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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졸업여행

창작동화 오은영............... 조회 수 1369 추천 수 0 2006.02.11 22:43:25
.........
첫째, 자기 차례가 언제 오나 잘 보렴.
차례가 되면 너희 어깨를 ´탁´ 칠 테니까 재빨리 내 등에 올라타고.

둘째, 올라 탄 뒤엔 내 등을 꽉 잡아라.
안 잡았다가 아무 데나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야.

셋째, 내가 너희를 태우고 날아가다가 ´내려´라고 외칠 거야.
그러면 맨 앞부터 흙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라. 친구들끼리 너무 몰려 다니지 말고. 알아들었지?

바람선생님이 손가락을 차례로 세우며 양지바른 언덕을 살랑살랑 내려왔습니다. 걸을 때마다 ´사삭사삭´ 소리가 났습니다.
˝내 말대로만 하면 졸업 여행을 다들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꼭….˝
갑자기 바람선생님 걸음이 멈춰졌습니다. 수런대던 소리들도 따라서 멈춰졌습니다. 민들레 학교 졸업식에 온 모든 눈길이 한 곳으로 쏠렸습니다.

마침 사흘이나 줄곧 내리던 비가 그친 뒤라 손님들이 많았거든요.
들판 너머 들장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솜털이는 그만 얼굴을 푹 숙였습니다. 선생님이 바로 자기 앞에 서 있었으니까요. 솜털이는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기어이 졸업식에서까지 눈총을 받고 말았으니….
˝졸업여행을 떠나면 다시 엄마를 볼 수 없는 거 알지? 그러니 잔소리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졸업식에서 바람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따라해야 해. 넌 너무 호기심도 많고 불만이 많아 걱정이야.˝
엄마는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타일렀습니다. 솜털이는 바람선생님에게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엄마도 들으라는 듯.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래? 꼬옥 흙으로 떨어져야 한다.˝
바람선생님은 솜털이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어주고는 들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럼 출발한다. 나를 잘 보고 있어라.˝
바람선생님은 점점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들뜬 마음만큼 하얗게 부푼 머리를 쑤욱 빼고 있는 민들레. 그 하얀 머리들을 치며 돌아다녔지요.

투 투 투 두 둑.

민들레 씨앗들은 모두 바람선생님의 등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람선생님은 졸업반 친구들이 무서워할까 봐 부드럽게 날아올랐습니다.
˝우와, 우리가 날고 있어. 멀리 멀리 날아갔으면 좋겠다.˝
민들레 씨앗들은 바람선생님 따라 흔들리면서도 소리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바람선생님이 내리라고 하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 둘 뛰어내렸지요. 이제 바람선생님 등에는 솜털이만 남았습니다.
˝다음엔 네 차례다. 준비하렴.˝
˝싫어요. 전 선생님 따라 계속 여행할래요.˝
˝안 돼. 조금 있으면 졸릴 거야. 그 전에 여행을 끝내야 돼. 안 그러면 죽게 된다고.˝
˝괜찮아요. 어차피 난 민들레꽃으로 다시 피기 싫거든요.˝
˝아니, 왜?˝
느닷없는 솜털이 말에 바람선생님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 바람에 솜털이는 선생님 등에서 주르르 미끄러졌습니다. 재빨리 선생님 옷자락을 움켜쥐지 않았다면 떨어졌을 것입니다. ˝휴˝ 마음을 가라앉힌 솜털이는 선생님 등에 다시 올라타며 쫑알거렸습니다.
˝라일락꽃처럼 향기가 좋지도 않고, 빨간 뺨을 가진 들장미처럼 예쁘지도 않고, 저 나무들처럼 의젓하지도 않잖아요.˝
˝쯪쯧.˝
바람선생님은 혀를 차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습니다.
˝그럼 네가 내리고 싶을 때 뛰어내리도록 해라.˝
그리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솜털이를 잊은 듯 산 아래로 날아가 강바람과 함께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꼬불꼬불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푸른 강물. 솜털이가 강물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햐! 멋있다.˝
솜털이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강물은 반짝이는 아침 이슬 수천 수만 개가 모여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아른아른 흔들리는 빛 때문에 솜털이 눈까지 아른거렸지요.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다시 떴을 땐 바람선생님은 강바람과 헤어져 들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들판 가득 펼쳐진 보리밭. 눈에 시리도록 짙고 깊은 초록빛. 햇빛을 왕관처럼 머리에 이고 당당하게 서있는 싱그런 보리들. 그 당당함에 솜털이는 숨이 막혔습니다.
´나도 저런 보리였으면...´
솜털이가 부러운 눈으로 내려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보리들이 초록 허리를 꼬부렸다 폈다하며 깔깔댔습니다. 바람선생님이 지나가면서 뭐라고 속삭였는지….
´내 흉을 봤나?´
기분이 나빠진 솜털이는 목을 빼고 보리밭을 내려다봤습니다.
˝어,어.어˝
몸을 너무 숙였나 봅니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막 산등성이를 오르던 바람선생님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허우적허우적. 솜털이는 힘껏 팔을 저으며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벌써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지요.
솜털이는 어쩔 수 없이 팔랑거리며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오솔길가 돌멩이에 떨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이내 정신을 잃었지요.


얼마 후 솜털이가 정신이 든 것은 고약한 구린내 때문이었습니다. 솜털이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돌멩이 옆에서 동그란 똥덩이를 굴리며 가는 쇠똥구리가 보였습니다.
˝어휴, 냄새. 저리 좀 가. 똥 냄새 땜에 머리 아프단 말야.˝
˝똥 냄새가 어때서. 이건 우리 먹이고 우리 아기들 집인데?˝
˝너는 똥 먹고사는 게 창피하지도 않냐? 게다가 나비들처럼 예쁘지도 않
고….˝
˝뭐가 창피해? 너도 꽃을 피우려면 이런 똥이 도와줘야 하잖아….˝
˝난 꽃 안 피울 거야. 그러니 그깟 똥 도움 필요 없어.˝
솜털이가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누구에게나 할 일이 있는데…. 꽃씨가 꽃을 안 피우다니….허참!˝
쇠똥구리는 이상한 꽃씨도 다 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곤 뒷발로 쇠똥을 열심히 굴리며 가버렸습니다. 솜털이는 기분이 상해 삐쭉거렸습니다.
˝흥, 소똥 먹는 것도 일인가 뭐?˝
그 모습이 얄미웠는지 솜털이 위로 햇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 목말라.˝
몸이 바짝 마르는 느낌. 솜털이는 곧 말라죽을 것 같았습니다. 멀리 날아가서, 더 많이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억울했습니다. 곧 머리 속까지 말라버릴 것 같았습니다. 눈이 흐릿해졌습니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솜털이 자신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팔짝´
갑자기 솜털이가 누워있던 돌멩이가 뛰어오른 것입니다. 솜털이는 깜짝 놀라 돌멩이에 딱 붙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떨어진 곳이 돌멩이 위에서 잠자던 개구리 등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요.
팔딱팔딱 개구리가 뛰는 대로 엉덩이가 털썩털썩 방아를 찧었습니다. 솜털이는 정신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만 뛰라고 말하기는커녕 꽉 잡느라 두 손에 쥐가 날 정도였지요.
개구리는 풀숲을 지나 작은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웅덩이를 보자 물 속으로 뛰었습니다.
˝이젠 정말 죽었다.˝
솜털이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민들레 씨앗은 물 속에 살 수 없으니까요.
어, 어? 그런데 물에 빠졌다는 느낌이 안 들었습니다. 몸 한 쪽이 조금 축축할 뿐이었습니다. 솜털이는 살며시 한 쪽 눈을 떠보았습니다.
˝휴-정말, 다행이다.˝
개구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물가 젖은 땅 위에 떨어진 거였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마음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다시 땅이 움직였습니다! 솜털이는 엉겁결에 두 손으로 움직이는 땅을 꽉 움켜잡았습니다.
˝아얏! 누구야? 누가 내 머리를 꼬집어!˝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땅이 이제 말까지 하다니… 놀란 솜털이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 나는 곳을 보았습니다. 그, 그건 바로 지렁이아저씨 머리 위였지요.
두 번씩이나 이상한 곳에 떨어진 솜털이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놀라워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솜털이는 꽉 잡았던 손을 조금 풀면서 말했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미끄러지겠어요.˝
˝너, 넌, 누구니? 왜 내 머리에 올라가 있어?˝
지렁이는 눈을 치켜 떴지만 머리 위에 있는 솜털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난 민들레 씨앗, 솜털이라고 해요.˝
˝그런데 왜 내 머리에 있어?˝
˝나도 몰라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처음엔 바람선생님 등에서 돌멩이 위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개구리 등이였지요.˝
˝그리고?˝
˝그 개구리가 웅덩이로 뛰어들 때 난, 물가 젖은 땅에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그 젖은 땅이 바로 아저씨인 거예요.˝
˝설마, 그럴 수가?˝
˝아니, 그럼.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예요?˝
솜털이는 발끈하며 화를 냈습니다.
˝누, 누가 거짓말한댔냐? 하, 하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 그, 그랬지.˝
지렁이아저씨는 얼버무리느라 빨간 얼굴이 더 빨개졌습니다.
˝어쨌든 넌 흙으로 떨어져야 하잖아? 그래야, 내년에 예쁜 꽃을 피우지. 내가 좋은 흙으로 가서 머리를 흔들 테니 그 때 땅으로 뛰어내리렴.˝
˝흥, 보잘것없는 들꽃이 아니고요?˝
˝저런, 넌 네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는구나. 생각해 봐. 너희 들꽃이 없다면 들판은 온통 연둣빛뿐일 거야. 그럼 아마 벌도 나비도 심심해서 놀러오기 싫어할 거야. 내가 깜깜한 땅 속에서 열심히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이유가 뭔데. 들판을 예쁘게 꾸며주는 너희들이 고마워선 걸? 더 예쁘게 자라라고.˝
˝아니, 아저씬 캄캄한 땅 속에서 사는 게 억울하지 않아요?˝
˝모르는 소리. 내가 없으면 나무들이 의젓하게 자랄 수 있는 줄 아니? 들장미가 뺨을 빨갛게 물들일 수 있을 줄 알아? 다 내가 뿌리 뻗기 좋게 보드라운 땅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구. 그런 내가 자랑스럽지 왜 억울해?˝
˝그래요?˝
솜털이는 자기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지렁이 아저씨를 보고 놀랐습니다.
보잘것없는 모습에 불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솜털이는 그런 아저씨가 조금은 부러워 보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앗. 아저씨! 빨리 도망가세요. 저기, 저기.˝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서 박새가 지렁이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몸을 빨리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지렁이 걸음으로는 멀리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박새가 가지 위에서 날개를 푸드득거렸습니다. 그리곤 아저씨를 향해 곧장 날아왔습니다. 솜털이는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애타게 바람선생님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바람선생님은 손을 뻗으며 솜털이에게 다가왔습니다.
˝어서 내 손을 잡아.˝
그렇게 빨리 날아오다니 어디서 지켜 보고있었나 봅니다.
가까스로 선생님 손을 잡은 솜털이는 눈을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바람선생님 등에 타는 대신 잽싸게 박새의 눈과 눈 사이에 달라붙었습니다. 놀란 박새는 솜털이를 떼어버리려고 머리를 옆으로 마구 흔들었습니다. 그러다 지렁이아저씨를 겨냥했던 부리로 그만 땅을 찍고 말았습니다.
´휴´
아저씨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솜털이를 향해 웃었습니다.
˝고마워. 꼭 꽃피워. 내가 땅을 부드럽게 해 줄게.˝
재빨리 말하고 번개처럼 땅 속으로 사라졌지요.
솜털이는 아저씨가 무사히 피하자 흐뭇했습니다. 자기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지렁이아저씨가 좋아졌거든요. 왜 자기는 그렇게 못할까 속상해 하고 있는데 현기증이 났습니다. 박새가 다시 머리를 흔들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기 때문이었지요.
솜털이는 박새 눈썹에 꼭 매달리며 아래를 내려봤습니다. 산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온통 초록빛인 산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입가. 눈가. 볼 근처. 그 어딘가에 햇살 같은 웃음이 살짝살짝 묻어있었지요.
˝야! 우리 민들레꽃이 핀 곳이네!˝
멀리서 보니 민들레 들판도 퍽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솜털이는 놀라움에 박새 눈썹을 잡았던 손으로 눈을 비볐습니다. 그러자 그만 박새에게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어, 어.˝
허둥지둥 손을 저었습니다. 다행히 솜털이를 찾아다니던 바람선생님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이구, 그만 좀 돌아다녀라 응?˝
바람선생님은 혀를 끌끌 차며 솜털이를 안아 등에 태웠습니다. 그런 다음 햇살이 잘 드는 흙 위에 내려주고 살포시 흙을 덮어주었지요. 솜털이는 눈꺼풀이 내려 감기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내, 수도 없이 졸업여행을 시켰지만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본다. 처음 봐.˝
바람선생님의 꾸지람까지 자장가처럼 들렸습니다.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든 솜털이는 자면서도 지렁이아저씨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흙을 포근하게 해주려고 왔다갔다하며 내쉬는 가쁜 숨결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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