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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날이 얼마 안남았구나. 꿈에 소가 보여.˝
생게망게한 할아버지의 말에 온 식구가 화들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어머니는 어제
뜰아래채 빨랫줄에 베옷을 널었다. 누르끼한 베옷이 바람따라 파르르 흔들거리는
모습이 웬지 낯설게만 느껴졌었는데...
˝할아버지, 소가 왜 보여요?˝
혁이가 할아버지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가는 귀를 잡수셨
는지 엉뚱한 소리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잘 살았지. 조상님이 날 데리러 오셨어.˝
할아버지의 음성은 마른 풀처럼 까부라졌다. 할아버지의 몸도 마른 나무같았다.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그러고서 할아버지는 영 일어나시질 못했다.
˝소는 조상님을 말하는거란다.˝
아버지가 말했다. 음성은 푹 가라앉았고 빨그레 충혈된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혁이의 마음도 아침 안개 속을 헤매고 나온 듯 축축해졌다.
혁이는 씨근덕거리며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한 아이가 대나무 숲
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에 옹기옹기 모여 있던 딱새가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푸르른 대나무들이 부시시 쓰러졌다. 그러나 곧 바람소
리를 내면서 대나무들은 벌떡 일어섰다.
하늘로 날아 올랐던 딱새가 곤두박질치듯 다시 땅으로 내려 왔다. 대나무들은 저
희끼리 몸을 부딪히며 휘파람을 불었다.
˝야, 임마. 너 나한테 맞아볼래.˝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아야할 거 아냐!˝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혁이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여태까지 너를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렇게 망신을 준 거야?˝
혁이는 오늘 공부 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회시간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꿋꿋이 견디어 왔 지. 고려때 몽고군이
침입했을때 나라의 조정이 우리 고장으로 피난을 왔던 건 너희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몽고군은 물을 무서워했다면서요? 그래서 조정이 모두 강화로 피난을 온 거라
면서요? 임금님과 신하 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따라왔나요?˝
˝이 녀석아, 차례로 한 가지씩 질문을 해야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구나.˝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모두 웃어댔다.
준이는 언제나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너무 많아,
별명도 많은 아이. 서울뜨기, 백과사전,속사포,박사,네눈박이 등등....
˝그때 옹기장이들도 같이 피난을 왔대요.˝
˝응, 그렇구나......
선생님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혁이 할아버지가 그때 고향을 등지고 억지로 끌려온 옹기장이의 후손이래요. 천민
들은 살고 싶은 곳에서 마음대로 살 수도 없었대요. 양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대요.˝
반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쏠려 아깐 정말 얼굴에서 불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그 생
각을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늬네 할아버지 옹기장이인 건 사실이잖아.˝
오늘따라 준이의 하얀 얼굴이 얄밉게 느껴졌다.혁이의 주먹이 어느 틈에 준이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 바람에 안경이 박살났다. 준이는 얼굴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옹기장이 할아버질 둔 나는 상놈이고......, 대대로 너의 집은 양반이었다며?˝
˝그게 아니고......˝
눈께를 감싸쥐고 간신히 말하는 준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혁이는 대나무 숲을
나왔다.
˝짜식...난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
혁이는 눈물을 훔쳤다. 자꾸 나오는 눈물때문에 온 세상은 안개비가 내린 듯 흐렸다.
서울서 전학 온 준이는 이곳 아이들과는 다른 게 너무 많았다.
시퍼런 무청을 우두둑 잘라내고 시뻘건 흙이 묻은 무 껍데기를 손톱으로 빙빙 돌려
가며 벗겨 먹는 시원한 무맛도,새치름히 자란 풀이파리같은 싱아를 한 움큼 뽑아 질
겅질겅 씹어먹는 새금털털한 그 맛도 준이완 함께 즐길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먹어? 비위생적이야.˝
준이는 침부터 뱉었다.
지렁이 한 마리도 못 잡지만 지렁이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아이. 개구리를 보면
놀라 개구리처럼 화들짝 뛰어 달아나는 애가 개구리에 관해선 줄줄이 꿰고 있는 아이.
˝아는 게 많으면 살기가 힘들지.˝
할아버지가 늘상 하시던 말이 떠오르자 혁이는 준이가 웬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준이는 보기보다 훨씬 건강하였다.
초겨울로 접어든 들판은 무리지어 다니는 새들로 어지러웠다. 덜 떨은 들깨를 까
먹느라 몰려다니는 통에 허수아비는 혼이 다 나가 있었다.
˝어머니, 아직 이르잖아요?˝
혁이는 밭고랑에 세워진 콩다발을 두들기며 물었다. 두들길 때마다 노란 콩 알맹
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큰 콩, 작은 콩, 단단하게 잘 여문 콩, 벌레먹어 썪은 콩, 생김새가 찌그러진 콩. 한
콩깍지에서 자란 형제지만 콩의 생김새는 참 여러 가지였다.
혁이의 말에 텃밭에서 순무를 캐시던 어머니가 짠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일찍 담글란다. 할아버지가 순무 김치를 워낙 좋아하시잖니. 밑둥이가 좀 덜
들었다만... ˝
마니산 허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구름이 벗겨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마을로 내려오
던 산내음에 들판의 푸성귀들이 흠뻑 취했다.
˝준이가 요즘 뜸하구나. 할아버지에게 문안드리러도 안오고...˝
˝양반 체면에 그러겠어요?˝
˝양반? 그게 무슨 소리야?˝
˝아녜요. 아무 것도......˝
혁이는 황급히 얼버무렸다. 준이네가 고씨마을로 이사오고나서 혁이는 준이완
쭉 단짝처럼 붙어다녔었다. 할아버지의 옹기막에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옛
시절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준인 요즘 읍에 있는 병원에 다니나 보더라. 안경이 박살나 눈밑께가 찢어져 다
섯 바늘이나 꿰맸다더구나. 안경알이 눈에 들어갔음 큰일날 뻔 했다더라. 뭐 준이
말로는 한눈팔고 가다 소나무에 부딪쳤다나......걘 워낙 한눈을 잘 팔잖니? 서울뜨
기라서........˝
˝......˝
˝혁이야,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가 기운을 많이 차리신 것 같았단다.일어나셔서 신
문도 보시던 걸.˝
어머니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그래서 밑이 덜 든 순무를
저렇듯 설레임으로 캐시는 걸까? 어머니의 얼굴은 들길마다, 산등성이마다 절로 핀
구절초 마냥 아름다웠다.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머리 맡엔 신문 한 장이 곱게 접혀져 있었다. 오래 간직해 오셨는지 누
런 종이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가량가량하였다.
혁이는 살그머니 신문을 펼쳤다. 방금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두런거리는 소리
가 들렸다.
˝무슨 신문이냐? ˝
아버지가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오셨다.
신문을 들여다보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셨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옹관이라는 거구나?˝
˝옹관이라뇨? 이거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 길쭉한 항아리요? ˝
˝그래.먼 옛날 사람들은 커다란 옹기를 옆으로 뉘어 관으로도 사용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석기 시대와 삼국 시대에 옹관을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구
나. 하기야 옹기에 음식 넣어두면 쉽사리 상하지 않는 걸 봐서 좋을 것 같기는 하
다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우리 집도 보세요. 소금은 옹기에 넣어 두고 쌀은 독
에 넣어 두고 물은 항아리에 담아 먹고 계란은 옹배기에 넣어두고 김치는 자배기
에다 담그고...˝
˝그런데 왜 오래된 신문을 소중히 보관해 오셨을까?˝
˝그거야 할아버지가 옹기를 만드시니까 관심을 가지셨겠죠.˝
할아버지께서 몸을 뒤척거리더니 눈을 뜨셨다.
˝할아버지, 저 혁이에요.˝
˝으응...그래. 종갑이구나.우리 옹기막에 놀러가자. ˝
종갑이란 바로 할아버지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할아버지는 더욱 기운을 못 차리셨다.
한번도 뵌 적은 없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이야긴 할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어
왔다.
˝하, 신기한 일이지. 종갑이는 팔삭둥이였거든. 어릴 적부터 바보라고 지청구도
많이 받았는데 손재주만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거야. 종갑인 희한한 재주를 부
렸단다. 종갑이가 만든 오동보동한 토기는 최고였어.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지.
우리네야 아버지가 배워준 대로만 옹기를 만들고 구웠지만 종갑인 안그랬어.˝
할아버지는 어느새 열살배기로 돌아가 있었다.
˝종갑아 옹기막에 가자. 울 아버지가 옹기 안만들면 굶어 죽는다카더라.˝
˝......˝
˝왜 고향을 떠났나? 내가 보기 싫어서?˝
˝......아니.....˝
혁이가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난 네가 미웠어. 나보다 옹기를 잘 만드는 네가 정말 꼴 보기 싫었어.˝
새총을 만들었지.
내 앞에 서서 넌 웃고 있었어.
´이런 팔삭둥이, 저리 비켜.´
내가 몇번이나 말했지만 넌 끄떡도 안 했어.
´ 비켜, 안 비켜? 안 비키면 정말 쏠 거야?´
그래도 넌 싱긋 웃고만 있었어.난 네 얼굴을 향해 한껏 늘어난 고무줄을 놓았지.
넌 ´억´하는 비명과 함께 눈을 감싸쥐고 고꾸라졌다. 난 집으로 도망쳐 왔어. 그리고
난 사흘을 죽듯이 앓았다.
네 왼쪽 눈은 튕겨져 나간 돌멩이에 못쓰게 됐고.... 넌 저 세상에 갈 때까지도 네
눈을 그렇게 만든게 나라는 걸 밝히지 않았어.
나에게 원망 한 마디도 안 했어.
끝까지 가슴에 묻어 놓고......너 정말 팔삭둥이라서 그런 거냐? ˝
˝.......˝
˝미안하다고 꼭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혁이의 가슴 속에서 하얀 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식, 다섯 바늘이나 꿰맸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할아버지는 질흙을 개어 뭔가를 빚으셨다. 진이 다 빠진 할아버지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땀방울과 함께 할아버지의 마지막 정기와 혼을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쏟아 부은 커다란 옹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할아버지가 쉬게 될 마지막 방이었다. *
생게망게한 할아버지의 말에 온 식구가 화들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어머니는 어제
뜰아래채 빨랫줄에 베옷을 널었다. 누르끼한 베옷이 바람따라 파르르 흔들거리는
모습이 웬지 낯설게만 느껴졌었는데...
˝할아버지, 소가 왜 보여요?˝
혁이가 할아버지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가는 귀를 잡수셨
는지 엉뚱한 소리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잘 살았지. 조상님이 날 데리러 오셨어.˝
할아버지의 음성은 마른 풀처럼 까부라졌다. 할아버지의 몸도 마른 나무같았다.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그러고서 할아버지는 영 일어나시질 못했다.
˝소는 조상님을 말하는거란다.˝
아버지가 말했다. 음성은 푹 가라앉았고 빨그레 충혈된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혁이의 마음도 아침 안개 속을 헤매고 나온 듯 축축해졌다.
혁이는 씨근덕거리며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한 아이가 대나무 숲
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에 옹기옹기 모여 있던 딱새가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푸르른 대나무들이 부시시 쓰러졌다. 그러나 곧 바람소
리를 내면서 대나무들은 벌떡 일어섰다.
하늘로 날아 올랐던 딱새가 곤두박질치듯 다시 땅으로 내려 왔다. 대나무들은 저
희끼리 몸을 부딪히며 휘파람을 불었다.
˝야, 임마. 너 나한테 맞아볼래.˝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아야할 거 아냐!˝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혁이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여태까지 너를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렇게 망신을 준 거야?˝
혁이는 오늘 공부 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회시간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꿋꿋이 견디어 왔 지. 고려때 몽고군이
침입했을때 나라의 조정이 우리 고장으로 피난을 왔던 건 너희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몽고군은 물을 무서워했다면서요? 그래서 조정이 모두 강화로 피난을 온 거라
면서요? 임금님과 신하 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따라왔나요?˝
˝이 녀석아, 차례로 한 가지씩 질문을 해야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구나.˝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모두 웃어댔다.
준이는 언제나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너무 많아,
별명도 많은 아이. 서울뜨기, 백과사전,속사포,박사,네눈박이 등등....
˝그때 옹기장이들도 같이 피난을 왔대요.˝
˝응, 그렇구나......
선생님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혁이 할아버지가 그때 고향을 등지고 억지로 끌려온 옹기장이의 후손이래요. 천민
들은 살고 싶은 곳에서 마음대로 살 수도 없었대요. 양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대요.˝
반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쏠려 아깐 정말 얼굴에서 불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그 생
각을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늬네 할아버지 옹기장이인 건 사실이잖아.˝
오늘따라 준이의 하얀 얼굴이 얄밉게 느껴졌다.혁이의 주먹이 어느 틈에 준이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 바람에 안경이 박살났다. 준이는 얼굴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옹기장이 할아버질 둔 나는 상놈이고......, 대대로 너의 집은 양반이었다며?˝
˝그게 아니고......˝
눈께를 감싸쥐고 간신히 말하는 준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혁이는 대나무 숲을
나왔다.
˝짜식...난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
혁이는 눈물을 훔쳤다. 자꾸 나오는 눈물때문에 온 세상은 안개비가 내린 듯 흐렸다.
서울서 전학 온 준이는 이곳 아이들과는 다른 게 너무 많았다.
시퍼런 무청을 우두둑 잘라내고 시뻘건 흙이 묻은 무 껍데기를 손톱으로 빙빙 돌려
가며 벗겨 먹는 시원한 무맛도,새치름히 자란 풀이파리같은 싱아를 한 움큼 뽑아 질
겅질겅 씹어먹는 새금털털한 그 맛도 준이완 함께 즐길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먹어? 비위생적이야.˝
준이는 침부터 뱉었다.
지렁이 한 마리도 못 잡지만 지렁이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아이. 개구리를 보면
놀라 개구리처럼 화들짝 뛰어 달아나는 애가 개구리에 관해선 줄줄이 꿰고 있는 아이.
˝아는 게 많으면 살기가 힘들지.˝
할아버지가 늘상 하시던 말이 떠오르자 혁이는 준이가 웬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준이는 보기보다 훨씬 건강하였다.
초겨울로 접어든 들판은 무리지어 다니는 새들로 어지러웠다. 덜 떨은 들깨를 까
먹느라 몰려다니는 통에 허수아비는 혼이 다 나가 있었다.
˝어머니, 아직 이르잖아요?˝
혁이는 밭고랑에 세워진 콩다발을 두들기며 물었다. 두들길 때마다 노란 콩 알맹
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큰 콩, 작은 콩, 단단하게 잘 여문 콩, 벌레먹어 썪은 콩, 생김새가 찌그러진 콩. 한
콩깍지에서 자란 형제지만 콩의 생김새는 참 여러 가지였다.
혁이의 말에 텃밭에서 순무를 캐시던 어머니가 짠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일찍 담글란다. 할아버지가 순무 김치를 워낙 좋아하시잖니. 밑둥이가 좀 덜
들었다만... ˝
마니산 허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구름이 벗겨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마을로 내려오
던 산내음에 들판의 푸성귀들이 흠뻑 취했다.
˝준이가 요즘 뜸하구나. 할아버지에게 문안드리러도 안오고...˝
˝양반 체면에 그러겠어요?˝
˝양반? 그게 무슨 소리야?˝
˝아녜요. 아무 것도......˝
혁이는 황급히 얼버무렸다. 준이네가 고씨마을로 이사오고나서 혁이는 준이완
쭉 단짝처럼 붙어다녔었다. 할아버지의 옹기막에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옛
시절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준인 요즘 읍에 있는 병원에 다니나 보더라. 안경이 박살나 눈밑께가 찢어져 다
섯 바늘이나 꿰맸다더구나. 안경알이 눈에 들어갔음 큰일날 뻔 했다더라. 뭐 준이
말로는 한눈팔고 가다 소나무에 부딪쳤다나......걘 워낙 한눈을 잘 팔잖니? 서울뜨
기라서........˝
˝......˝
˝혁이야,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가 기운을 많이 차리신 것 같았단다.일어나셔서 신
문도 보시던 걸.˝
어머니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그래서 밑이 덜 든 순무를
저렇듯 설레임으로 캐시는 걸까? 어머니의 얼굴은 들길마다, 산등성이마다 절로 핀
구절초 마냥 아름다웠다.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머리 맡엔 신문 한 장이 곱게 접혀져 있었다. 오래 간직해 오셨는지 누
런 종이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가량가량하였다.
혁이는 살그머니 신문을 펼쳤다. 방금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두런거리는 소리
가 들렸다.
˝무슨 신문이냐? ˝
아버지가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오셨다.
신문을 들여다보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셨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옹관이라는 거구나?˝
˝옹관이라뇨? 이거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 길쭉한 항아리요? ˝
˝그래.먼 옛날 사람들은 커다란 옹기를 옆으로 뉘어 관으로도 사용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석기 시대와 삼국 시대에 옹관을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구
나. 하기야 옹기에 음식 넣어두면 쉽사리 상하지 않는 걸 봐서 좋을 것 같기는 하
다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우리 집도 보세요. 소금은 옹기에 넣어 두고 쌀은 독
에 넣어 두고 물은 항아리에 담아 먹고 계란은 옹배기에 넣어두고 김치는 자배기
에다 담그고...˝
˝그런데 왜 오래된 신문을 소중히 보관해 오셨을까?˝
˝그거야 할아버지가 옹기를 만드시니까 관심을 가지셨겠죠.˝
할아버지께서 몸을 뒤척거리더니 눈을 뜨셨다.
˝할아버지, 저 혁이에요.˝
˝으응...그래. 종갑이구나.우리 옹기막에 놀러가자. ˝
종갑이란 바로 할아버지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할아버지는 더욱 기운을 못 차리셨다.
한번도 뵌 적은 없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이야긴 할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어
왔다.
˝하, 신기한 일이지. 종갑이는 팔삭둥이였거든. 어릴 적부터 바보라고 지청구도
많이 받았는데 손재주만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거야. 종갑인 희한한 재주를 부
렸단다. 종갑이가 만든 오동보동한 토기는 최고였어.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지.
우리네야 아버지가 배워준 대로만 옹기를 만들고 구웠지만 종갑인 안그랬어.˝
할아버지는 어느새 열살배기로 돌아가 있었다.
˝종갑아 옹기막에 가자. 울 아버지가 옹기 안만들면 굶어 죽는다카더라.˝
˝......˝
˝왜 고향을 떠났나? 내가 보기 싫어서?˝
˝......아니.....˝
혁이가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난 네가 미웠어. 나보다 옹기를 잘 만드는 네가 정말 꼴 보기 싫었어.˝
새총을 만들었지.
내 앞에 서서 넌 웃고 있었어.
´이런 팔삭둥이, 저리 비켜.´
내가 몇번이나 말했지만 넌 끄떡도 안 했어.
´ 비켜, 안 비켜? 안 비키면 정말 쏠 거야?´
그래도 넌 싱긋 웃고만 있었어.난 네 얼굴을 향해 한껏 늘어난 고무줄을 놓았지.
넌 ´억´하는 비명과 함께 눈을 감싸쥐고 고꾸라졌다. 난 집으로 도망쳐 왔어. 그리고
난 사흘을 죽듯이 앓았다.
네 왼쪽 눈은 튕겨져 나간 돌멩이에 못쓰게 됐고.... 넌 저 세상에 갈 때까지도 네
눈을 그렇게 만든게 나라는 걸 밝히지 않았어.
나에게 원망 한 마디도 안 했어.
끝까지 가슴에 묻어 놓고......너 정말 팔삭둥이라서 그런 거냐? ˝
˝.......˝
˝미안하다고 꼭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혁이의 가슴 속에서 하얀 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식, 다섯 바늘이나 꿰맸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할아버지는 질흙을 개어 뭔가를 빚으셨다. 진이 다 빠진 할아버지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땀방울과 함께 할아버지의 마지막 정기와 혼을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쏟아 부은 커다란 옹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할아버지가 쉬게 될 마지막 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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