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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수경이 (1)

창작동화 임길택............... 조회 수 1323 추천 수 0 2006.12.31 20:42:39
.........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아버지께서 오늘따라 텔레비전을 켜셨다. 어머니와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던 수경이도 별 재미없는 뉴슬를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일기 예보를 맡은 아저씨가 나와서 우리 나라 쪽으로 달려오던 태풍이 방향을 일본으로 틀어 빠져 나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금 바깥에 불고 있는 바람에 이기기라도 한 듯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는 곧 코를 고셨다. 그러나 그 소리보다는 방 밖 바람 소리가 더 컸다. 바람은 호두나무 가지를 마구 잡아 당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호두나무는 바람에 끌려 가지 않으려는 듯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안간힘을 다 쓰는 모양이었다.
가지 끝이 헛간 양철 지붕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 사이사이 양철 지붕에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바람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 왔다.
˝큰일이다. 올 여름엔 해가 적네 나서 열매들이 조금 열렸는데, 그나마 이번 바람에 다 떨어진란갑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보다 걱정을 많이 하셨다.

수경이는 아까부터 똥이 마려운 걸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나하고 변소 좀 같이 가요.˝
수경이가 반쯤 까다 만 고구마순을 바가지에 그대로 놓고 일어서며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마당에 불 켜고 가면 되지.˝
˝그래도 무서워요.˝
˝우리 집인데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
그래도 어머니 손을 끌다시피 하자 어머니께서도 할 수 없으시다는 듯 수경이 뒤를 따라나섰다.
수경이가 마당에 내려서 변소 있는 곳으로 뛰자, 이제까지 조용히 엎드려 있던 돼지가 꿀꿀대기 시작했다. 돼지는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먹이만 있을 성싶으면 일어났다.
수경이네 변소는 돼지우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 똥을 누면 아래에 있던 돼지가 곧 받아 먹었다. 그래서 그 돼지를 ´똥돼지´라고 부르곤 하는데, 어른들은 이 똥돼지 고기가 시장에서 사 먹는 돼지고기보다 더 맛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수경이는 정님이네처럼 새로 변소를 지었으면 했다.그 이야기를 아버지나 어머니께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 때마다 두 분은 못 들은 척하셨다. 정님이네는 나라에서 보태 준 돈으로 남자들 오줌 누는 곳이 딸린 변소를 깨끗이 지어서 쓰고 있었다. 대신 똥을 퍼내야 할 땐 돈을 주고 읍에 있는 똥차를 불러 왔다.
똥을 한번 눈 수경이는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자 이런저런 생각을 시작하려다 돼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리가 가!˝
육학년이 되면서 수경이는 왠지 변소에 앉기 싫었다. 뒤가 근질근질 한 게 돼지란 놈이 똥구명을 다 보고서도 시치미를 뚝 떼는 듯만 싶었다. 그래서 변소에 앉자마자 돼지에게 비키라고 소리부터 질렀다. 그렇지만 번번이 돼지는 수경이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하고 싶은 대로만 했다.

이 변소 때문에 수경이가 가장 난처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올 봄 담임 선생님의 가정 방문 때였다.
먼 고장에서 새로 오신 주 선생님은 아이들 사는 것을 봐야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면 집집마다 다 둘러보셨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안 그러시는데 주 선생님은 이상한 분이었다.
하지만 육학년 다닐 때까지 아직 아무 선생님도 수경이네 집엔 와 보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지만, 그냥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선생님이 수경이네 집에서 변소를 찾으셨다. 그 때 수경이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쳐 드리자니 그렇고, 안 가르쳐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경이는 얼굴이 발개져 끝내 말을 못하고 어머니 뒤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변소가 험한데요.˝
하며 감나무 뒤로 돌아가는 변소 길을 가르쳐 드렸다.
층층대는 좁고 가파랐다. 게다가 엎드린 채 기어올라가, 그곳에서도 설 수가 없었다. 그냥 쪼그려서 오줌 눌 자리를 찾아들어야 했다. 그런데 돼지란 놈은 오줌 눌 때도 행여나 하고 꿀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은 변소에서 나와서는 다시 이곳저곳을 살펴보셨다. 변소 한 쪽 구석에 똥을 닦은 신문 조각과 공책 조각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낡은 신짝, 녹슨호미, 빈 병들이 지저분하게 들어 있는 것 다 보셨을 거였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변소가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걸 들은 수경이는 선생님이 남의 집에 와서 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공부 시간 때처럼 차근차근 말씀하셨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똥을 버리기 위해 셀 수 없는 돈을 들이고, 그도 모자라 똥 때문에 강과 바다가 더러워지고 있는데, 수경이네 변소처럼 똥을 짐승 먹이로 쓰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수경이는 낡고 낡아 늘 부끄럽다고만 여긴 변소가 그토록 좋은 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선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에도 화장실에 앉아 선생님이 변소 찾을 때를 떠올리면 뒷머리가 쭈뼛해지곤 했다.

˝변소에 들어가더니 잠을 자냐? 추워 죽겠다. 어서 나와!˝
어머니의 재촉에 그 때서야 수경이는 신문지를 비벼 밑을 닦았다. 그러고 나니 수경이도 몸이 으스스 떨렸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었다. 전등 불빛에 호두나무 잎들이 장독대 앞으로 굴러가는 게 보였다. 언제 나왔는지 곧 새끼를 낳을 복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수경이 곁으로 다가왔다. 수경이는 복실이 등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어머니를 앞서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마당의 불을 끄고는 방 안으로 들어서셨다.
˝엄마, 그만하고 내일 까면 안 돼요?˝
수경이는 이제 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졸리면 먼저 자거라. 고추 따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머니는 다시 고구마순 앞에 앉으셨다.
수경이는 제 방으로 건너가지 않고 그냥 어머니 옆에 베개를 놓고 이불을 내려 덮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어머니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주름이 가득한데다 거무스름한 얼굴이 쉰네 살이라기보다 예순 넘은 할머니 같았다. 마당에선 세숫대야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건넌방에 계시는 할머니 기침 소리도 띄엄띄엄 들려 왔다. 여든이나 된 할머니는 이제 힘이 모자라 마당에도 겨우 나오셨다. 수경이가 어렸을 땐 할머니와 한 방에서 잠을 잤는데, 지금은 조카 승영이가 할머니와 같이 잤다.
수경이는 어머니에게서 돌아눕다가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8월이 끝나려면 이제 꼭 한 주일밖엔 남지 않았다. 일기도 며칠 안 썼고, 다른 과제물도 안 한 게 더러 있느너데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서 개학을 하여 동무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집에 있으니 날마다 일을 안 하면, 놀 동무들이 별로 없어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수경이는 텔레비전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승연이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수경이는 더 자려 하다가 텔레비전에 만화가 나오는 걸 보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만화가 끝나고 선전이 나왔다. 좀더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게 서운하였다.
밖으로 나온 수경이는 마침 할머니가 마루에 내놓으신 요강을 두엄자리에 비웠다. 그러고는 수돗물에 요강을 가시고 비누칠을 하여 깨끗이 닦았다. 그런 다음 다시 할머니 방 앞에 놓아 드렸다.
수경이는 오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 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어쩐지 할머니가 누신 오줌은 제 오줌보다 더러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꾸중을 들으면서도 되도록이면 바쁜 어머니께 요강 비우는 일을 미루곤 했다.
수경이가 그 버릇을 고친 건 육한년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도덕 시간에 충청북도 음성에 세워졌다는 ´꽃동네´ 이야기를 들려 주신 선생님이 숙제를 내셨다. ´한 주일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였다. 그 때 수경이는 ´할머니 요강 비우기´를 골라 실천을 했는데, 할머니가 누구보다 좋아하셨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무얼 잘 챙겨 주시는 할머니를 좋아하기만 했지, 할머니를 위해 특별히 해 드린 일이 없었다. 수경이는 그 뒤로 열심히 요강 비우는 일을 했고, 할머니 오줌이 손에 묻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비누로 깨끗이 씻으면 그만이었다.

바람이 지난 밤보다 훨씬 누구러져 있었다. 그런데 수경이가 자는 동안 비가 내렸는지 도랑물이 제법 소리를 내며 흘렀다. 그리고 비구름이 아직도 다 물러가지 않고 하늘에 남아 아침 햇살을 가렸다가 금방 내놓곤 하였다.
돌담 따라 주욱 심어 놓은 옥수수잎들이 갈가리 찢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호두들도 마당 곳곳에 셀 수 없이 떨어져 있었다. 두 그루에 열리는 호두를 팔아 지난해엔 이십만 원이나 벌었는데 올해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수경이는 그 가운데 하나를 주워 수돗가로 가서 살을 벗겨 내고 돌멩이로 깨뜨려 알을 먹어 보았다. 물기가 많고 비릿한 게 호두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떨어진 호두를 자루에 모두 주워 담으라고 하셨다.
수경이가 자루를 챙겨다 놓고 담 밑에서 세숫대야를 찾아 호두를 주우니 승연이도 줍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래서 누가 많이 줍나 내기를 하기로 했다. 승연이가 하나, 둘 세어 나갔다. 수경이도 대야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손을 빨리 놀렸다. 그러자 돼지란 놈이 뭐 좀 안 주느냐며 꿀꿀거렸고, 외양간 소도 워낭 소리를 냈다.
세 마리뿐인 닭장 속 어미닭들도 왔다갔다하며 벌써 일어나 있었다는 듯 밖을 내다보는데 복실이는 아까부터 온데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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