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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수경이(2)

창작동화 임길택............... 조회 수 1650 추천 수 0 2006.12.31 20:41:49
.........
  전기 밥솥에 밥을 안쳐 놓고 고추밭을 둘러보러 간 어머니가 복실이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수경이가 자루에다 호두를 삼분의 일쯤 채웠을 때였다.
˝수경아, 가게 앞에 아버지 꼴짐 보이더라. 어서 모셔 오너라. 아침부터 술 드시면 안 된다.˝
고추 바구니를 토방에 내려놓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바구니 속엔 붉은 고추보다 푸른 고추가 더 많았다. 그것들은 모두 바람에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엄마, 고추가 이렇게나 많이 떨어졌어요?˝
˝잔말 말고 어서 아버지나 모셔 와. 얼른 밥 먹고 논에 나가야 돼!˝
고추말고 또 무슨 속상한 일이 있는지 어머니가 언성을 높이셨다.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고 열심히 호두를 주웠건만, 칭찬 보다도 큰소리만 하시는 어머니가 수경이는 되게 얄미웠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마당 밖으로 나섰다.

막대기를 울타리가에 기대어 간단히 만들어 놓았던 성진이네 오이섶이 어지럽혀졌고, 주렁주렁 열렸던 주화네 감나무 가지들도 여러 개 부러져 있었다. 수경이는 그게 무척 아까웠다. 하지만 주화가 저번 때 올해는 자기네 감만 많이 열렸다고 자랑한 걸 떠올리고서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 주화가 문 밖으로 나오며,
˝수경이 언니야, 어디 가나?˝
하고 반갑다는 듯이 곁으로 왔다.
수경이는 너무나 뜻밖에 나타난 주화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가게로 아버지를 모시러 간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조금 전에 했던 생각 때문에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주화는 저희 아버지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러 나선 참이라 했다. 둘이는 손을 잡고 가게를 향해 걸었다.
가게 조금 못 미처에 빈 집이 있는데, 지붕 슬레이트가 홀랑 날아가 버려 서까래가 드러나 있었다. 사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상호네 집이었다. 그 동안 마당 가득 풀들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수경이 혼자서 밤중에 그 앞을 지나려면 되게 겁이 났다. 그래서 천천히 걷질 못하고 늘 뛰어서 갔다.
사학년 여름 방학 앞의 일이었다. 아침나절 비가 내리고 활짝 갠 오후, 길에서 상호가 손가락만한 굵기의 지렁이를 잡아 몰래 수경이 손바닥에 내려놓아, 질겁을 하고 맞붙어 싸운 일이 있었다. 끝내 잘못한 상호가 도망을 하여 싸움은 호지부지되고 말았지만, 개구쟁이 상호에게 수경이 같은 여자 아이들은 늘 골탕을 먹곤 했다.
그 해, 가을 농사를 지어 상호네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수경이는 오늘따라 상호가 보고 싶었다.
˝언니야, 어젯밤 일기 예보에서 바람이 우리 나라를 빠져 나갔다는데, 왜 이리 심하게 불었을까? 빠져 나가다 다시 왔을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서울에 앉아서 우리 사는 골짜기 바람까지 모두 알 수 있겠니?˝
˝........˝
수경이는 주화가 아무 말을 않자, 제가 대답을 잘했나보다고 생각하였다.
가겟집 앞에서도 어른들이 간밤에 분 바람 얘기들을 나누고 계셨다. 이장님이 방송으로 벼가 쓰러진 논을 알려 달라고 했으니 나라에서 무슨 보상을 해 줄 거라느니, 어림도 없다느니 하는 수경이에게는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어른들끼리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모셔 오려 하면 수경이는 망설여질 때가 많았다. 선뜻 말이 안 나올 뿐더러, 다른 어른들 보기에도 미안스러웠다. 그래서 어떨땐, 아무 일도 없는 양 그냥 지나치거나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가 먼저 수경이를 보고 꼴짐을
짊어지셨다. 게다가 술도 드시지 않은 것 같아 수경이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수경이는 아버지 꼴짐 뒤에 서서 오던 길을 다시 걸었다.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까만 고무신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꼴 벨 때 들어간 물이 아직도 신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수경이가 마당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벌써 밥상을 차려 놓고, 돼지와 닭에게 먹이를 주고 계셨다.
˝어서 씻고 아침 드세요.˝
소에게 꼴을 넣어 주고 나오는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말씀 하셨다.
˝나락을 생각하면 밥 먹을 정도 없소.˝
˝고추밭 아래 두 마지기 나락도 다 쓰러졌던데 웃골치도 그래요?˝
˝다섯 마지기 나락이 찬물 나는 데 조금 빼곤 다 넘어졌소. 그 논을 벌지 말자니까는 안 듣고.....˝
아버지는 손을 씻고 밥상 앞에 앉아서도 곈속 언짢은 기분을 나타내셨다.
웃골 논은 수경이네 것이 아니었다. 배나무집 할아버지네 논인데, 그 분이 지을 수가 없어 수경이네가 맡아 짓기로 한 거였다.
처음에 아버지는 고생만 한다고 짓지 말자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우겨 할 수 없이 부치기로 했는데, 모자라는 일꾼들 때문에 모 심을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다춤을 하신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남의 논을 부치면 가을에 벼를 거두어 논 주인과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그래도 부칠 남의 논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벼를 열 가마 거두면, 논 주인에게 세가마 주고 부친 사람이 일곱 가마를 갖는다. 그런데도 부쳐 달라는 논은 많고 부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벼농사를 지어 봐야 큰 이익이 없는데다 지가 집 농사짓기에도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환갑이 곧 다가오는 수경이 아버지가 마을에서 나이가 적은 축에 낄 정도로 젊은 사람이 귀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수경이 어머니가 웃골 논을 벌자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수경이에겐 여고 삼학년짜리 언니가 있다. 혼자 자취를 하며 읍에서 학교엘 다닌다.
그 언니가 제대로 학교엘 다녔더라면 대학 일학년이어야 옳다. 그러나 한 해가 늦은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서 곧장 진학을 못 한 때문이었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지만, 그 때 둘째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엘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오빠 학비 대기에도 쩔쩔매던 아버지가 언니에겐 고등학교엘 못 가게 하였다. 언니는 할 수 없이 졸업과 함께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부산의 어느 공장에 취직해 갔다. 그러나 언니는 채 두 달을 못 넘기고서 돌아오고야 말았다. 같이 간 세 친구들보다 몸이 약했던 언니는 힘든 공장 일을 견뎌 내질 못했다.
공부하기가 귀찮듯, 일도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잠을 자야 했다. 책 볼 틈이란곤 없었다.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무서운 기계 앞에서 졸지 않지, 잠이 모자라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경험 때문에 지금도 언니는 일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본다´고 하였다.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아버지는 집에서 놀기만 한다고 언니에게 마구 꾸중을 하셨다. 그래서 언니는 늘 아버지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 때 읍사무소에 다니는 오촌 아저씨가 읍사무소에서 심부름할 사람을 구한다고 집으로 연락을 하셨다. 집에서 노느니 나가서 얼마라도 버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자리가 생겼다며 언니에게 오래도록 잘 다니라고 허락을 해 주셨다. 그런 곳에 있어야 시집도 잘 갈 수 있다시면서.
오촌 아저씨의 말이 있은 다음 날부터 언니는 곧 읍사무소에 다니게 되었다. 이따금 고등학교에 간 친구들 만나기가 부끄러웠지만 참아야 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고 첫 월급을 타던 날, 언니는 다시 한번 실망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 견주어 언니가 받은 월급은 너무나도 적었다. 맡은 일이야 다르다 하지만, 힘들여 일한 대가가 그렇다 생각하니 언니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그 차이란 다른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를 하여 시험을 쳐서 들어왔고, 언니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 날부터 언니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다니던 읍사무소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돈을 벌어야 고등학교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는 것이지, 아버지와 어머니 몰래 공부한다는 게 무슨 도독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읍에 있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르는 것도 식구들 몰래 했다. 그리고 합격증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학교에 다니게 해 달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 때는 아버지도 아무 말을 못하셨다.
그렇게 다니게 된 학교라 언니는 온 힘을 다해 공부를 했다. 일학년 일학기를 지나면서 거뜬히 우등생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대학은 못 보내 준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아 놓으셨다. 여자가 대학 공부를 해서 어디다 써 먹느냐는 것이었다.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면 모르는 골자도 없을 테니 비싼 돈 버릴 필요가 없고, 좋은 자리 취직해 있다가 시집이나 잘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언니의 생각은 아버지와 달랐다.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갈수록 공부가 재미있는데 힘 닿은 데까지 해보고 싶다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께 첫번 등록금만 마련해주면, 나머지 학교 다니는 일은 알아서 하겠노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렸다.
사실 처음에는 어머니 생각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가 않았다. 곧 제대하는 둘째 오빠도 있고, 갈수록 농사짓는 일이 힘이 부쳐 왔다. 그래서 선뜻 그러마고 승낙을 못하셨다.
그런데 군대에 있는 둘째 오빠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언니를 대학에 보내 줘야 한다 하고, 남들은 해라 하여도 안하는 공부를 그토록 하려고 덤비는 게 대견스러워 힘들더라도 웃골 논을 부치자 우겼던 것이었다.




˝수경아, 자리를 해가 든 곳에 펴고 익은 고추 좀 골라 널어라, 그리고 곧 고추밭이 있는 논으로 나와야 한다.˝
˝싫어!˝
˝˝이놈의 가시나 말하는 것 좀 봐, 싫긴 뭐가 싫어!˝
참 그릇을 들고, 짚단을 진 아버지를 따라 나서려던 어머니가 되돌아서셨다.
수경이는 만날 일만 시키려 드시는 어머니가 오늘따라 더 미웠다. 게다가 수경이는 조금 전 밥상머리에서 승영니와 눈싸움을 하고 난 뒤였다.
승연이는 할머니 밥상 위에 놓인 고등어를 저 혼자 다먹다시피 하고선 이 쪽 밥상에 얹힌 것까지 달랑 집어가 버렸다. 수경이는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몇 번이고 젓가락이 가는 걸 참으며 딱 한 번 먹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남겨 주시면 먹으려고 일부러 밥을 천천히 먹는데, 그만 승연이가 낚아채 버린 거였다. 아무도 없었더라면 쥐어박아도 몇 번을 쥐어박았을 텐네 그러질 못한 게 몹시도 분했다.
먹고 싶다 말하고 고이 가져가면 서로가 좋으련만, 먼저 수경이 눈치부터 살폈다. 그러다가 수경이가 헛본다 싶을 때 일을 저지르곤 할머니한테 가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할머니는 아무도 승연이에게 손을 못 대게 하셨다. 분명히 승연이가 잘못했는데도 할머니는 수경이만 나무라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돌을 채 못 지낸 승연이가 집으로 와서 벌써 일곱 살이 되었다. 그 동안 승연이는 할머니 손에서 크다시피했다. 좋은 일거리가 생겼다 싶었는지 할머니는 승연이를 호호 불며 돌보셨다. 그래서 이웃에 놀 동무가 없는 승연이는 자라서도 자나깨나 할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승연이는 부산에서 신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큰오빠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런데 큰오빠가 혼자 벌어서는 비싼 방세를 주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며 올케 언니와 맞벌이를 하겠다고 승연이를 집에 맡겼다.
큰오빠도 처음엔 집에서 아버지와 같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아무리 장가를 들려고 해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한번 맞선을 본 적이 있었지만, 농사짓고 사는 사람이라고 퇴짜를 맞았다. 그 길로 큰 오빠는 곧장 부산으로 내려가 신발 공장에 다니다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지금의 올케 언니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큰오빠네는 쌀뿐 아니라 마늘이며 고추 같은 양념거리와, 심지어 된장, 간장까지 집에서 갖다 먹었다. 하지만, 집에는 돈 한푼 가져올 줄 몰랐다. 행여 돈 이야기라도 나오면 늘 돈이 없다고 발뺌만 하였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올케 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하다 힘이라도 들면, 말 잘 듣던 자식도 결혼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숨을 짓기도 하셨다.

지금 일으켜 세워 놓지 않으면 모두 쭉정이 나락이 되고 만다는 어머니 말씀을 한 귀로 흘리면서, 수경이는 마지못해 고추를 고르기 시작했다.
바구니 속의 고추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는데 거무스름한 고추벌레가 손등에 얹혔다. 수경이는 얼른 손을 털어 냈지만, 그것들이 몸 속으로 기어든 것만 같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수경이는 떨리는 기분을 가라앉히고는 막대기 두 개를 집게삼아 고추벌레들을 집어 옆에서 어슬렁대는 닭들한테 던져 주었다. 그러자 닭들이 웬 떡이냐는 듯 서로 먹으려 덤벼들었다. 그걸 보고서, ´나를 괴롭히는 놈들은 모두 이렇게 죽음뿐이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고추를 다 넌 수경이가 논에 가려가 챙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오자, 집 밖에서 승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도 데려가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수경이는 한마디로 싫다고 했다.
그러자 혀를 쑥 빼물면서 약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걸 본 수경이가 가운뎃손가락이 튀어나오도록 오른손 주먹을 쥐어 꿀밤을 세게 먹여 주고 뛰었다. 승연이가 우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나무라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승연이가 뭐라고 욕을 하면서 돌멩이를 던져댔지만, 수경이를 맞히기엔 어림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았는데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워 놓으신 벼는 조금뿐이었다.
수경이네 논 옆에서 갓집 할아버지도 벼를 세우고 계셨다. 인사를 드렸는데도 듣지 못했는지 돌아다보질 않으셨다. 아래는 잠옷을 입고 계셨다. 오른쪽 가랑이는 종아리 위까지 걷어올렸고, 왼쪽 가랑이는 그대로였다. 그걸 보고 수경이는 속으로 웃었다.
할아버지는 일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할아버지는 걷는 것도 편치 않은 분이셨다. 그래도 집에 일할 사람이 없어 그렇게 나와 계셨다.
˝어서 들어오너라.˝
아버지가 허리를 펴며 수경이를 부르셨다.
수경이는 바짓가랑이를 조금 걷어올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머니가 고추는 잘 널었는냐며 지마는 말로 묻고서, 어떻게 벼를 세워 묶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수경이는 처음 해 보는 이 일을 어머니처럼 잘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네 포기를 일으켜 묶어 나가시는데, 수경이는 두 포기를 세워 놓고 세 포기째 세우다 보면, 이미 세워 놓았던 것 가운데 몇 낱이 빠져 다시 논바닥에 깔려 버렸다.
일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손목과 손등이 볏잎에 쓸려 아팠다. 벼 이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줄을 처음 알았다.
고추를 널기 전, 이미 구름이 사라졌던 하늘엔 해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경이는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몸이 불편하다지만 갓집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천천히 일하셨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심기보다 더 힘든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수경이는 벼 세우는 일 앞에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짚 빼 주는 일만 하는데도 다리가 빠져 나갈 것 같았다.
참을 먹을 때, 손을 씻으러 물을 찾아 나서는 척하다가 수경이는 끝내 집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는 수경이를 못 보았을 리 없건만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도 수경이를 다시 부르진 않으셨다.
집으로 돌아온 수경이는 이리저리 텔레비전을 틀어 보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을 잤다. 그러다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깊은 숲 속 같은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까닭 없이 불안에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반대쪽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기나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수경이가 그 가운데 예쁘게 차려 입고 서 있는 아가씨같은 사람에게 물었다.
˝응, 우리는 모두 죽은 사람들로서 죽음의 집에 들어와 있어. 죽음의 다리를 건널 수 있나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야.˝
˝왜 그 다리를 건너려 하는데요?˝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다시 살아날 수가 있대. 너도 얼른 줄을 서.˝
수경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줄 끝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행여 식구들이 들어 있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참 가는데, 아버지가 장롱 속에 넣어 둔 양복을 입고 어머니 앞에 서 계셨다. 하지만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이 가려지진 않았다. 어머니 또한 새까만 손에 크림도 안 바른 채 차례를 기다리며 서 계셨다. 수경이는 왠지 아는 체를 못하고 말았다.
수경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런 차림이 맘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쑥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일찍이 왜 아버지께 좋은 옷을 못 사 드렸는지 후회스러웠다. 그러면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제 벌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만 원짜리뿐이었다.
이제 그 돈은 소용이 없었다. 죽음의 집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돈을 주머니에게서 꺼내 버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나왔다. 이제 없겠지 하고 보면 또 들어 있었다.
어느 새 돈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돈 버리는 데 정신을 쏟다 보니,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줄에 가 있었다. 그 대신 수경이 뒤로 새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 자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수경이는 뛰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오는 것도 잊은 채 앞만 보고 뛰었다.
수경이가 막 심사하는 곳에 다다르니 심판관들이 자리를 뜨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너무 늦게 왔다고 내일 다시 오라 하였다. 수경이는 내일은 나락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올 수 없으니 제발 오늘 봐 달라며 사정을 하였다.
그러자 심판관들 모두 눈이 둥그레지면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수경이는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수경이가 그들이 올려놓으라는 곳에 손을 올리니, 한 심판관이 크게 확대되어 비친 손바닥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수경이는 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가슴을 죄었다.
˝일하다가 힘들다고서 도망친 적이 있는 손 같은데요. 이 쪽으로 와서 다시 손을 펴시오.˝
심판관의 말에 수경이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세상에 그런 일들까지 손바닥에 나타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경이가 다시 손을 펴기 위해 가는데, 죽음의 다리 건너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경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수경이가 손을 펴는데 심판관이 수경이의 눈을 가리며 앞을 못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까의 판정이 틀리지 않았소. 일을 게을리한 사람으로 저 다리를 건널 수 없소.˝
수경이는 그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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