨는 한 번도 늦잠을 자지 않았다. 내가 학교 가기 전에 시리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저씨는 식탁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꼼꼼히 들여다보거나 미국 자동차협회에서 나온 여행 안내서에서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하이오 편을 훑어보았다. 나는 아저씨에게 뭘 찾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저씨가 찾는 건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클리터스네 현관 앞에 서서 덜덜 떨며 문을 두드렸다.
클리터스네 집은 조그만 고동색 집으로, 다른 집의 차고 만했다. 그 집은 길가에서 꽤 떨어진 소나무숲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어, 꼬마애들이 보면 금발머리 꼬마 아가씨가 곰 세 마리를 만났다는 그 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2월의 찬바람 속에서 그 집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옹색해 보여, 나는 왠지 담요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브 아저씨는 옛날에 그 집에 살던 아저씨하고 낚시를 자주 다녔다는 얘기만 했을 뿐, 집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작고 멋진 집이라고만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 곳에 클리터스가 서 있었다. 순간 나는 이 아이가 정말로 지난 몇 달 동안 그 낡아빠진 가방을 들고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아이인가 싶었다. 그 아이는 내가 알던 아이와는 전혀 달랐고, 그 집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나는 클리터스가 바로 이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다니 이상하기도 하다. 얼굴만 보고도 어떤 사람이 지극히 안정감이 있으며 힘과 애정이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니. 그럴 때면 갑자기 그 사람이 무척 편해진다.
클리터스는 집에 있었고, 그래서 괴짜같이 굴지 않아도 되었다. 늘 그렇듯 헤벌쭉 웃는 클리터스를 보니, 난생 처음으로 그 애가 반갑게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클리터스가 옆으로 비켜나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클리터스의 부모님이 서 있었다.
나는 그분들이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과 만나는 걸 서먹해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두 분은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클리터스네 어머니는 꼭 말린 사과처럼 보였다. 자그맣고 홀쭉하고 바싹 메마른 모습이 꼭 그 집을 닮았지만, 환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아줌마와 악수를 할 때, 가냘프고 차가운 손가락들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삭정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줌마가 금방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언제나 금방 떠나 버릴 사람들만 만나는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안녕, 서머. 드디어 만나다니 정말 반갑구나.˝
아줌마가 상냥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는 아줌마의 깍듯한 인사에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오브 아저씨와 악수를 나누다가, 아저씨가 건넨 말에 크게 웃었다. 덕분에 아저씨도 거리낌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그 집 식구들과 함께 왁자하게 웃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기다란 잿빛 수염을 기른 분으로, 조그마한 몸집에 허리가 구부정했다. 마치 꼬마 도깨비처럼. 게다가 아저씨의 뺨은 발그레한 장밋빛이었다. 아저씨는 악수 대신 한 팔로 나를 꼬옥 감싸안아 주며 말했다.
˝우리는 저 녀석이 널 집에 데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단다. 크리스마스 때부터 저놈을 졸랐지.˝
나는 클리터스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머쓱하게 클리터스를 바라보았다. 클리터스가 왜 나를 이 집에 데려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클리터스네 부모님 때문인 줄 만 알았다. 그 애가 자기 부모님을 부끄러워해서 내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상냥한 두 분을 만나고 보니, 클리터스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클리터스는 나라는 아이를, 쌀쌀맞은 내 태도를 부끄러워했고, 자신의 특이한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 드리기 싫었던 것이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부모님한테 자기를 벌레 보듯 하는 나를 차마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집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좁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클리터스네 엄마가 부엌에서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왔다.
오브 아저씨는 미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저, 말씀 들으셨겠지만, 다음 주에 클리터스를 데리고 어디에 잠깐 다녀왔으면 합니다.˝
클리터스의 부모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자세한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저씨는 물론 준비를 해 왔을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실은 작년 8월에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서머가 고생이 말이 아니죠.˝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더니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가엾은 것. 어쩌다 시간이 남아도,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지 뭡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데리고 잠시 여행이나 다녀올까 생각했죠.˝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오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내 눈을 피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퍼트넘 군에 옛 친구가 살고 있어서. 거길 가볼까 합니다만…….˝
퍼트넘 군에 간다는 것만큼은 맞는 얘기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찰스턴 시에 들러서 주 의사당도 구경하고요. 클리터스가 거기 한 번 가 보고 싶다더군요.˝
클리터스네 엄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브 아저씨는 계속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클리터스가 세상 일에 워낙 호기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클리터스도 의사당을 구경하고 싶어할 것 같더군요. 또 서머랑 클리터스는 아주 친하답니다. 거의 단짝이라 할 수 있으니까, 클리터스를 데려가면 서머한테도 좋을 거예요. 서머가 다른 생각을 털어 버리게 해 줄 테니까요.˝
아저씨가 나를 무척 안쓰럽게 바라보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저씨를 마주보았다. 클리터스의 부모님은 오죽하겠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자기들 앞에 있는 이 가엾은 아이를 위로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클리터스는 오브 아저씨가 ˝가엾은 것……˝ 어쩌고 할 때부터 입이 딱 벌어진 채 아저씨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클리터스 같은 아이가 이렇게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클리터스도 나처럼 아저씨가 박쥐 여인과 퍼트넘 군에 가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애는 오브 아저씨가 얼마나 능수 능란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아저씨를 숭배하던 클리터스가 이제 10점쯤 더 얹어서 아저씨를 우러러볼 게 뻔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오히려 우리 아이가 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지요. 저 애가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줄은 압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허리가 꼬부라졌고, 집사람은 오른쪽 눈이 거의 장님이라서 예전처럼 돌아다니지 못한답니다.˝
나는 클리터스네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클리터스도 나와 같은 심정인가 하고 그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클리터스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었다. 더없이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벌써 클리터스네 아버지를 파예트빌에 모시고 가서 척추 지압 요법을 받게 해 드리고, 클리터스네 엄마의 오른쪽 눈을 고쳐 줄 약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분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막을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클리터스네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참 안됐구나, 아가야. 하느님께서 소중한 사람을 데려 가시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법이지.˝
갑자기 목이 메어 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졌다. 나는 울음이 터질까 봐 메이 아줌마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럭저럭 화제는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갔고, 오브 아저씨와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날씨 이야기며 도로에 세우고 있는 육교 이야기 따위를 주고받았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 기계공이었다며, 그걸 증명해 보이듯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간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오브 아저씨가 이에 질세라 2차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다친 곳을 보여 주려고 바지를 내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저씨는 허벅지에 일본군이 쏜 유산탄에 맞은 흉터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저씨는 냉정을 잃지 않았고, 바지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가 내온 커피와 생강빵은 그 때까지 먹어 본 것 가운데 최고로 맛있었다. 아줌마는 나더러 우유를 마시라고 했지만, 커피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열두 살짜리 여자애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그러자 클리터스는 내가 다 커피 때문에 고집불통이 되었으며, 작가들은 기나긴 소설을 써 나가는 동안 기댈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싸구려 위스키보다는 커피가 낫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줌마는 내게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빵을 먹으면서 집 안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집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가구들도 소박하고 전등도 수수했다. 벽에 걸린 장식품들도 몇 개 없었다. 그 가운데는 아줌마 아저씨가 어린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니까, 클리터스와 나의 차이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는 클리터스. 모든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비록 늙고 허약했지만, 클리터스가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그 아이를 꼭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클리터스는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보살펴 주리란 것을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집에 있는 동안 클리터스는 낡은 여행 가방도 꺼내지 않았고, 평소처럼 우리를 웃기려고 허풍을 떨거나 소문거리들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애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 애는 조금 다른 식으로 현명한 아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물에 빠졌다 살아난 일이 그 애한테는 가장 근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클리터스처럼 메이 아줌마도 천국에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오브 아저씨와 나는 따끈따끈한 빵과 커피가 넉넉하던 클리터스네 집을 나섰다. 그 집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도 흐뭇하고 평온한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는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에게 거짓말로 둘러댄 일을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퍼트넘 군으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9.
˝그걸 다 가져가겠다고?˝
클리터스는 왼손에는 음식 보따리를, 오른손에는 그 유명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글쎄 내 캐딜락 승용차도 같이 가져올까 했는데, 그건 봉투에 안 들어가더라구.˝
오브 아저씨가 트렁크를 쾅 닫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만들 떠들고, 어서 차에 타거라. 저승 세계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오브 아저씨와 나는 밸리언트 자동차의 앞자리에 탔고(클리터스에게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클리터스는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장 가방에서 잡지들을 하나 둘 꺼냈다.
내가 얼핏 고개를 돌려 잡지 이름들을 보고는 기가 막힌 듯이 노려보자, 그 애는 이렇게 설명했다.
˝크리지즈 할로에 사는 친군데…… 그 애가 준 거야. 걔네 집 뒷간에 십 년도 더 있던 거래.˝
내가 ´욱´하고 구역질을 하려는데,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내 평생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곳은 우리 집 화장실이란다. 저속한 책들은 아니었어. 우리 아버지는 화장실에다 자동차 공학, 낚시, 남북전쟁에 관한 책들을 갖다 놓으셨지. 그것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어. 덕분에 나는 설사가 나면 아주 신이 났단다.˝
그렇게 우리는 퍼트넘 군으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클리터스와 오브 아저씨처럼 말 많은 두 사람이 한 차에 탔으니 가는 동안 내내 몹시 시끄러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딥 워터를 벗어나 간선 도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우리 셋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차 안에는 나사가 풀린 라디오 부품이 덜그덕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차 안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거의 슬픔에 가까웠지만, 슬픔은 아니었다. 슬픔보다 더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오브 아저씨의 침묵은 메이 아줌마 때문이었다. 아마 아저씨는 퍼트넘 군으로 가는 길 내내 아줌마에게 돌아와 달라고, 아줌마 없는 세상을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일러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아저씨는 활기차 보였지만, 나는 아저씨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클리터스. 내가 두세 번쯤 돌아보았는데, 그 때마다 그 애는 산꼭대기에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있기라도 한 듯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티없고 맑아서 꼭 아기 같았다. 저렇게 창 밖을 바라보면서 저 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 자신의 침묵은 평화에서 비롯되었다.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내 곁에는 오브 아저씨가 든든하게 앉아 있었다. 뒷자리에는 클리터스가 흐뭇해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일도 없이, 마음이 상할 일도 없이 우리는 앞으로 세 시간을 꼬박 그렇게 갈 것이다.
나는 창 밖에 늘어선 산들과 그 산에 지어진 조그만 집들을 바라보았다. 마당에 뒹구는 진흙투성이 장난감들, 녹아내리는 눈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따스함과 행복을 주는 굴뚝 연기. 질척질척한 마당에서 개집에 묶인 채 자고 있는 개들.
나는 아무에게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이 고요는 내게 내려진 깊고 깊은 잠과도 같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도로 표지판에서 찰스턴이 가까워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클리터스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처음에는 주유소를 찾아 잠깐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리터스가 주 의사당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들떠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리터스가 아저씨에게 말했다.
˝의사당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우리 주 역사책에 나오는 흑백 사진으로 밖에는요. 그것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지만요. 그 둥그런 황금 지붕 아래서 높은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있겠죠. 그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웨스트버지니아에는 의사당이 있다구요.˝
클리터스는 고개를 흔들고는, 차창 밖으로 막 지나가고 있는 뒤퐁 회사 공장을 바라보았다.
클리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날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 의사당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바로 그 순간 나는 클리터스가 그런 일을 하는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파예트 군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높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중요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찰스턴으로 차를 몰고 가는 광경이.
그러고 나서 클리터스가 비엔나 소시지 통조림과 <래프인>의 재방송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초록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씌어진 도로 표지판들은, 조급한 우리의 마음을 놀리듯이 ´의사당 가는 길´까지 아직 멀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콜럼버스가 대륙을 찾듯 눈을 부릅뜨고 그 둥근 금박 지붕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우리 세 사람 모두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의사당 건물은 마치 폭이 넓은 치마를 입은 근엄한 여왕처럼 잿빛 콘크리트를 펼치고 서 있었고, 거대한 둥근 지붕은 아침 햇살 속에서 순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건물이 우리 주의 의사당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폐광 지역에 사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햇빛 속에 굳건히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엄하고도 우아한 존재였다.
오브 아저씨는 운전을 하는 틈틈이 의사당 구경을 하면서 큰 도로에서 벗어났다.
˝정말 아름답구나.˝
아저씨는 세 번째로 갓길에 들어섰다.
˝아름답고말고요.˝
클리터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클리터스는 눈앞의 광경을 삼켜 버리듯이, 의사당이 지나가기 전에 꿀꺽꿀꺽 빨리 삼켜 버릴 듯이 보였고, 그러는 사이에 차는 의사당 앞을 지나 64번 주간 도로로 향했다.
나는 클리터스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어쩌면 영원토록 그 곳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쥐 여인쯤은 까맣게 잊고서.
오브 아저씨도 눈치를 챈 듯했다.
˝걱정 마라, 얘들아. 내일 돌아오는 길에 저기 들러서, 하루 종일 구경하자꾸나. 역사 기록들도 보고,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특산 공예품들도 보자꾸나. 그러고 나서는 의사당 커피점에 들어가서, 상원의원들이랑 같이 점심도 먹는 거야. 어쩌면 주지사님도 만날지 몰라. 그러면 나랑 클리터스는 주지사님한테 우리 주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이렇게 해결하시라고 일러 줄 테다.˝
클리터스는 천국처럼 여기는 의사당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고, 그 동안 자동차는 그 멋진 황금빛 지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려갔다. 딥 워터와 그 곳에서 지내던 우리를 뒤로 하고, 파트넘 군과 새로운 우리를 향하여. 우리는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는 세 손님이었다.
10.
˝죄송합니다만, 미리엄 영 목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글렌 메도즈 심령 교회였던 조그만 청색 건물 문앞에 서서,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우리 세 사람은 그 목사와 함께 캄캄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교회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었다. 줄곧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고 전화번호부를 찾아 위치를 알아내서는, 아침 10시에 영 목사의 교회 문 앞에 도착했다. 아니, 한때 영 목사의 교회였던 곳에.
교회라는 것을 알려 주는 푯말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브 아저씨는 심령 교회 같은 곳은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느긋하게 차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이런 곳은 새로 오는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맞이하는 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클리터스도 어차피 여기에 찾아올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교회가 있는 곳을 아니까 굳이 푯말이 필요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로는 언제나 실망할 때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돌아가셨는데요?˝
클리터스는 바보처럼 물었다.
다람쥐를 닮은 그 남자는 우리의 바보에게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분은 숨을 거두셨단다. 작년 6월에 심령의 나라로 가셨지.˝
우리 세 사람은 말문이 막힌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는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 죽음을 뛰어넘어 우리와 메이 아줌마 사이에 가로놓인 장애물을 뚫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죽음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파트넘 군에 왔지만, 죽음은 이미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는 예의도 잊어버리고 당돌하게 물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었다. 나는 이 다람쥐 사내한테 너무 화가 나서 싸움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 사내를 쥐어짜면 박쥐 여인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 사람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 사람은 다시,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목사님의 조카란다. 그분이 하시던 일을 정리하느라 여기서 당분간 살고 있지.˝
˝아.˝
나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클리터스가 물었다.
˝박쥐들은 다 어디 갔어요?˝
그 다람쥐 사내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유롭게 날아갔단다. 영 목사님처럼.˝
그러는 동안 오브 아저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우리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영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교회 현관 옆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저씨가 당혹스러워하며 해결책을 찾으러 할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클리터스와 내가 ´광활한 세계 속의 작은 매개자´가 떠나 버린 이 교회 앞에서 공연한 질문만 하다가 말문이 막혀 서 있자, 오브 아저씨는 다시 돌아섰다. 돌아서서 그 남자한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목사님이 우리 집사람을 만나게 해 줄까 하고 왔소이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아저씨가 그토록 간절히 찾았던 목사의 조카라는 사람은 아저씨의 상심한 얼굴에서 쓰라린 고통을 읽고는, 아저씨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말했다.
˝정말 안타깝군요. 하지만 저한테는 우리 이모님 같은 영적인 능력이 없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다만 시손비에 사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긴 한데, 혹시 그 사람이라면…….˝
하지만 아저씨는 손을 치켜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우리는 이 곳으로 인도받아 왔으니, 내 기대도 여기서 접어야지요. 망령 든 늙은이처럼 심령술사를 찾는다고 온 주를 돌아다닐 순 없소.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요.˝
클리터스와 나는 서로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며 빤히 마주 보았다.
마침내 클리터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희한테 줄 만한 거 없으세요? 그 목사님이 교회에서 쓰시던 거라면 뭐든지 괜찮아요.˝
그래, 그것은 클리터스다운 생각이었다. 얻을 만한 물건이나 손에 쥘 수 있는 물건, 그 비닐 가방에 간직할 수 있는 물건을 바라는 것. 클리터스는 언제나 뭔가를 모으고 싶어하니까.
목사의 조카가 말했다.
˝글쎄다. 목사님이 새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던 안내장이 있긴 한데. 그거라도 가져갈래?˝
클리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의 조카는 오브 아저씨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찾는 동안 잠시 안으로 들어가시죠. 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핏기 하나 없는 아저씨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아저씨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클리터스가 그 다람쥐 사내한테 안내 책자를 받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 남자는 접은 종이를 한 장 들고 다시 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나중에 혹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러고 나자 우리의 모든 희망이었던 그 교회의 문이 닫히고, 우리는 다시 우리만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묵묵히 자동차로 걸어가서는, 한동안 잠자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오브 아저씨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만 기다렸다. 우리는 읍내에 있는 모텔에다 방까지 미리 잡아 놓았던 참이다. 그리고 다음 날, 그러니까 목사님이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연결시켜 주고 만사가 잘 해결되고 난 다음 날에는 주 의사당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의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오전 11시였다. 길을 떠난 지 아직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버렸다. 우리 자신도 함께.
오브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그냥 집에 가는 게 좋겠구나, 얘들아.˝
아저씨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우리는 그 작은 청색 건물 안에 잠든 모든 영혼들한테서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클리터스도, 나도 말이 없었다. 우리가 나서서 해결하기엔 너무 조심스런 상황이라는 걸 그 애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우리는 침묵 속에서도 행복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암울한 정적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저씨의 표정은 참담했다. 나는 아저씨가 갓길에다 차를 세우고는 덜컥 숨을 거둘까 봐 겁이 났다. 클리터스는 심령 교회 안내문을 펴놓고 그것만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애써 삼키면서 제발 뭐라도 나타나서 아저씨와 나를 구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저씨가 정말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을 절실히 느꼈기에.
64번 주간 도로를 벗어나서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의사당 길´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들이 보였다. 표지판이 스쳐 지날 때마다 클리터스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의사당이 나타났다. 클리터스가 이다음에 꼭 결혼하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콘크리트 여왕이.
강변 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클리터스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클리터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일은 저것, 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의사당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클리터스를 거기에 데려다 줄 힘이 없었다.
우리는 도로 남쪽에 있는 다리를 향해 달렸다. 그 다리에 들어서서 강을 건너면 클리터스의 의사당과는 영영 안녕이다. 이대로 딥 워터에 돌아가면 텅 빈 트레일러와 살아갈 의지를 잃은 노인과, 낡아빠진 비닐 가방을 보물단지처럼 떠받드는 정신 나간 바보, 그리고 내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었던 그 금빛 지붕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앞만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의사당이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순간,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 미련을 뒤로 한 채 옛날 생활로 돌아가자고 체념한 순간,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자, 이 고물차를 돌려 볼까.˝
그리고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밸리언트 고물차를 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저 빛나는 성을 향하여. 내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클리터스는 뒷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클리터스는 물어 보기도 겁난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로 가긴 가는 거예요? 의사당 보러요?˝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점심때가 다 됐구나. 주지사님은 커피점에 계시겠지? 재미있는 사람이 들어오나 지켜보면서 말이야.˝
오브 아저씨는 어깨를 쫙 펴고, 조금은 느긋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주지사님을 실망시킬 수야 없지.˝
11.
메이 아줌마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천사였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천사로 되돌아간다고. 그러면 다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지상에 머무르고 싶어할까? 왜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이 곳에 머무르려 할까?
예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다.
메이 아줌마는 운이 좋았다. 아줌마는 오브 아저씨한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딱 한 번 마음 아프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천사가 되면 더 이상 아픔도 느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오브 아저씨. 아저씨는 한 번 아픔을 겪고 나서도 계속 아파해야 했다. 집 안 곳곳에서 메이 아줌마의 빈자리들을 느낄 때. 아줌마가 숨을 거둔 밭을 거닐 때. 그리고 아줌마의 자리를 덩그러니 남겨 둔 채 침대에서 혼자 잠들 때에도.
아저씨는 너무도 큰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겪고도 아저씨는 이 지상에, 바로 여기에 머무르기로 했다. 뜻밖에도 다시 살고 싶어했다. 나는 아저씨가 나 때문에 살고 싶어한다고 여기고 싶다. 나와 헤어지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어서라고.
우리가 파트넘 군을 떠나서 집으로 출발했던 그 날, 아저씨한테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죽은 영 목사의 교회를 떠나 웨스트버지니아 주 의사당의 콘크리트 계단에 오르기까지, 그 길 위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 아저씨에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되살려 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퍼트넘 군의 교회 문 앞에서 아저씨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지레 짐작하고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아저씨에게 일어났다. 아저씨가 우리 고물차를 의사당으로 돌린 것이다.
우리 셋은 의사당 바로 옆에 적당한 장소를 골라 차를 세우고는, 차에서 내려 마치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 곳에 처음 왔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푸근했고, 당연히 올 곳에 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클리터스는 뭐든지 만져 보고 싶어했다. 복도를 지날 때에도 벽에다 손을 살짝 대고 걸었다. 우리는 환한 진열장이 나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그리고 문마다 씌어 있는 이름을 읽어보았다. 안내서란 안내서도 다 모았다. 클리터스는 모든 사람을 다 안다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오브 아저씨는 줄곧 클리터스에게도 나에게도 마치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했다. 아저씨는 클리터스와 함께 박물관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클리터스의 어깨에 살짝 팔을 얹은 채 누렇게 변한 옛날 신문을 읽곤 했다. 내가 멋진 창문 앞에 서서 잔디밭에서 노는 비둘기와 다람쥐,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산책하는 예쁜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저씨는 내 곁에 와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처럼 내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의사당 커피점에 들어가서 혹시 주지사가 와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 날은 주지사가 다른 곳에 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에 와 있던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사람들은 으리으리한 사무실에서 가죽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려와 의사당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애타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나는 클리터스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았다. 뭔가에 희망을 걸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우리는 눈에 띄는 대로 의사당 건물의 구석구석까지 구경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있는 ´과학문화 회관´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모든 것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 회관의 선물 가게에서는 우리 주 사람들이 손수 만든 물건들을 팔았는데, 그것을 본 클리터스가 아저씨한테 바람개비를 가지고 와서 팔라고 했다. 아저씨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아저씨는 정원에 식물을 심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사람처럼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에는 바람개비들을 진열하며 그 분위기를 따져보는 듯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가게 문을 나서면서 아저씨는 클리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바람개비들을 진열할 곳이 필요하긴 하지만 여긴 아니구나.˝
우리는 상원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5시까지 있다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주차장으로 나가자 글렌 메도즈 여관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나는 클리터스에게 앞자리를 내어 주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무성한 잡초들 틈바구니에 앉아 있는 고물차를 비추었다. 오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지만, 외롭고 고통스러운 침묵은 아니었다. 그냥 피곤했다.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우리는 각자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오브 아저씨는 클리터스한테 우리 집 소파가 얼마나 잠자기 편한지 꼬드기고 있었다(아저씨는 클리터스네 부모님이 왜 일찍 왔냐고 물으면 곤란하니까, 클리터스더러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메이 아줌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뭔가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우리는 모두 엇, 하고 숨을 삼켰다. 너무나 소리 없이 날아와서 다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하지만 밝은 달빛 아래서 날개 그림자가 또렷이 드러났고, 우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가 ˝잠깐만!˝하고 소리치기도 전에, 올빼미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아줌마가 떠올랐다. 메이 아줌마가 생각났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했다. 그저 아줌마의 빈자리를 견디는 데 급급해서 지난 두 계절 동안 내 속에 차오르던 눈물을 안으로 삼켜왔다. 하지만 그 올빼미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이제 이 세상에서는 메이 아줌마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뼛속 깊이 와 닿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울고 또 울어도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오브 아저씨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클리터스가 열어 준 문을 지나 내가 꼬마 적에 수없이 그랬듯이 내 방에 데려다 주었다.
하도 많이 울어서 배와 목이 화끈거리고 욱씬거리는데도, 나는 침대에 공처럼 웅크린 채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도록 울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내가 울음으로 쏟아 내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나한테 불어넣어 주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속의 눈물이 다 빠져나가서 가뿐해질 때까지 나를 안고, 크고 튼튼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나는 아저씨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메이 아줌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줌마는 여기 있단다, 아가야.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단다.˝
나는 아저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저씨가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게 너무나 고마웠고, 트레일러 어딘가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클리터스도 고마웠다.
나는 눈을 감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가엾은 엄마와 메이 아줌마의 엄마 아빠, 그리고 사랑하는 메이 아줌마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내 마음에는 고요한 평온이 깃들었고, 나는 그분들을 생각하다가 어느덧 눈물도 마른 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아가야, 오브 아저씨와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무척 부끄럼을 탔단다. 네 커다란 눈동자는 마치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았지.
네가 나한테 필요한 아이란 걸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지.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아저씨를 뒷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했단다.
˝여보, 저 아이를 집으로 데려갑시다.˝
그래, 아저씨도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주눅이 들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너를 지켜보았다더구나. 우유를 다 마셨는데도 코니 프랜신한테 우유를 더 달라는 말을 못하더라고. 아저씨는 슬퍼하는 아이가 있으면 금방 알아본단다.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지.
˝오늘 당장 데리고 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네 짐을 꾸려서 너를 이 곳에 데려왔단다. 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더구나. 오하이오에 사는 우리 친척들 말이야.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누구도 부족한 점은 있게 마련이란다.
네가 왔을 때 처음 며칠 동안은 너한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단다. 기억나니? 내가 하루 종일 네 머리를 매만지고 빗기고 예쁜 리본을 매어 주던 일을. 나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키우는 게 평생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거야. 나는 하느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는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보다고 체념했단다. 하느님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차분히 기다리도록 하신 거야. 네가 태어나고, 네 가엾은 엄마가 숨을 거두고, 오브 아저씨가 우유 한 컵 더 달란 말도 못하는 너를 볼 때까지.
우리가 돈이 없어서 너한테 정말 필요한 것들을 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단다. 나는 머리가 동그란 인형들이 사는 커다란 플라스틱 집을 얼마나 사 주고 싶었는지 몰라. 기저귀에 오줌 싸는 큼직한 아기 인형도. 그리고 날마다 네게 분홍색과 노란색 옷을 입혀 주고 싶었단다. 왜, 찰스턴에 유리로 지어진 큰 상가 있잖니. 난 그 큰 백화점에 널 데리고 가서 꼬마 숙녀에게 어울리는 분홍색이랑 노란색 옷이며 장신구들을 몽땅 사주고 싶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가진 게 별로 없었어. 아저씨도 나도 그래서 몹시 속상했단다. 아저씨는 너한테 나무 인형을 만들어 주었지. 나는 너한테 예쁜 옷을 입히려고 날이면 날마다 굿윌 가게를 이 잡듯이 뒤졌고.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우리도 잘 안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어느 날 밤늦게 너랑 나랑 밖에 나간 적이 있었지? 왜 그랬었냐면…… 네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면서 같이 나가 보자고 그랬지. 기억나니? 그래서 우리는 외투를 걸치고 밖에 나갔어. 그 날 밤은 유난히 탐스런 보름달이 환히 떠서 손전등도 필요 없었지. 길 잃은 새끼 고양이가 있나 싶어서 헛간 쪽으로 가는데, 컴컴한 헛간에서 갑자기 커다란 올빼미가 우리 쪽으로 나라오지 뭐냐. 세상에, 그렇게 큰 짐승이 어쩌면 소리 하나 없이 날아왔을까. 너하고 나는 소리도 내지 못했지. 그냥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동상처럼 빳빳이 굳어서 그놈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만 바라봤어.
그 때까지 나는 올빼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그런데 네가 우리 집에 온 지 2, 3주도 되지 않아서, 올빼미가 나를 찾아온 거야. 나는 네가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일만 해줄 줄 알았단다. 그렇게 좋은 일들만 가져다 주리라는 걸.
한때는 왜 하느님이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나는 집 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저씨는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3, 40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쉽게 해줄 수 있었던 일들도 이제는 해 주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답이 떠오르더구나.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길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았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단다.
나는 아저씨한테 당신은 나의 달님이고 해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 그리고 서머, 우리 사랑스런 아기가 우리한테 왔을 때, 너는 내게 빛나는 별님이 되어 주었단다.
너는 내가 만난 꼬마 숙녀들 중에서 최고로 멋진 아이란다.
12.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눈부신 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제 곧 메이 아줌마가 심은 수선화가 필 것이다.
부엌에서 커피 향기와 베이컨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엌에 가 보니, 클리터스가 아침을 차리면서 신문에서 읽었다며 몸에 저절로 불이 붙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오브 아저씨는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에다 달걀을 깨어 넣으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믿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내가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인사하자, 두 사람도 환하게 웃으며 잘 잤냐고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든 걸 잊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달걀과 베이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셋이서 할 일이 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바람개비들을 집 밖으로 날랐다.
우리는 메이 아줌마가 토마토 줄기를 묶었던 막대기와 널조각들을 있는 대로 모아다가, 텅 빈 밭에 꿈과 천둥과 불의 바람개비들을 가득 세웠다. 그 중에는 메이 아줌마의 영혼인 눈부시게 새하얀 바람개비 ´메이´도 있었다.
갑자기 클리터스가 트레일러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영 목사의 교회에서 얻어 온 안내서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메이 아줌마를 사랑했고 작물들이 싱그럽게 자라던 밭에 서 있었고, 클리터스는 이제 마음껏 빙글빙글 돌고 나부끼며 살아갈 곳을 찾은 바람개비들에게 근사한 축복의 말을 선사하려고 안내서를 열심히 뒤적였다.
마침내 클리터스가 축복을 내렸다.
˝영혼의 소리가 담고 있는 진정한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슬픔에 잠긴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 하나니…….˝
오브 아저씨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큰 바람이 쏴아 불어 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날려 보내 주었다. (*)
* 읽기 힘드셨죠? 이 얇은(?) 책은 사실 발표된 지 꽤 오래된 책입니다. 대략 1960대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지금 읽어도 잔잔한 감동이 있는 작품입니다. 미국 내에서 그 해의 최고 아동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뉴베리상을 수상했지요. 기회 되시면 읽어보시라고 올려보았습니다.
6.
나는 오랫동안 헤매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잔뜩 낀 미치광이 형상을 빌어 안내자가 내게 찾아왔고, 절망에 빠진 나는 이제 그 애의 손에 횃불을 넘겨주고 있었다. 그 애가 이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 곳에서 우리를 끌어내 주기를 바라면서.
불러도 메이 아줌마가 나타나지 않았던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오브 아저씨가 서글프게 한쪽 길로 떠나고, 나는 나대로 참담하게 나머지 한쪽 길로 걸어간 그 다음 날, 국어 시간에 배운 ´대단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날의 일을 계기로 우리의 삶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했고, 우리 세 사람은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었으며, 동화책에 나오는 도로시와 허수아비와 겁쟁이 사자처럼 진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 에메랄드 시에서 오브 아저씨의 영혼에 안식을 찾아 줄 뭔가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메이 아줌마가 오지 않았던 그 다음 날 아침, 오브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나는 악몽을 꾸다가 불현듯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주 중요한 뭔가를 놓쳐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물론 그 중 하나는 통학 버스였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는데, 아저씨가 웬일인지 5시 반에 나를 깨워 주지 않았다. 나는 7시에 일어났지만, 학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하느님은 내가 집에 남아 있도록 일부러 늦잠을 재우셨는지도 모른다. 그 날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트레일러 맞은편 끝에 있는 오브 아저씨의 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이 문을 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고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저씨가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면서, 이미 마음 속으로는 아저씨가 누울 관과 아저씨가 맬 마지막 넥타이까지 골라 놓았을 정도였다. 오늘 아침이 바로 그 날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서머냐?˝
아저씨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해서 침대에 누운 아저씨의 앙상한 몸만 어렴풋이 보일 따름이었다. 아저씨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아저씨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저씨?˝
아저씨가 손을 들어 내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 손을 자꾸만, 자꾸만 도닥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아저씨의 얼굴이 잿빛으로 보였다. 아저씨는 꼭 의학 실습실에 뉜 가엾은 희생양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듯한 침침한 방 안에서, 아저씨가 흘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늦잠을 잤구나.˝
아저씨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단 하루도 늦잠을 자지 않았고,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침 해처럼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누구나 늦잠을 자는걸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더 주무시고 싶으면 계속 주무세요. 저는 가서 커피 끓일 게요. 그리고 일어나시면 달걀 프라이랑 코코아도 만들어 드릴게요.˝
오브 아저씨는 말리지 않았다. 창피해서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나는 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우리한테 서로의 모습을 글로 써 보라고 했다. 그 글들을 반 아이들에게 읽어 주며 누구를 그렸는지 알아맞히게 하겠다면서.
선생님이 읽은 글들 가운데에는 옷이나 머리 모양이 궁상맞게 그려진 점으로 보아 몹시 불우한 어린이라고 짐작되는 여자아이에 대한 글이 있었다. 반 아이들은 그 애가 누구인지 다 안다는 표정들이었다. 오직 그 글의 주인공만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그 때만큼 내가 사정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한 순간도 없었다. 그 글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아니 그 글을 쓴 아이의 눈에 비친 나를 깨닫는 순간, 나는 한시라도 빨리 든든한 아줌마와 아저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내 방이라는 안식처에 틀어박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틈에 앉아 있어야 했다. 나를 훤히 드러내놓고서.
혼자 있고 싶은 아저씨의 심정, 이해가 간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학교에 전화를 걸어 결석하겠다고 한 다음, 커피를 끓였다. 그 날 아침 낡은 56번 버스는 정류장에서 평소보다 몇 분 더 오래 서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외투를 대충 걸친 채 교과서들을 떨어뜨리며 언덕을 넘어 헐레벌떡 뛰어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 날 기다려 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집에 가정 의학책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책에는 아저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는 메이 아줌마가 보던 스폭 박사의 「유아와 어린이 건강」이라는 낡은 책 한 권뿐이었다. 아줌마는 내가 어렸을 때 토할 적마다 그 책을 펼쳐 보곤 했다. 하지만 그 책을 뒤져 봤자, 부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노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말도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혹시 운이 좋으면 거기 나오는 아트 울린 박사가 슬픔에 지쳐 늦잠을 자는 노인을 치료할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에 매달려서 말이다. 하지만 그 날 아침의 주제는 여드름이었고(클리터스가 그걸 못 본 게 안타까웠다.) 그러니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상식밖에 기댈 데가 없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따져 보니 내 안에서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서 귀를 막았다. 하지만 9시쯤 되자 나는 아저씨가 단순히 실수로 늦잠을 잔 게 아니라 마음이 깊이 지쳐서 늦잠을 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메이 아줌마에 대한 기다림에 지치고, 슬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데 지쳤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의 관계도 끝내 버렸는지 모른다.
얼마 안 있어 오브 아저씨가 발을 질질 끌며 방에서 나왔다. 아저씨는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귀찮은지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냉기가 내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금방이라도 요양원이나 무덤에 들어갈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저씨를 죽이고 싶을 만큼 너무도 화가 났다. 아저씨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아침을 차리는 동안, 아저씨는 코코아를 마시며 현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5시 45분에 아침을 먹는데, 메이 아줌마는 항상 푸짐하고 따끈따끈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오브 아저씨는 나한테 시리얼과 토스트를 차려 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직접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식탁에 앉아서 먹기 시작하자, 서먹했던 분위기도 풀려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예전에 아저씨와 내가 흥미로워했던 얘깃거리들을 열심히 찾았다. 개를 키우는 게 어떨까요? 읍내 철물점 총각은 술에 취한 거예요, 아니면 원래 말을 더듬는 거예요? 새 봄에는 우리도 ´잡초 귀신´ 같은 제초제를 하나 사서 그 고물 자동차 주위에 난 잡초들을 깨끗이 없애 버리면 좋겠죠?
하지만 잡초 귀신이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얘기할 즈음, 아저씨는 반쯤 남긴 아침식사를 옆에다 밀어 놓고는 슬픈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가 말했다.
˝서머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뭘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집안 살림을 전혀 모르잖니. 진작에 배워 뒀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고, 그러니 이 집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나.˝
아저씨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살피는 일을. 트레일러야 내버려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도 가만 내버려두면 알아서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저씨,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힘겹게 침을 삼키더니,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있었으면 네가 네 일을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아가야, 우린 널 우리 손으로 잘 키우려고 여기로 데려왔어. 그 사람은 네가 바로 이 곳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랐지. 나 같은 늙은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니. 그 사람이 가 버리고 나니까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잖니?˝
이상하고 뜻밖이긴 하지만, 아저씨의 그 말을 듣자 나는 넋이라도 나갈 만큼 기뻤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저씨가 우리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안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만일 아저씨가 늦잠을 자고 나서 하루 종일 잠옷바람으로 앉아 미안하다는 변명만 되풀이했다면, 아니 더 심하게는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면, 나는 아저씨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자신이 생활을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희망이 생겼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새 바람개비들을 만들어 보세요. 잠시 다른 일에 열중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살림은 제가 할 수 있어요. 아저씨가 기운을 차리실 때까지 제가 집안을 꾸려 나갈게요.˝
하지만 아저씨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이 늙은이의 머릿속에는 만들고 싶은 바람개비가 하나도 없단다, 아가야.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단다. 우리를 두고 떠난 그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만 하게 돼. 밭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그 가엾은 사람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꼭 그 날처럼 내 심장이 얼어붙는단다. 다 끝난 일이건만, 난 그렇게 되지 않는구나.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어. 내 속엔 이제 바람개비가 없단다. 그 가엾은 할망구 생각밖에 없다구. 이 세상 누구도, 어떤 것도 내 생각을 메이한테서 떼놓지 못할 게다. 나도 그러기 싫단다. 어쨌든 나는 언제까지나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의 팔을 어루만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저씨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저씨한테도, 나한테도 해답을 말해 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저씨한테 코코아를 한잔 더 따라 주고, 내 잔에도 커피를 더 따르고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3시 25분에 클리터스 언더우드가 그 여행 가방을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나타났고, 우리는 마침내 오즈의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7.
˝무슨 교회냐?˝
오브 아저씨는 클리터스의 어깨 너머로 그 여행 가방에서 나온 신문 기사 쪼가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심령 교회요. 글렌 메도즈 심령 교회라고 씌어 있네요. 퍼트넘 군에 있대요.˝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안락의자에 기대어 혹시 클리터스가 사람 행세를 하는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아저씨나 내가 온갖 가지 도넛을 다 준다고 해도 절대로 교회에 다니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아저씨한테 그 기사를 건네 주면서 계속 떠들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죽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대요. 교회란 모름지기 그런 일을 해야 한대요. 이 세상이랑 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일을요. 이 교회는 보통 교회랑 달라요. 작년에 그 여자 목사님의 사진이 맘에 들어서 그 기사를 오려 놓았죠. ´미리엄 B. 영 목사, 광활한 세계 속의 작은 매개자´. 멋지지 않아요? 나는 나중에 크면 꼭 신문 기사에다 제목을 달아보고 싶어요. 아무튼 이 목사님은 박쥐를 애완 동물로 키운다고 ´박쥐 여인´이라고도 한대요. 또 맨날 흰옷만 입고 있어서 ´흰옷의 여인´이라고도 하고요.
클리터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때맞춰 나타난 여인´이라고 하고 싶어요. 정말 딱 때맞춰 나타났잖아요. 더 늦기 전에 우리를 메이 아줌마한테 데려다 주려고 때맞춰서 내 가방 속에 나타난 거라고요.˝
아저씨는 웃지 않았다. 아저씨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이 새로운 제안이 지난번 제안처럼 터무니없다고 판단하고, 만약 클리터스가 퍼트넘 군에 가자고 한다면 파인빌 요양원에 가서 검사나 받아 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래, 그 말을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단어를 고르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퍼트넘 군까지 가는 데 차로 얼마나 걸리지?˝
나는 버럭 소리쳤다.
˝아저씨! 지금 제 정신이세요? 박쥐 여인인지 뭔지 만나러 퍼트넘 군까지 갈 순 없어요!˝
오브 아저씨와 클리터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물었다.
˝가면 왜 안 되는데? 학교 쉬는 날에 달리 할 일이라도 있니?˝
˝학교 쉬는 날에요? 학교 쉬는 날, 퍼트넘 군에 간다고요? 심령술 교회에요?˝
˝그냥 심령 교회야.˝
클리터스가 내 말을 고쳐 주었다.
오브 아저씨가 클리터스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 못 갈 거 없지. 아무튼 한두 가지라도 알 수 있을지 모르잖니?˝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고, 적어도 얼마간은 아저씨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셋이서 박쥐를 키운다는 그 여자 목사를 찾아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바보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저씨가 웃음을 되찾고 희망을 품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아저씨를 따라나서야 했다.
˝세 시간요.˝
클리터스가 대답했다.
˝뭐라고?˝
˝거기 가는 데 세 시간쯤 걸릴 거라고요. 미리 지도를 찾아봤거든요. 길은 쉬워요. 고속도로만 죽 따라가면 되니까요. 돌아오는 길에 찰스턴 시에 들러서, 주 의사당에도 가볼 수 있어요. 난 아직 한 번도 주 의사당에 안 가 봤거든요. 하긴 롤리 군 중부랑 파예트 군 중부 지역말고는 가 본 데가 없으니까. 겨우 이 정도밖에 못 가 봐서야, 르네상스 인간이 되긴 힘들지.˝
˝무슨 인간?˝
오브 아저씨가 물었다.
˝르네상스 인간요. 역사 시간에 배웠어요. 옛날에 유럽에는 르네상스 인간이라고 하는 팔방미인들이 있었대요.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연주하고, 시도 쓰는 사람들요. 그러면서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도 토론했대요. 그러니까 여러 분야에 대해 많이 아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르네상스 인간이라고 불렀대요.˝
클리터스는 조금 뻐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훈련하고 있어요. 딥 워터에서도 르네상스 인간이 좀 나와야 되지 않겠어요?˝
˝하하!˝
오브 아저씨는 웃으면서 클리터스의 무릎을 툭 쳤다.
˝이 녀석, 파트넘에 다녀오면 렌터세앙스 인간이 되었다고 으스대겠구나!˝
두 사람은 즐겁게 웃어댔지만,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냉장고로 가서 콜라를 꺼냈다. 클리터스가 금방 돌아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애는 저녁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그러다가 아저씨와 내가 땅콩 버터로 저녁을 때울 게 분명해 보이자, 그제야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클리터스는 내가 왜 그 날 결석했는지 묻지 않았다. 오브 아저씨의 잠옷 차림에 대해서도 절대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분명히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메이 아줌마도 그 애를 좋아했을 것이다. 오브 아저씨처럼 ´기발하기 그지없는´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겠지. 아줌마는 언제나 특이한 사람들, 얼핏 보아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천국에서도 아줌마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천국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곳일 테니까. 땅 위에서처럼 꼭 정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적어도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복 중 하나일 것이다.
오브 아저씨와 나는 토요일에 클리터스네 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을 만나서, 다음 주에 퍼트넘 군에 갈 때 클리터스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곧 우리 셋은 아저씨의 밸리언트 자동차를 타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동방 박사들처럼 메이 아줌마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줄 별을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나는 두렵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내게 중요한 것들을 잃었기에, 퍼트넘 군에 가서 더 이상 뭔가를 잃고 싶지는 않다.
클리터스는 항상 희망과 확신이 넘치는 것 같다. 그 애는 자기가 아저씨 문제를 풀 열쇠를 발견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열쇠를 집으러 고속도로를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박쥐 여인이 사기꾼이라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것인가. 메이 아줌마가 우리 곁에 있지 않겠다고 하거나, 아예 퍼트넘 군에 나타나지 않거나, 아저씨가 애타고 바라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곳 딥 워터의 집으로 돌아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때쯤이면 우리는 너무나 멀리,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 있을 테니까. 다시는 가정을 이룰 수 없을 만큼, 멀리.
클리터스는 이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8.
메이 아줌마는 박쥐를 좋아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그 여인도 박쥐를 좋아한다고 하니, 어쩌면 좋은 징조일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툭하면 트레일러 안에 박쥐가 들어오곤 했다. 박쥐가 겨울잠을 자는 시기에는 거의 일 주일에 한 마리씩 들어왔다.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거실에서 박쥐의 보드라운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낯선 기분을 어떤 면에서는 즐기면서 몇 분간 그대로 누워 있곤 했다. 그리고는 칭얼대면서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한테 가려고 일어났다. 그러려면 거실을 지나야 했는데, 트레일러의 천장이 낮아서 박쥐와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 짐승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의 품에서 자라고 있었으니까.
나는 박쥐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나중에 좀더 자라서 사람들이 대부분 박쥐라면 기겁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두려움이란 우리를 키워 주는 사람한테서 물려받는 게 아닐까.
메이 아줌마는 제일 먼저 거실에 나와, 길 잃은 박쥐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가엾은 것. 얼마나 놀랐을까. 이런 고물 트레일러 같은데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그러면 잠시 후에 오브 아저씨가 눈을 비비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와 잠을 깨려고 일부러 심한 욕을 몇 마디 했다. 아저씨는, 욕을 하는 것은 독한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욕을 하면 몸이 풀리면서 몸 속의 기관이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저씨와 아줌마는 번갈아 가며 머리 주위로 날아다니는 박쥐에게 담요를 덮어 씌우려고 애썼고, 얼마 안 있어 둘 중 한 사람이 담요를 싸들고 나가 그 보드랍고 새까만 짐승이 어둠 속으로 자유롭게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번은 메이 아줌마가 실수로 박쥐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박쥐가 앉아서 자고 있는 창문을 확 열어젖히는 바람에 박쥐가 창문 틈에 끼이고 말았다.
아줌마는 그 박쥐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상자에다 따뜻한 수건을 폭신하게 깔고 그 위에 박쥐를 뉘고는, 바나나 조각이나 아저씨가 뒤뜰에서 파낸 죽은 벌레들을 접시에 담아 넣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일 주일 동안 우리 세 사람은 번갈아 박쥐한테 가서 박쥐가 뭐라도 먹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 보니, 박쥐는 접시로 다가가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바나나 조각을 핥았다. 그 박쥐는 너무도 조그맣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날개 달린 작은 짐승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박쥐는 죽어 있었고, 결국 메이 아줌마의 밭에 묻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오브 아저씨는 마침내 사람을 불러다가 트레일러를 점검했고, 박쥐들이 난방 파이프를 통해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철조망으로 파이프들을 죄다 막았다. 그러고 나자 더 이상 길을 잃거나 무리와 떨어져 집 안에 들어온 박쥐들을 놓아주거나 땅에 묻는 일은 없어졌다.
그 주에 오브 아저씨는 한 번도 늦잠을 자지 않았다. 내가 학교 가기 전에 시리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저씨는 식탁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꼼꼼히 들여다보거나 미국 자동차협회에서 나온 여행 안내서에서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하이오 편을 훑어보았다. 나는 아저씨에게 뭘 찾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저씨가 찾는 건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클리터스네 현관 앞에 서서 덜덜 떨며 문을 두드렸다.
클리터스네 집은 조그만 고동색 집으로, 다른 집의 차고 만했다. 그 집은 길가에서 꽤 떨어진 소나무숲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어, 꼬마애들이 보면 금발머리 꼬마 아가씨가 곰 세 마리를 만났다는 그 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2월의 찬바람 속에서 그 집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옹색해 보여, 나는 왠지 담요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브 아저씨는 옛날에 그 집에 살던 아저씨하고 낚시를 자주 다녔다는 얘기만 했을 뿐, 집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작고 멋진 집이라고만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 곳에 클리터스가 서 있었다. 순간 나는 이 아이가 정말로 지난 몇 달 동안 그 낡아빠진 가방을 들고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아이인가 싶었다. 그 아이는 내가 알던 아이와는 전혀 달랐고, 그 집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나는 클리터스가 바로 이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다니 이상하기도 하다. 얼굴만 보고도 어떤 사람이 지극히 안정감이 있으며 힘과 애정이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니. 그럴 때면 갑자기 그 사람이 무척 편해진다.
클리터스는 집에 있었고, 그래서 괴짜같이 굴지 않아도 되었다. 늘 그렇듯 헤벌쭉 웃는 클리터스를 보니, 난생 처음으로 그 애가 반갑게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클리터스가 옆으로 비켜나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클리터스의 부모님이 서 있었다.
나는 그분들이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과 만나는 걸 서먹해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두 분은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클리터스네 어머니는 꼭 말린 사과처럼 보였다. 자그맣고 홀쭉하고 바싹 메마른 모습이 꼭 그 집을 닮았지만, 환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아줌마와 악수를 할 때, 가냘프고 차가운 손가락들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삭정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줌마가 금방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언제나 금방 떠나 버릴 사람들만 만나는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안녕, 서머. 드디어 만나다니 정말 반갑구나.˝
아줌마가 상냥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는 아줌마의 깍듯한 인사에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오브 아저씨와 악수를 나누다가, 아저씨가 건넨 말에 크게 웃었다. 덕분에 아저씨도 거리낌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그 집 식구들과 함께 왁자하게 웃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기다란 잿빛 수염을 기른 분으로, 조그마한 몸집에 허리가 구부정했다. 마치 꼬마 도깨비처럼. 게다가 아저씨의 뺨은 발그레한 장밋빛이었다. 아저씨는 악수 대신 한 팔로 나를 꼬옥 감싸안아 주며 말했다.
˝우리는 저 녀석이 널 집에 데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단다. 크리스마스 때부터 저놈을 졸랐지.˝
나는 클리터스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머쓱하게 클리터스를 바라보았다. 클리터스가 왜 나를 이 집에 데려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클리터스네 부모님 때문인 줄 만 알았다. 그 애가 자기 부모님을 부끄러워해서 내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상냥한 두 분을 만나고 보니, 클리터스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클리터스는 나라는 아이를, 쌀쌀맞은 내 태도를 부끄러워했고, 자신의 특이한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 드리기 싫었던 것이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부모님한테 자기를 벌레 보듯 하는 나를 차마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집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좁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클리터스네 엄마가 부엌에서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왔다.
오브 아저씨는 미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저, 말씀 들으셨겠지만, 다음 주에 클리터스를 데리고 어디에 잠깐 다녀왔으면 합니다.˝
클리터스의 부모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자세한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저씨는 물론 준비를 해 왔을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실은 작년 8월에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서머가 고생이 말이 아니죠.˝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더니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가엾은 것. 어쩌다 시간이 남아도,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지 뭡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데리고 잠시 여행이나 다녀올까 생각했죠.˝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오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내 눈을 피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퍼트넘 군에 옛 친구가 살고 있어서. 거길 가볼까 합니다만…….˝
퍼트넘 군에 간다는 것만큼은 맞는 얘기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찰스턴 시에 들러서 주 의사당도 구경하고요. 클리터스가 거기 한 번 가 보고 싶다더군요.˝
클리터스네 엄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브 아저씨는 계속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클리터스가 세상 일에 워낙 호기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클리터스도 의사당을 구경하고 싶어할 것 같더군요. 또 서머랑 클리터스는 아주 친하답니다. 거의 단짝이라 할 수 있으니까, 클리터스를 데려가면 서머한테도 좋을 거예요. 서머가 다른 생각을 털어 버리게 해 줄 테니까요.˝
아저씨가 나를 무척 안쓰럽게 바라보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저씨를 마주보았다. 클리터스의 부모님은 오죽하겠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자기들 앞에 있는 이 가엾은 아이를 위로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클리터스는 오브 아저씨가 ˝가엾은 것……˝ 어쩌고 할 때부터 입이 딱 벌어진 채 아저씨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클리터스 같은 아이가 이렇게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클리터스도 나처럼 아저씨가 박쥐 여인과 퍼트넘 군에 가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애는 오브 아저씨가 얼마나 능수 능란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아저씨를 숭배하던 클리터스가 이제 10점쯤 더 얹어서 아저씨를 우러러볼 게 뻔했다.
클리터스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오히려 우리 아이가 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지요. 저 애가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줄은 압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허리가 꼬부라졌고, 집사람은 오른쪽 눈이 거의 장님이라서 예전처럼 돌아다니지 못한답니다.˝
나는 클리터스네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클리터스도 나와 같은 심정인가 하고 그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클리터스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었다. 더없이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벌써 클리터스네 아버지를 파예트빌에 모시고 가서 척추 지압 요법을 받게 해 드리고, 클리터스네 엄마의 오른쪽 눈을 고쳐 줄 약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분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막을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클리터스네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참 안됐구나, 아가야. 하느님께서 소중한 사람을 데려 가시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법이지.˝
갑자기 목이 메어 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졌다. 나는 울음이 터질까 봐 메이 아줌마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럭저럭 화제는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갔고, 오브 아저씨와 클리터스네 아버지는 날씨 이야기며 도로에 세우고 있는 육교 이야기 따위를 주고받았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 기계공이었다며, 그걸 증명해 보이듯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간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오브 아저씨가 이에 질세라 2차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다친 곳을 보여 주려고 바지를 내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저씨는 허벅지에 일본군이 쏜 유산탄에 맞은 흉터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저씨는 냉정을 잃지 않았고, 바지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가 내온 커피와 생강빵은 그 때까지 먹어 본 것 가운데 최고로 맛있었다. 아줌마는 나더러 우유를 마시라고 했지만, 커피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열두 살짜리 여자애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그러자 클리터스는 내가 다 커피 때문에 고집불통이 되었으며, 작가들은 기나긴 소설을 써 나가는 동안 기댈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싸구려 위스키보다는 커피가 낫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줌마는 내게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빵을 먹으면서 집 안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집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가구들도 소박하고 전등도 수수했다. 벽에 걸린 장식품들도 몇 개 없었다. 그 가운데는 아줌마 아저씨가 어린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니까, 클리터스와 나의 차이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는 클리터스. 모든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비록 늙고 허약했지만, 클리터스가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그 아이를 꼭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클리터스는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보살펴 주리란 것을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집에 있는 동안 클리터스는 낡은 여행 가방도 꺼내지 않았고, 평소처럼 우리를 웃기려고 허풍을 떨거나 소문거리들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애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 애는 조금 다른 식으로 현명한 아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물에 빠졌다 살아난 일이 그 애한테는 가장 근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클리터스처럼 메이 아줌마도 천국에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오브 아저씨와 나는 따끈따끈한 빵과 커피가 넉넉하던 클리터스네 집을 나섰다. 그 집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도 흐뭇하고 평온한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는 아저씨가 클리터스네 부모님에게 거짓말로 둘러댄 일을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퍼트넘 군으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9.
˝그걸 다 가져가겠다고?˝
클리터스는 왼손에는 음식 보따리를, 오른손에는 그 유명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글쎄 내 캐딜락 승용차도 같이 가져올까 했는데, 그건 봉투에 안 들어가더라구.˝
오브 아저씨가 트렁크를 쾅 닫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만들 떠들고, 어서 차에 타거라. 저승 세계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오브 아저씨와 나는 밸리언트 자동차의 앞자리에 탔고(클리터스에게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클리터스는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장 가방에서 잡지들을 하나 둘 꺼냈다.
내가 얼핏 고개를 돌려 잡지 이름들을 보고는 기가 막힌 듯이 노려보자, 그 애는 이렇게 설명했다.
˝크리지즈 할로에 사는 친군데…… 그 애가 준 거야. 걔네 집 뒷간에 십 년도 더 있던 거래.˝
내가 ´욱´하고 구역질을 하려는데,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내 평생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곳은 우리 집 화장실이란다. 저속한 책들은 아니었어. 우리 아버지는 화장실에다 자동차 공학, 낚시, 남북전쟁에 관한 책들을 갖다 놓으셨지. 그것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어. 덕분에 나는 설사가 나면 아주 신이 났단다.˝
그렇게 우리는 퍼트넘 군으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클리터스와 오브 아저씨처럼 말 많은 두 사람이 한 차에 탔으니 가는 동안 내내 몹시 시끄러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딥 워터를 벗어나 간선 도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우리 셋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차 안에는 나사가 풀린 라디오 부품이 덜그덕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차 안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거의 슬픔에 가까웠지만, 슬픔은 아니었다. 슬픔보다 더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오브 아저씨의 침묵은 메이 아줌마 때문이었다. 아마 아저씨는 퍼트넘 군으로 가는 길 내내 아줌마에게 돌아와 달라고, 아줌마 없는 세상을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일러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아저씨는 활기차 보였지만, 나는 아저씨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클리터스. 내가 두세 번쯤 돌아보았는데, 그 때마다 그 애는 산꼭대기에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있기라도 한 듯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티없고 맑아서 꼭 아기 같았다. 저렇게 창 밖을 바라보면서 저 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 자신의 침묵은 평화에서 비롯되었다.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내 곁에는 오브 아저씨가 든든하게 앉아 있었다. 뒷자리에는 클리터스가 흐뭇해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일도 없이, 마음이 상할 일도 없이 우리는 앞으로 세 시간을 꼬박 그렇게 갈 것이다.
나는 창 밖에 늘어선 산들과 그 산에 지어진 조그만 집들을 바라보았다. 마당에 뒹구는 진흙투성이 장난감들, 녹아내리는 눈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따스함과 행복을 주는 굴뚝 연기. 질척질척한 마당에서 개집에 묶인 채 자고 있는 개들.
나는 아무에게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이 고요는 내게 내려진 깊고 깊은 잠과도 같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도로 표지판에서 찰스턴이 가까워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클리터스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처음에는 주유소를 찾아 잠깐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리터스가 주 의사당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들떠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리터스가 아저씨에게 말했다.
˝의사당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우리 주 역사책에 나오는 흑백 사진으로 밖에는요. 그것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지만요. 그 둥그런 황금 지붕 아래서 높은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있겠죠. 그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웨스트버지니아에는 의사당이 있다구요.˝
클리터스는 고개를 흔들고는, 차창 밖으로 막 지나가고 있는 뒤퐁 회사 공장을 바라보았다.
클리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날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 의사당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바로 그 순간 나는 클리터스가 그런 일을 하는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파예트 군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높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중요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찰스턴으로 차를 몰고 가는 광경이.
그러고 나서 클리터스가 비엔나 소시지 통조림과 <래프인>의 재방송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초록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씌어진 도로 표지판들은, 조급한 우리의 마음을 놀리듯이 ´의사당 가는 길´까지 아직 멀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콜럼버스가 대륙을 찾듯 눈을 부릅뜨고 그 둥근 금박 지붕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우리 세 사람 모두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의사당 건물은 마치 폭이 넓은 치마를 입은 근엄한 여왕처럼 잿빛 콘크리트를 펼치고 서 있었고, 거대한 둥근 지붕은 아침 햇살 속에서 순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건물이 우리 주의 의사당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폐광 지역에 사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햇빛 속에 굳건히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엄하고도 우아한 존재였다.
오브 아저씨는 운전을 하는 틈틈이 의사당 구경을 하면서 큰 도로에서 벗어났다.
˝정말 아름답구나.˝
아저씨는 세 번째로 갓길에 들어섰다.
˝아름답고말고요.˝
클리터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클리터스는 눈앞의 광경을 삼켜 버리듯이, 의사당이 지나가기 전에 꿀꺽꿀꺽 빨리 삼켜 버릴 듯이 보였고, 그러는 사이에 차는 의사당 앞을 지나 64번 주간 도로로 향했다.
나는 클리터스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어쩌면 영원토록 그 곳에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쥐 여인쯤은 까맣게 잊고서.
오브 아저씨도 눈치를 챈 듯했다.
˝걱정 마라, 얘들아. 내일 돌아오는 길에 저기 들러서, 하루 종일 구경하자꾸나. 역사 기록들도 보고,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특산 공예품들도 보자꾸나. 그러고 나서는 의사당 커피점에 들어가서, 상원의원들이랑 같이 점심도 먹는 거야. 어쩌면 주지사님도 만날지 몰라. 그러면 나랑 클리터스는 주지사님한테 우리 주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이렇게 해결하시라고 일러 줄 테다.˝
클리터스는 천국처럼 여기는 의사당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고, 그 동안 자동차는 그 멋진 황금빛 지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려갔다. 딥 워터와 그 곳에서 지내던 우리를 뒤로 하고, 파트넘 군과 새로운 우리를 향하여. 우리는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는 세 손님이었다.
10.
˝죄송합니다만, 미리엄 영 목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글렌 메도즈 심령 교회였던 조그만 청색 건물 문앞에 서서,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우리 세 사람은 그 목사와 함께 캄캄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교회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었다. 줄곧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고 전화번호부를 찾아 위치를 알아내서는, 아침 10시에 영 목사의 교회 문 앞에 도착했다. 아니, 한때 영 목사의 교회였던 곳에.
교회라는 것을 알려 주는 푯말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브 아저씨는 심령 교회 같은 곳은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느긋하게 차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이런 곳은 새로 오는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맞이하는 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클리터스도 어차피 여기에 찾아올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교회가 있는 곳을 아니까 굳이 푯말이 필요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로는 언제나 실망할 때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돌아가셨는데요?˝
클리터스는 바보처럼 물었다.
다람쥐를 닮은 그 남자는 우리의 바보에게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분은 숨을 거두셨단다. 작년 6월에 심령의 나라로 가셨지.˝
우리 세 사람은 말문이 막힌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는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 죽음을 뛰어넘어 우리와 메이 아줌마 사이에 가로놓인 장애물을 뚫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죽음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파트넘 군에 왔지만, 죽음은 이미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는 예의도 잊어버리고 당돌하게 물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었다. 나는 이 다람쥐 사내한테 너무 화가 나서 싸움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 사내를 쥐어짜면 박쥐 여인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 사람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 사람은 다시,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목사님의 조카란다. 그분이 하시던 일을 정리하느라 여기서 당분간 살고 있지.˝
˝아.˝
나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클리터스가 물었다.
˝박쥐들은 다 어디 갔어요?˝
그 다람쥐 사내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유롭게 날아갔단다. 영 목사님처럼.˝
그러는 동안 오브 아저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우리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영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교회 현관 옆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저씨가 당혹스러워하며 해결책을 찾으러 할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클리터스와 내가 ´광활한 세계 속의 작은 매개자´가 떠나 버린 이 교회 앞에서 공연한 질문만 하다가 말문이 막혀 서 있자, 오브 아저씨는 다시 돌아섰다. 돌아서서 그 남자한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목사님이 우리 집사람을 만나게 해 줄까 하고 왔소이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아저씨가 그토록 간절히 찾았던 목사의 조카라는 사람은 아저씨의 상심한 얼굴에서 쓰라린 고통을 읽고는, 아저씨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말했다.
˝정말 안타깝군요. 하지만 저한테는 우리 이모님 같은 영적인 능력이 없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다만 시손비에 사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긴 한데, 혹시 그 사람이라면…….˝
하지만 아저씨는 손을 치켜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우리는 이 곳으로 인도받아 왔으니, 내 기대도 여기서 접어야지요. 망령 든 늙은이처럼 심령술사를 찾는다고 온 주를 돌아다닐 순 없소.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요.˝
클리터스와 나는 서로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며 빤히 마주 보았다.
마침내 클리터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희한테 줄 만한 거 없으세요? 그 목사님이 교회에서 쓰시던 거라면 뭐든지 괜찮아요.˝
그래, 그것은 클리터스다운 생각이었다. 얻을 만한 물건이나 손에 쥘 수 있는 물건, 그 비닐 가방에 간직할 수 있는 물건을 바라는 것. 클리터스는 언제나 뭔가를 모으고 싶어하니까.
목사의 조카가 말했다.
˝글쎄다. 목사님이 새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던 안내장이 있긴 한데. 그거라도 가져갈래?˝
클리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의 조카는 오브 아저씨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찾는 동안 잠시 안으로 들어가시죠. 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핏기 하나 없는 아저씨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아저씨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클리터스가 그 다람쥐 사내한테 안내 책자를 받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 남자는 접은 종이를 한 장 들고 다시 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나중에 혹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러고 나자 우리의 모든 희망이었던 그 교회의 문이 닫히고, 우리는 다시 우리만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묵묵히 자동차로 걸어가서는, 한동안 잠자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오브 아저씨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만 기다렸다. 우리는 읍내에 있는 모텔에다 방까지 미리 잡아 놓았던 참이다. 그리고 다음 날, 그러니까 목사님이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연결시켜 주고 만사가 잘 해결되고 난 다음 날에는 주 의사당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의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오전 11시였다. 길을 떠난 지 아직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버렸다. 우리 자신도 함께.
오브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그냥 집에 가는 게 좋겠구나, 얘들아.˝
아저씨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우리는 그 작은 청색 건물 안에 잠든 모든 영혼들한테서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클리터스도, 나도 말이 없었다. 우리가 나서서 해결하기엔 너무 조심스런 상황이라는 걸 그 애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우리는 침묵 속에서도 행복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암울한 정적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저씨의 표정은 참담했다. 나는 아저씨가 갓길에다 차를 세우고는 덜컥 숨을 거둘까 봐 겁이 났다. 클리터스는 심령 교회 안내문을 펴놓고 그것만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애써 삼키면서 제발 뭐라도 나타나서 아저씨와 나를 구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저씨가 정말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을 절실히 느꼈기에.
64번 주간 도로를 벗어나서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의사당 길´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들이 보였다. 표지판이 스쳐 지날 때마다 클리터스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의사당이 나타났다. 클리터스가 이다음에 꼭 결혼하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콘크리트 여왕이.
강변 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클리터스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클리터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일은 저것, 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의사당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클리터스를 거기에 데려다 줄 힘이 없었다.
우리는 도로 남쪽에 있는 다리를 향해 달렸다. 그 다리에 들어서서 강을 건너면 클리터스의 의사당과는 영영 안녕이다. 이대로 딥 워터에 돌아가면 텅 빈 트레일러와 살아갈 의지를 잃은 노인과, 낡아빠진 비닐 가방을 보물단지처럼 떠받드는 정신 나간 바보, 그리고 내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었던 그 금빛 지붕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앞만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의사당이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순간,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 미련을 뒤로 한 채 옛날 생활로 돌아가자고 체념한 순간,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자, 이 고물차를 돌려 볼까.˝
그리고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밸리언트 고물차를 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저 빛나는 성을 향하여. 내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클리터스는 뒷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클리터스는 물어 보기도 겁난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로 가긴 가는 거예요? 의사당 보러요?˝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점심때가 다 됐구나. 주지사님은 커피점에 계시겠지? 재미있는 사람이 들어오나 지켜보면서 말이야.˝
오브 아저씨는 어깨를 쫙 펴고, 조금은 느긋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주지사님을 실망시킬 수야 없지.˝
11.
메이 아줌마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천사였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천사로 되돌아간다고. 그러면 다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지상에 머무르고 싶어할까? 왜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이 곳에 머무르려 할까?
예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다.
메이 아줌마는 운이 좋았다. 아줌마는 오브 아저씨한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딱 한 번 마음 아프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천사가 되면 더 이상 아픔도 느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오브 아저씨. 아저씨는 한 번 아픔을 겪고 나서도 계속 아파해야 했다. 집 안 곳곳에서 메이 아줌마의 빈자리들을 느낄 때. 아줌마가 숨을 거둔 밭을 거닐 때. 그리고 아줌마의 자리를 덩그러니 남겨 둔 채 침대에서 혼자 잠들 때에도.
아저씨는 너무도 큰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겪고도 아저씨는 이 지상에, 바로 여기에 머무르기로 했다. 뜻밖에도 다시 살고 싶어했다. 나는 아저씨가 나 때문에 살고 싶어한다고 여기고 싶다. 나와 헤어지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어서라고.
우리가 파트넘 군을 떠나서 집으로 출발했던 그 날, 아저씨한테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죽은 영 목사의 교회를 떠나 웨스트버지니아 주 의사당의 콘크리트 계단에 오르기까지, 그 길 위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 아저씨에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되살려 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퍼트넘 군의 교회 문 앞에서 아저씨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지레 짐작하고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아저씨에게 일어났다. 아저씨가 우리 고물차를 의사당으로 돌린 것이다.
우리 셋은 의사당 바로 옆에 적당한 장소를 골라 차를 세우고는, 차에서 내려 마치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 곳에 처음 왔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푸근했고, 당연히 올 곳에 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클리터스는 뭐든지 만져 보고 싶어했다. 복도를 지날 때에도 벽에다 손을 살짝 대고 걸었다. 우리는 환한 진열장이 나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그리고 문마다 씌어 있는 이름을 읽어보았다. 안내서란 안내서도 다 모았다. 클리터스는 모든 사람을 다 안다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오브 아저씨는 줄곧 클리터스에게도 나에게도 마치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했다. 아저씨는 클리터스와 함께 박물관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클리터스의 어깨에 살짝 팔을 얹은 채 누렇게 변한 옛날 신문을 읽곤 했다. 내가 멋진 창문 앞에 서서 잔디밭에서 노는 비둘기와 다람쥐,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산책하는 예쁜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저씨는 내 곁에 와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처럼 내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의사당 커피점에 들어가서 혹시 주지사가 와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 날은 주지사가 다른 곳에 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에 와 있던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사람들은 으리으리한 사무실에서 가죽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려와 의사당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애타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나는 클리터스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았다. 뭔가에 희망을 걸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우리는 눈에 띄는 대로 의사당 건물의 구석구석까지 구경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있는 ´과학문화 회관´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모든 것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 회관의 선물 가게에서는 우리 주 사람들이 손수 만든 물건들을 팔았는데, 그것을 본 클리터스가 아저씨한테 바람개비를 가지고 와서 팔라고 했다. 아저씨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아저씨는 정원에 식물을 심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사람처럼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에는 바람개비들을 진열하며 그 분위기를 따져보는 듯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가게 문을 나서면서 아저씨는 클리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바람개비들을 진열할 곳이 필요하긴 하지만 여긴 아니구나.˝
우리는 상원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5시까지 있다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주차장으로 나가자 글렌 메도즈 여관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나는 클리터스에게 앞자리를 내어 주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무성한 잡초들 틈바구니에 앉아 있는 고물차를 비추었다. 오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지만, 외롭고 고통스러운 침묵은 아니었다. 그냥 피곤했다.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우리는 각자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오브 아저씨는 클리터스한테 우리 집 소파가 얼마나 잠자기 편한지 꼬드기고 있었다(아저씨는 클리터스네 부모님이 왜 일찍 왔냐고 물으면 곤란하니까, 클리터스더러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메이 아줌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뭔가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우리는 모두 엇, 하고 숨을 삼켰다. 너무나 소리 없이 날아와서 다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하지만 밝은 달빛 아래서 날개 그림자가 또렷이 드러났고, 우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가 ˝잠깐만!˝하고 소리치기도 전에, 올빼미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아줌마가 떠올랐다. 메이 아줌마가 생각났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했다. 그저 아줌마의 빈자리를 견디는 데 급급해서 지난 두 계절 동안 내 속에 차오르던 눈물을 안으로 삼켜왔다. 하지만 그 올빼미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이제 이 세상에서는 메이 아줌마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뼛속 깊이 와 닿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울고 또 울어도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오브 아저씨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클리터스가 열어 준 문을 지나 내가 꼬마 적에 수없이 그랬듯이 내 방에 데려다 주었다.
하도 많이 울어서 배와 목이 화끈거리고 욱씬거리는데도, 나는 침대에 공처럼 웅크린 채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도록 울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내가 울음으로 쏟아 내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나한테 불어넣어 주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속의 눈물이 다 빠져나가서 가뿐해질 때까지 나를 안고, 크고 튼튼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나는 아저씨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메이 아줌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줌마는 여기 있단다, 아가야.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단다.˝
나는 아저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저씨가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게 너무나 고마웠고, 트레일러 어딘가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클리터스도 고마웠다.
나는 눈을 감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가엾은 엄마와 메이 아줌마의 엄마 아빠, 그리고 사랑하는 메이 아줌마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내 마음에는 고요한 평온이 깃들었고, 나는 그분들을 생각하다가 어느덧 눈물도 마른 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아가야, 오브 아저씨와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무척 부끄럼을 탔단다. 네 커다란 눈동자는 마치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았지.
네가 나한테 필요한 아이란 걸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지.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아저씨를 뒷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했단다.
˝여보, 저 아이를 집으로 데려갑시다.˝
그래, 아저씨도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주눅이 들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너를 지켜보았다더구나. 우유를 다 마셨는데도 코니 프랜신한테 우유를 더 달라는 말을 못하더라고. 아저씨는 슬퍼하는 아이가 있으면 금방 알아본단다.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지.
˝오늘 당장 데리고 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네 짐을 꾸려서 너를 이 곳에 데려왔단다. 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더구나. 오하이오에 사는 우리 친척들 말이야.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누구도 부족한 점은 있게 마련이란다.
네가 왔을 때 처음 며칠 동안은 너한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단다. 기억나니? 내가 하루 종일 네 머리를 매만지고 빗기고 예쁜 리본을 매어 주던 일을. 나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키우는 게 평생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거야. 나는 하느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는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보다고 체념했단다. 하느님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차분히 기다리도록 하신 거야. 네가 태어나고, 네 가엾은 엄마가 숨을 거두고, 오브 아저씨가 우유 한 컵 더 달란 말도 못하는 너를 볼 때까지.
우리가 돈이 없어서 너한테 정말 필요한 것들을 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단다. 나는 머리가 동그란 인형들이 사는 커다란 플라스틱 집을 얼마나 사 주고 싶었는지 몰라. 기저귀에 오줌 싸는 큼직한 아기 인형도. 그리고 날마다 네게 분홍색과 노란색 옷을 입혀 주고 싶었단다. 왜, 찰스턴에 유리로 지어진 큰 상가 있잖니. 난 그 큰 백화점에 널 데리고 가서 꼬마 숙녀에게 어울리는 분홍색이랑 노란색 옷이며 장신구들을 몽땅 사주고 싶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가진 게 별로 없었어. 아저씨도 나도 그래서 몹시 속상했단다. 아저씨는 너한테 나무 인형을 만들어 주었지. 나는 너한테 예쁜 옷을 입히려고 날이면 날마다 굿윌 가게를 이 잡듯이 뒤졌고.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우리도 잘 안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어느 날 밤늦게 너랑 나랑 밖에 나간 적이 있었지? 왜 그랬었냐면…… 네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면서 같이 나가 보자고 그랬지. 기억나니? 그래서 우리는 외투를 걸치고 밖에 나갔어. 그 날 밤은 유난히 탐스런 보름달이 환히 떠서 손전등도 필요 없었지. 길 잃은 새끼 고양이가 있나 싶어서 헛간 쪽으로 가는데, 컴컴한 헛간에서 갑자기 커다란 올빼미가 우리 쪽으로 나라오지 뭐냐. 세상에, 그렇게 큰 짐승이 어쩌면 소리 하나 없이 날아왔을까. 너하고 나는 소리도 내지 못했지. 그냥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동상처럼 빳빳이 굳어서 그놈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만 바라봤어.
그 때까지 나는 올빼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그런데 네가 우리 집에 온 지 2, 3주도 되지 않아서, 올빼미가 나를 찾아온 거야. 나는 네가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일만 해줄 줄 알았단다. 그렇게 좋은 일들만 가져다 주리라는 걸.
한때는 왜 하느님이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나는 집 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저씨는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3, 40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쉽게 해줄 수 있었던 일들도 이제는 해 주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답이 떠오르더구나.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길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았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단다.
나는 아저씨한테 당신은 나의 달님이고 해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 그리고 서머, 우리 사랑스런 아기가 우리한테 왔을 때, 너는 내게 빛나는 별님이 되어 주었단다.
너는 내가 만난 꼬마 숙녀들 중에서 최고로 멋진 아이란다.
12.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눈부신 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제 곧 메이 아줌마가 심은 수선화가 필 것이다.
부엌에서 커피 향기와 베이컨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엌에 가 보니, 클리터스가 아침을 차리면서 신문에서 읽었다며 몸에 저절로 불이 붙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오브 아저씨는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에다 달걀을 깨어 넣으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믿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내가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인사하자, 두 사람도 환하게 웃으며 잘 잤냐고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든 걸 잊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달걀과 베이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오브 아저씨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셋이서 할 일이 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바람개비들을 집 밖으로 날랐다.
우리는 메이 아줌마가 토마토 줄기를 묶었던 막대기와 널조각들을 있는 대로 모아다가, 텅 빈 밭에 꿈과 천둥과 불의 바람개비들을 가득 세웠다. 그 중에는 메이 아줌마의 영혼인 눈부시게 새하얀 바람개비 ´메이´도 있었다.
갑자기 클리터스가 트레일러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영 목사의 교회에서 얻어 온 안내서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메이 아줌마를 사랑했고 작물들이 싱그럽게 자라던 밭에 서 있었고, 클리터스는 이제 마음껏 빙글빙글 돌고 나부끼며 살아갈 곳을 찾은 바람개비들에게 근사한 축복의 말을 선사하려고 안내서를 열심히 뒤적였다.
마침내 클리터스가 축복을 내렸다.
˝영혼의 소리가 담고 있는 진정한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슬픔에 잠긴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 하나니…….˝
오브 아저씨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큰 바람이 쏴아 불어 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날려 보내 주었다. (*)
* 읽기 힘드셨죠? 이 얇은(?) 책은 사실 발표된 지 꽤 오래된 책입니다. 대략 1960대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지금 읽어도 잔잔한 감동이 있는 작품입니다. 미국 내에서 그 해의 최고 아동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뉴베리상을 수상했지요. 기회 되시면 읽어보시라고 올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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