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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겨울 망개

창작동화 임신행............... 조회 수 1120 추천 수 0 2007.02.22 12:29:50
.........
눈 덮인 산허리를 돌아온 눈바람은 한층 차가웠다. 손이 시려 아이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눈 쌓인 보리밭 두렁 길을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을 잔뜩 안고 아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한데˝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허약한 어깨를 아이는 조금씩 흔들며 보리밭 두렁 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빨간 망개 알같은 핏방울을 발견한 것이다.
˝!?˝
도장을 찍은 듯 또렷또렷한 짐승의 발자국이 눈에 띠었다.
노루의 발자국이었다.
빨간 핏방울은 마치 망개 알을 일부러 박아 놓은 듯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아이의 눈에 이상한 빛이 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물보라 같은 설렘이 열기로 변하여서 온몸에 뜨겁게 퍼지는 것을 느끼었다.
˝노루다!......˝
아이는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노루 발자국은 눈 이불을 쓴 보리밭을 가로질러 산밑에까지 뻗쳐 있었다. 새빨간 노루의 핏방울은 노루 발자국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눈을 비집고 웃자란 보리가 파랗게 얼굴을 내민 것이 무척이나 싱싱하게 보였다. 사래 긴 보리밭을 거슬러 엇 비슷이 기어 오른 산으로 올라갔다.
거칠고 차가운 한 자락의 바람이 아이를 덮쳤다.
´으읍!´
아이는 짧은 놀라움을 내 보이고 산허리로 돌아섰다. 산비탈에 선 밤나무 가지에는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흰 눈이 빠끔 열린 벼랑에는 산새 여남은 마리가 앉아서 흙을 차 뒤적이어 먹이를 찾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포르르 날아올랐다.
새들은 하늘 높이 올라 산 서쪽으로 날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에는 그물을 펼쳐놓은 듯 거뭇거뭇 구름이 어지럽게 떠 있었다. 아이는 눈을 뭉쳐서 밤나무를 향하여 던졌다. 밤나무 가지에 앉았던 눈이 쏟아져 내렸다. 안개꽃 이파리를 뿌리듯이 눈가루는 유독 반짝반짝 빛을 내며 쏟아져 내렸다. 산비탈 밤나무 숲을 지나 말티 고갯마루로 올라갔다.
˝으응.˝
아이는 발걸음을 힘없이 멈추었다. 별안간 발을 벗고 건너야 할 개울을 만난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 온 핏방울이 보이지 않았다. 멀거니 서서 아이는 노루의 핏방울을 찾고 있었다.
˝이기 어데로 갔노?˝
누가 옆에 있기나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참억새가 한 무더기 있는 쪽으로 갔다.
´아!´
노루는 이 곳에 와서 한동안 서서 어디로 갈까 망설였는지 발 밑에는 노루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고, 한 곳에 핏방울이 여러 방울 떨어져 있었다. 마치 빨간 샐비어 꽃 이파리 같은 핏방울이 흩뿌린 듯 떨어져 있었다. 영리한 노루는 사람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슬기를 부린 것이다. 사람의 눈을 따돌리려고 한 짓이었다. 아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 산, 하얀 눈 이불을 덮고 선 산만이 눈에 밟혔다. 눈바람이 몰려왔다. 천마산 산허리에서 급히 내려온 바람은 눈가루를 몰고 와 사정없이 때렸다.
부스스 눈가루가 하얀 모래처럼 몰려 산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는 눈바람을 등지고 서서 빨간 망개 알 같은 핏방울을 찾았지만 노루의 핏자국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별안간 눈이 부셨다. 구름 속에 갇혀 있던 해님이 구름을 헤치고 나와 얼굴을 내밀어 짱짱한 햇빛을 퍼붓고 있었다. 아이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햇빛은 안개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났다. 끝내 해님은 아이의 콧속에 숨어 있는 재채기를 불러내었다.
´아치! 아치!´
재채기를 거푸 하고는 눈을 감았다.
눈이 부셔 해님을 더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눈밭에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수리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실눈을 떴다. 수억만 개의 보석이 빛나듯 하얀 눈은 오후의 햇빛에 유별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노루가 피를 흘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가누고 비치적비치적 눈밭을 걸어갔을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빨갛게 눈을 물들인 노루의 핏방울을 사뿐 떠 손바닥에 올렸다. 빨간 망개 알처럼 빨간 핏방울은 하얀 눈과 함께 한결 더 돋보이었다. 아이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눈의 차가움보다 피로 인하여 더 시리디 시린 아픔이 손마디를 타고 와 마음을 어지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어젯밤도 아버지는 부산에서 온 사냥꾼과 눈 덮인 산과 들을 헤매다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들어왔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맵싸한 겨울 바람과 눈 진흙을 더더귀더더귀 묻혀 와서는 윗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움푹 들어간 아버지의 눈은 술과 화투짝으로 며칠 밤을 지샌 탓인지 시뻘건 불덩이였다. 살기가 잔뜩 서린 눈으로 방안을 샅샅이 훑었다. 호롱불 빛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은 실성한 사람처럼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언제나 처럼 아버지의 입가에는 허연 비지 거품을 물려 있었다. 핏발선 큰 눈을 끔벅이는 아버지를 아이는 훔쳐보았다. 아버지는 한참을 앉아 있어도 왔냐는 눈인사도 없이 어머니가 쌀쌀 맞게 고구마 마른 줄기만 다듬고 있는 것이 부아가 슬슬 치미는지 헛기침을 거푸거푸 했다. 아버지는 추운지 아랫목으로 가 쭈그리고 앉았다. 뻑뻑 소리를 내어 담배를 피었다.
´푸우푸´
짚동 같은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다가
˝한 마리만 더 잡았으면 일은 잘 되는 긴데, 그게 분명히 맞긴 맞았는데 노루 새끼가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야. 쯔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놓친 노루가 못내 아까운지 아버지는 혼잣말을 해 놓고 입맛을 쩍쩍 다셨다. 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열심히 마른 고구마 줄기를 다듬던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그런 표정으로 힐끔 아버지 쪽을 한 번 봤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와?˝
누른 이빨을 내 보이고 아버지가 계면쩍어 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꾹 누르고 어머니는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
꽁해 있는 어머니가 입을 삐죽 하는 것을 아이는 유심히 봤다.
˝고기(그것이) 어데 갔겠노. 사람 미치게 만들지.˝
아버지는 혼잣말로 또 한 번 중얼중얼했다. 어머니가 더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홱 쳐들고,
˝네 마리 잡았으면 됐지, 더 잡아 뭐 할 끼요. 뭣해?˝
뚝배기 깨는 듯한 둔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이 벙티(바보)야, 사장이 다섯 왔는데, 한 마리씩은 잡아가야 할 것 아이가.˝
참나무 껍데기 같은 거친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아버지가 윽박 지르고 나섰다.
아랫방에서 잠을 자던 할머니가 아버지의 큰 소리에 잠이 깨 밭은기침을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제발 입 다물고 잠을 자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작년에도 열 세 마리나 잡아가도 땡전 한 푼 없데요.˝
특별히 ´없데요´란 말에 어머니는 울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때, 십만 원 안 받았나.˝
바람이 빠지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찬바람이 감도는 방안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뭐요? 집엔 귀 짜부라진 십 원짜리 동전 한 닢이라도 보였소, 어이구?˝
어머니가 패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하고 한 날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었다. 겨울이면 철새처럼 자가용을 타고
오는 사냥꾼에게 노루 몰이를 해 주고 술이나 얻어먹고 다니다 몇 푼, 어쩌다 받은 돈으로는 노름판에 다 날리는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억울해서다. 손바닥만한 논밭 하나 없으면서 몇 푼 생기면 노름판에 뿌리고 마니 허리가 휘어지는 게 어머니였다.
˝시끄러브, 이번에 안경 낀 오 사장이 한 마리만 더 잡도록 해 주면 이십만 원 더 주고 날 취직시켜 준 단다. 자기 히사(회사) 경비원으로 말이다. 그러면 나 도, 오십만원 짜리 월급쟁이가 된다, 나도. 그라면 너도 팔짜 핀다 아이가. 우리 학연이도 기피(펴)고 공부 해 대학 갈 것 아이가.˝
아버지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벌쭉 웃으며 자는 척 하고 누운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지 누런 덧니를 내보이며 히죽 웃었다.
˝취직하기 전에 지서에 먼저 가요. 어제도 면 김순겅(경)이 오토바이 타고 당장잡으러 왔다 간 줄 모르요?˝
연 이틀 마을에 찾아오는 김 순경을 머리에 떠올리고 어머니는 걱정했다.
˝이 벙티가 뭐라 카노. 내가 잡혀가야 좋겄나? 네는?˝
김 순경이란 말에 아버지는 어느새 그 큰 주먹으로 어머니 얼굴을 때렸다.
˝어이구 ! 사람 살리소.˝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는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참으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롱불이 꺼졌다. 어둠이 덮쳤다. 아버지는 씨근덕거리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죽은 듯이 누어 어둠 속에 웅크린 괴물 같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있는 아버지의 횡포는 두렵고 겁이나 몹시 떨렸다. 아버지는 더듬더듬 윗목으로 가 물을 벌컥 벌컥 마시고는 다시 아랫목으로 기어 내려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누웠다. 방문이 삐거덕 열렸다.
˝이놈아, 네가 미친놈이제? 밤중에 들어 와 사람을 와 치노? 나가 거라. 나가-, 거 약한 것 어디 때릴 때가 있노?˝
할머니께서 밭은기침을 앞세우고 건너왔다. 악다구니로 했다.
˝안 그래도 노루를 놓쳐 속에 천불이 나 죽겠는데 약을 안 올 리요.˝
아버지는 일어나 할머니 말에 대꾸를 했다.
˝노루?! 네가 사람이가? 사시사철 놀고 처 묵는 주제에 불쌍한 마누라나 치고, 네가 백정이가 뭐꼬? 차라리 날 쳐라, 날쳐.˝
할머니의 목에는 가르릉가르릉 담 끓는 소리가 났다.
˝어무이는 그만 내려가 자이소.˝
아버지는 한숨을 푸우 내쉬며 말했다.
˝넌 사람이 아이다. 그거 어디 칠 데가 있노, 앙이? 살아 보겄다고 아둥바둥하는기 불쌍치도 안하나?˝
할머니는 어둠 속에 앉아 마귀 할멈처럼 찬바람을 일으키며 바득바득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는 다시 누워서는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마귀 할멈이 주문을 외듯이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지쳐 버렸는지 얼마를 그렇게 있다가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불안 속에 아이는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어리어리 어지러웠던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뿌옇게 아침이 와 있었다. 햇솜보다 보드랍고 포근한 하얀 눈이 와 있었다. 마당에는 어머니의 맨발자국이 꽉꽉 찍혀 있었다. 발자국 사이로 굵은 핏방울이 똑똑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빨강 장미 꽃 이파리 만큼이나 굵은 핏방울이 사립문까지 점선을 긋고 있었다.
˝음 - 마!˝
입밖에는 나오지 않은 절실한 부름이었다. 참으로 뜨겁고 사무친 이름이었다. 목이 꽉 잠기어 왔다. 아이는 핏방울을 따라 골목으로 나왔다, 골목 길 새하얀 눈 위에도 어머니의 빨간 핏방울은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듯한 빨강 장미 꽃잎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눈 온 아침이면 느낄 수 있는 따습고 훈훈한 풍경에 휩싸여 들녘을 바라보았다. 들녘은 새하얀 솜이불을 덮은 채 조용히 허리를 펴고 있었다. 눈 온 아침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석이네 울타리의 탱자나무에는 눈꽃이 화알짝 피어 있었다. 마을 앞 보리 논에는 개 다섯 마리가 나뒹굴고 있는 것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작은아버지 댁 점둥이가 벌떡 일어나 네 마리의 개를 데리고 눈 위를 달리는 것을 보며 아이는 웃었다. 핏방울은 우물가를 지나갔다. 학교 탱자나무 생울타리를 끼고 돌아가서 작은아버지 댁 사립문 앞에 가서야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작은아버지 댁에는 부지런한 작은아버지가 밤새 내려 앉은 마당의 눈을 쓸어 내고 있었다.
˝옴마!˝
부르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는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빨간 장미 꽃이파리처럼 살아 있는 어머니의 핏방울을 포옥 떠서 한데 뭉쳤다. 빨간 눈 뭉치는 점점 커졌다. 손이 시리고 추워 아이는 벌벌 떨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속을 뒤집었다. 아이는 빈 욕지기를 몇 번이나 했다. 어머니의 아픔이 시린 두 손바닥으로 얼얼하게 타고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햇 자주감자 같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지지리도 고생만 하는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하고 가엾다는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다.
´옴마!´
아이는 벌떡 일어섰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새하얀 눈을 덮어 쓴 천마산이 기우뚱 흔들렸다.
해님은 구름의 그물 속에 갇혀 버렸다. 노루의 발자국을 밟고 서서 바위 쪽을 보았다. 왼쪽 바위 벼랑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벼랑은 아이와 5미터는 넉넉히 떨어져 있었다. 행여 하는 생각으로 바위 벼랑을 살폈다. 벼랑 아래에 새빨간 팥알 같은 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름아름 눈에 들어왔다.
˝아!˝
아이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까만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노루의 발자취를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은 것이다. 고갯마루 오른 쪽으로 두부 모를 자른 듯 성급하게 깎인 곳에 바위 벼랑이 져 있었다. 아이는 어떻게 노루가 뛰어 내렸을까 하는 놀라움이 앞섰다. 벼랑을 빙 둘러 내려가다 작은 낭떠러지를 펄쩍 뛰어내렸다.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궁둥이가 찡하니 아팠다. 눈을 짚고 일어섰다. 하얀 눈 위에 노루의 발자국과 핏방울은 점점 굵게 나타나 있었다. 가슴에 뜨끈한 것이 뭉클 치밀어 올랐다. 아이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길을 걸었다. 핏방울은 계곡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시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노루 발자국이 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핏방울도 없었다. 산비탈에는 큰 소나무가 꽉 우거져 있어서 눈은 드문드문 보였다. 눈을 뭉쳐 소나무를 향해 던졌다. 눈가루가 수수 떨어져 내렸다. 솔잎 썩는 냄새만 습한 공기와 함께 짙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많은 눈을 소나무들이 골고루 나눠 이고 있어 소나무 숲 아래에는 눈이 없었다. 아이를 보고 토끼와 꿩이 모두 달아났다. 아이는 썰렁한 기분에 젖었다. 수북수북 쌓인 솔잎을 발끝으로 팠다. 특유한 솔잎 냄새가 물씬 일었다. 아이는 소나무 숲을 차근차근 살펴 나갔다. 갔던 길을 옆에 두고 마치 보리밭을 매듯이 그렇게 왔다갔다 했다.
빈틈없이 누비었다. 군데군데 엎드린 바위틈에는 신경을 더 곤두세우고 찾았다.
아이는 참을성 있게 낱낱이 찾아 나갔다. 어딘가 쓰러져 있어야 할 노루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노루를 만나고 싶은 치열한 열망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아이는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용케 만날 것 같은 예감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본 어머니의 붉은 피. 노루의 핏방울은 아이를 야릇한 긴장감과 끈질긴 집념으로 눈 덮인 산을 헤매게 했다. 아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큰산을 찾아 헤매었다. 눈 덮인 산을 내려오다 우연하게, 참으로 우연하게 동백꽃 꽃 이파리처럼 길죽길죽 떨어진 노루의 핏방울을 다시 찾았다. 긴장감으로 아이의 눈꼬리가 빳빳해졌다. 불길에 휩싸이듯 아이는 뜨거운 열기에 젖었다. 핏자국은 산골짜기를 가로질러 올라 포물선을 이루고 있었다. 노루가 힘겹게 올라간 것을, 작은 핏방울과 막대기를 이끌고 간 듯한 흔적으로 짐작 할 수 있었다. 아이는 가파른 산길을 미끄러지기도 하고 더러는 엎어지기도 하며 산짐승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꾸준히 핏방울을 따라갔다. 눈 덮인 벼랑은 나무 밑동과 가지를 휘어잡고 가까스로 기어올랐다. 돌 바위를 거머안고 아슬아슬하게 산꼭대기를 오를 수 있었다. 산꼭대기엔 노루가 쓰러져 있겠지 하는 부푼 기대를 안고 올라섰다. 산마루터기에는 노루가 피를 흘리고 늘어져 있지는 않았다. 아이는 산꼭대기에 올라서서야 해가 기울고 있다는 사실에 찔끔했다. 발아래 깔린 눈 덮인 산과 마을과 들녘을 보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아이는 다시 핏방울을 따라서 너덜겅 길을 비치적이며 내려갔다. 눈이 깔린 엇비슷한 비탈에서는 미끄럼을 탔다. 정신없이 내려가다 보니 산골짜기 큰 개울이 앞에 가로놓여 아이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짜면 좋노!!˝
짧은 흥분과 놀라움으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개울은 눈과 허연 얼음으로 가득 했다. 얼음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개울가에 흰 눈 위로 쏟은 듯 새빨간 피가 방석만큼이나 핏물이 들어 있지 않은가!! 분명히 노루가 눈 밑으로 흐르는 물을 먹느라고 흘린 피였다. 핏방울은 다시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개울가 바위 틈서리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버들강아지는 눈 속에서도 살이 포동포동 올라 있었다. 눈을 이고 선 망개 덩굴에는 망개가 빨강 빨강 매달려 있는 것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아이는 망개 알을 따서 입에 쏘옥 넣었다. 달고 새콤하고 떫쩍지근한 맛이 입안에 가득 괴었다. 미끄러운 씨를 일부러 와싹 깨물고 한 줌 따 쥔 망개 알을 눈에다 던졌다. 흰 눈 위에 떨어진 망개는 노루의 핏방울처럼 아니, 간밤에 어머니가 마당에 흘린 핏방울처럼 또렷이 나타났다. 아이는 망개를 땄다. 눈앞에 10미터는 더 됨직한 절벽이 아이의 발걸음을 또 한 번 멈추게 했다. 아찔하는 현기증을 맛보며 조심스레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아슬아슬 낭떠러지 아래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들렸다. 허연 빙벽 아래로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아 오금이 죄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는 은은한 산울림이 되어 눈 덮인 숲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물소리는 참으로 부드럽게 산울림이 되어 사방으로 번졌다. 아이는 오줌을 누고
싶었다. 중의 말기를 까고 오줌을 갈겼다. 샛노란 오줌 줄기는 칡덩굴 늘어지듯 치렁히 절벽 아래로 이어져 내렸다. 오줌은 흰 눈을 누렇게 물들였다. 빨간 망개알을 씹으며 아이는 빙벽 옆을 타고 절벽 아래로 힘들여 내려갔다. 벼랑 아래에는
작은 소를 이루어 맑은 물이 빙그르르 한 바퀴 돌다가 다시 개울을 타고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아이는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되돌아섰다.
˝아니!!˝
작은 누렁 바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루였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후들거려 아이는 몸을 잘 가누지 못했다. 두렵고 어리벙벙한
생각에 멍청하니 서 있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훅훅 일었다.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덮쳤다. 발걸음이 잘 옮겨지질 않았다. 노루 앞으로 다가갔다. 노루는 앞 두 다리를 접고 곤히 자는 것처럼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신비하고 그 찡한 감동 같은 것 때문에 성큼 다가서지를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죽은 노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멍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둠으로 앞이 흐렸다.
´부~엉~ 부~~엉~.´
어둠으로 덮인 산골짜기 어디에서 수리부엉이가 울었다.
굴뚝새 한 쌍이 갈참나무 가지 밑에서 우지짖고 있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으로 노루의 등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까슬까슬한 노루의 털이 야릇한 아픔으로 일어섰다. 싸늘한 냉기가 싫어 노루의 등을 왼손으로 가볍게 떠밀었다. 힘없이 노루는 옆으로 쓰러졌다. 붉은 피가 흥건히 괴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오른 쪽 앞다리와 목 밑에 상처가 나 있었다. 총알이 상처를 낸 곳을 집게손가락으로 만졌다. 손가락 끝을 타고 저릿저릿 아픔이 전해 왔다.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거칠게 진저리를 쳤다. 아이는 비로소 노루의 죽음을 생각했다.
살아 남기 위하여 그토록 험하고 먼 눈 산길을 휘돌아 오며 피를 흘린 노루...... 노루는 죽은 것이 아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잠 속에서 꾸는 꿈. 어떤 꿈일까!! 실이 끈긴 연 줄을 따라 끈질긴 긴장감과 호기심으로 쉼 없이 따라온 아이를 노루는 꿈속에서 만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감동에 사로잡히었다. 죽음은 찬 것이었다. 손끝으로 타고 오는 노루의 싸늘한 체온은 모질고 찬 얼음덩이 같았다. 노루의 죽음은 차가운 고요와 함께 아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이는 문득 죽음은 얼음 같은 흰 침묵이다 싶었다. 어둠은 더 깊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겨울이면 노루들이 어두운 밤, 마을 뒷동산 보리밭으로 먹이를 찾아오는 것을 아는 아버지. 그것을 눈감아 주지 않고 사냥꾼에게 일러 돈을 타내는 야속한 아버지. 올해는 벌써부터 부산서 외제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온 제철 회사 사장이라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다. 사장들은 아버지가 일러주는 대로 승용차를 뒷동산 밑까지 몰고 와 노루를 기다렸을 것이다. 큰 플래시와 레이저 조준기가 달린 라이플 사냥총을 조준해 놓고 보리밭 두렁에 엎드려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산 밑 바위 옆에 짐승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노루가 보리를 뜯어먹으려고 내려오는 것을 남 먼저 발견하고서는 플래시를 비치며,
˝노루다!˝
하고 불고함을 한껏 질렀을 것이다. 순간 플래시와 외제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밝혔을 것이다. 느닷없는 눈부신 불빛으로 노루가 엉거주춤 하는 사이에 성능이 뛰어난 다섯 자루의 사냥총에서 불을 뿜었을 것이다. 수놈은 그 자리에서죽고 이 노루는 두 곳에 총알을 맞아 상처를 입고 눈밭을 죽을 힘을 다해 달렸을 것이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도망치며 흘린 코피가 눈 위에 동백 꽃잎 보다 더 붉게 떨어져 있던 것과 노루가 흘린 피를 또 떠올렸다. 아이의 까만 얼굴에 겨울 달빛 같은 싸늘한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슬픔이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는 묘한 웃음이다. 어둠이 짙게 내려 잠든 산골짜기에는 철철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드높게 들렸다.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는 어두운 산골짜기를 어지럽게 서성이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 바위처럼 엎드려 꼼짝 않는 노루의 등을 어루만지다 일어섰다. 아이는 캄캄 어두운 산골짜기를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울었다. 산짐승처럼 꺼이꺼이 울며 눈 쌓인 산골짜기를 내려오고 있었다. 눈 위에 엎어지기도 하고 눈덩이가 되어 가파른 산비탈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는 부르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산을 아이는 내려오고 있었다. 눈과 어둠을 헤치고 허둥허둥 걸었다. 산을 내려 와 마을 뒷산 보리밭을 걸을 때였다.
˝노루다!˝
하는 낯익은 짧은 비명과 같은 불고함 소리와 함께 플래시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 앞을 가로 막았다. 걸음을 멈추었다.
´탕~ 탕~ 타~~앙!´
어둠을 흔드는 총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어둠 저 쪽에서 산울림이 되어 길게 울려 퍼지는 총소리를 아슴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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