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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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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4장 4절-6절.
4절-6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
기도: 주님 은혜 오늘도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위하여 오늘 이 하루도 저희들로 지나가게 해 주시고, 만나는 모든 사사건건마다 옳은 진리의 말씀으로 연관되게 도와주시고, 깨닫게 도와주시고, 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신 것 감사하옵나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나 몸 밖에서나 유혹거리가 많고, 우리의 몸 밖에서 우리의 육신이 놀랄만한 그런 사건을 들어 일으킬 때에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랑하는 진리의 종들을 붙잡아 주시고, 세상에서 어떤 큰 바람이 불더라도 그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고 진리말씀 붙잡고 주님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영의 일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는 당신의 실속 있고 능력 있고 실력 있는 귀한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세상에 들리는 소문으로 우리가 떨 수밖에 없는 그러한 소문의 바람들이 많이 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런 소문을 들을 적마다 믿음준비 잘하는 지혜로운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모든 시대의 사건을 보고 준비를 잘하는 당신의 종들을 늘 진리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불신세상 사람들은 눈이 감겨서 모르고, 듣지 못해서 모른 채 육신만을 위해서 목적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는 영의 눈이 열려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역사를 미리 알고 준비하고 또 보고 갈 수 있는 신앙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주님이 함께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역사적인 말씀을 조금 해야 되겠어요.
바벨론 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B.C. 650년에 나포폴리살이 건국을 해가지고 B.C. 536년까지 가게 됩니다. 재임 기간에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을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을 해가지고 B.C. 609년에 예루살렘을 1차 공격을 하고, B.C. 606년에 유대인들을 1차로 포로로 잡아갑니다. 이때가 유대는 어느 왕 때인가 하니 여호야김 시대입니다.
그 다음에 2차로 포로로 잡혀간 것은 B.C. 597년, 그러니까 1차로 포로로 잡혀간 지 9년 후에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 등이 잡혀갑니다.
3차로 포로로 잡혀간 것은 B.C. 568년 시드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은 소각되고 성전은 훼파가 됩니다.
4차 포로는 B.C. 581년에 왕궁이 소각되고, 이 때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고, 약 20년이 지난 B.C. 561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죽습니다.
그 후에 후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상 왕이 잔치할 때에 손가락이 벽에 나타나지요. 이래서 망하고 다리오가 이제 정복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고레스 왕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해방을 예언을 했고, 메대 다리오 때에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해방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다리오 왕 때에 그 나라에서 총리대신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다리오가 정복을 당하고 고레스가 왕이 되는데 고레스가 유대의 귀국령을 내리게 되지요. 이래서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짓게 됩니다.
또 고레스는 죽고 B.C. 522년에 아닥사스다 1세 때에 성전건축 중단령이 내려져서 15년간이나 성전건축이 중단이 됩니다. 느헤미야 때는 아닥사스다 2세가 왕입니다.
그 후에 다시금 성전 재 건축령을 내려서 성전을 완공을 하게 돼요.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완공을 하게 되는데, 또 B.C. 465년에 아하수에로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 왕은 에스더의 남편입니다.
또 B.C. 425년 아닥사스다 왕 때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비보를 듣고 예루살렘 성을 쌓게 됩니다.
이런 사건이 지나면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귀향이 됩니다.
이걸 보면 역사적으로는 외적 성전건축이 거의 다 되어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이방 강대국을 없이 하는데, 이는 곧 성도가 성전을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외부의 악한 세력들을 없이 해 주신다는 영적 계시를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때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보면 선민들이 믿음생활을 잘 못하면 외부의 것이 아주 강하게 일어나서 선민 이스라엘을 막 포로로 잡아가고 그런단 말이요. 쉽게 말하면 믿음이 약해지고 믿음이 없고 세상을 의지할 때 그렇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나 믿음이 강해지니까 외부의 것은 다 무너지고 약해지고 이렇게 됩니다. 이건 필연적인 것입니다.
B.C. 606년 1차 포로 귀환 때 여호수아(예수아)가 돌아옵니다. 그 후로 2차 3차 귀환이 있게 되는데, 1차 포로에서 근 50년 만에 3차 포로로 나가게 되고, B.C. 536년 7월에 에스라가 나가게 됩니다.
B.C. 535년에 7월에 성전을 착공을 하게 되고, 또 중단령이 내리게 됐고, 520년에 학개 스가랴가 성전재건을 하자고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서 4년 만에 성전준공을 하고 낙성식을 하게 됩니다.
B.C. 478년에 모르드개의 활동이 있었는데, B.C. 457년에 2차 귀국 후 13년 만에 많은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게 됩니다. B.C. 432년에 느헤미야가 성전 안에서 악한 자들을 다 쫓아내버리는 사건이 있어요.
이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성전을 짓기까지의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는 역사가들마나 연대가 다소 차이가 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은 비록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다’ 하는 확신을 가졌단 말이요.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로서 유대인들의 이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여려 각이한 시련과 연단을 시키신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그 어떤 사건 환경 가운데서도 선민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는 선민인 고로 우리의 영존처는 애굽이 아니고, 바벨론이 아니고 조만간에 예루살렘으로 간다’ 하는 그게 들어있단 말이요. 고향으로 언제 갈지 모르니 이 땅에서 일을 다 해 놓고 갈 마음을 갖지 말아라 그 말이요.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의 일들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이요. 언제 갈지 모른다 그 말이요. 다 내버리고 가게 되니까.
또 성전완공이 안 되고 짓는 도중이라도, 또 완공 하루 전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가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 어느 시에든지 일에 목적을 두지 말아라. 인간이 사는 목적을 일에다 두고 살지 말아라 그 말이요. 세상 것은 다 내버리고 간다 그 말이요.
그리고 ‘나는 예루살렘에 갈 자이다’ 하는 그 신앙정신이 살아 있어야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그랬었단 말이요. 우리는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니 다 버리고 가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는 목적적으로 소원성이 이 세상에 붙어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이 일만은 다 해야 된다’ 그렇게 되면 사업주의가 된다 그 말이요.
우리의 참 사명은 외적 사명이 아니고 내적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 같이 직장에 다니고 장사하고 공부하고 하는 거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거는 내적인 일에 쓰여질 하나의 이용물이라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면에 시간을 다 빼앗기면 안 된다 그 말이요. 가능한 한 내적인 일을 하는 그 일에 동참하고 협조하고 이렇게 사는 거지요. 우리의 사는 게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가난이 오던 노예가 되던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말아라. 또 일에 부담감을 갖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일을 기쁘고 만족감에서 해야 한다 그 말이요.
학교에서 학생이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졸업은 있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나 못 믿으나 천국은 다 간다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새생명을 입은 자는 다 천국을 갑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무슨 일을 하고 가느냐 하면 성전건축입니다. 즉 내적 구원을 잘 이루고 가는 이것입니다. 이 내적 성전을 잘 이루고 가라고 사건을 주는 거다 그 말이요. 구약시대의 사건은 그렇지만 하나님의 본뜻은 내적 성전을 잘 이루라고 그 사건을 그들에게 주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구약의 역사를 동원시켜서 보여준다 그 말이요.
우리가 잘못하면 시험에 빠지기 쉬운데, 무슨 말인가 하니 표면적 외적인 사건에 빠지기 쉽다 그 말이요. 그렇게 되면 구원을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집회들을 가만 보면 사람 많이 끌어 모으기 운동을 하고, 헌금을 많이 내게 하는 그런 운동을 하고 그러지요? 그거는 교회에서 할 일이 못 되는 거지요. 목적이 그런 것은 교회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천국의 이치를 배우는 곳이고, 구원을 배우는 곳이고, 진리를 배우고 깨닫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쑈 판을 벌려놓는단 말이요. 이거는 교회가 할 일은 아니지요. 교회는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서 ‘오늘은 무슨 구원을 이룰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자타의 구원을 이뤄볼까?’ 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불신세계 사람들은 임시적인 세상 것을 위해서도 죽자 사자 경쟁이라 그 말이요.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것에 대해 경쟁을 하는 것이니까 더 할 만하지 않느냐 그 말이요. 임시적인 경쟁도 목숨을 내걸고 하는데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한 경쟁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더욱 목숨을 걸고 할 만하다 그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세상경쟁이 아니라 천국경쟁을 지상에서 하는 겁니다.
계시를 가르치는 교훈은 점차성이지만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동시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보이는 성전건설 이면의 안 보이는 성전을 쳐다봐야 되겠어요.
외적 성전을 잘 지었다고 해도 내적 성전도 잘 지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적 성전 이것을 원하지 않아요. 주목적은 내적 성전이니, 내적 성전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느 성전에 더 신경을 쓰고 가야 하겠느냐 그 말이요.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은 순수한 인격성전입니다. 역사적으로야 조그맣게 성전이 지어졌지만 내적으로 보면 스룹바벨은 순수한 인격성전을 지은 겁니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많이 깨닫고 고향에 돌아와서 성전을 지었단 말이요. 순수한 인격성전.
그런데 헤롯은 스룹바벨이 지은 순수한 인격성전을 서서히 변경을 시켜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이 변경이 됐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순수한 인격성전이 헤롯에 의해 감염되어서 먹혀 들어갔다는, 변질이 됐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는 자기 속의 참 자기를 잘 단속을 해야 될 거란 말이요.
헌금은 보이는 성전에다 하지 말고 안 보이는 성전에 하라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 교회는 예산을 미리 세울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 원칙에서 예산을 세우지 않는단 말이요. 죽는 그 날까지 그 날 그 날 최선을 다할 것뿐이다.
이렇게 내적 성전을 지을 때에 외부의 것이 협조가 되기도 하고, 또 외부의 것이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또 협조 같으나 방해도 있고, 방해 같으나 협조도 있어요.
4장에서 보면 도움을 받지 않았지요? ‘우리랑 같이 성전을 짓자’ 그러니까 이질적인 자들에게는 도움을 받지 않았단 말이요.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대부분 보면 허용을 하지요. 그러나 이거는 협조 같은 방해입니다. 협조 같은 방해야.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한 자들을 성전 짓는 일에 동참을 시키지 않으니까 그 후에 그들의 계략으로 인해 성전전축 중단령이 내려지지요.
우리는 협조 같은 방해를 잘 알아야 되겠어요. 협조한다고 해서 쌍 손 들고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야, 우리가 얼만큼 협조했다. 그러니 그 성전 내놔라’ 그런 일이 생긴단 말이요.
우리가 내적인 면을 잘 봐야 되거든. 그러니까 참 성전은 어떻게 지어진다고 하는 이걸 볼 줄 모르면 서로 싸우고 두 조각이 나고 그렇게 된단 말이요.
그러면 여기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함께 성전을 짓자고 한 그들과 손을 잡지 않은 결과로 성전건축 중단령이 내려졌는데, 이렇게 됐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 봐라’ 하며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원망할 거란 말이요. ‘도와주려고 그럴 때 같이 힘을 모아서 지었으면 성전이 빨리 지어졌지 않았겠느냐’ 하면서 그 말이요.
그러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한 자들을 허용을 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성전을 못 짓게 됐는데, 여기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자기들이 한 처사로 인해 성전건축 중단령이 내려졌음에도 ‘우리가 그들을 참 잘 막았다’ 그렇게 될까요, 아니면 그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성전을 빨리 완공시킬 걸 그랬구나’ 이렇게 후회를 할까요? ‘성전건축 중단령이 내려졌더라도 그들과 손을 잡고 일을 안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참 잘 됐다’ 이게 돼야 된단 말이요.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하면 보통 보면 후회할 거란 말이요. 우리는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은 ‘안 이루어졌더라도 그 일만큼은 내가 참 잘 했다. 밥을 굶었더라도 그 일만큼은 내가 참 잘 했다. 돈은 못 벌더라도 내가 진리대로 한 것만큼은 참 잘했다’ 이렇게 돼야 된단 말이요. 일이 안된다고 해도 진리만은 굽히지 말라 그 말이요. 이게 신앙입니다. 진리를 굽히고 일이 됐다면 그거는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의 심판이란 말이요. 진리는 굽히면 안 된다. 일이 안 돼도 좋으니 진리를 굽히면 안 된다.
또 방해 같으나 호응이 있다고 하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방해 같은 호응, 호응 같은 방해. 우리가 여기서 이걸 깨달을 수가 있겠지요? 탄압보다도 무서운 것은 호응입니다. 박해와 탄압보다도 무서운 것은 호응. 그걸 잘 봐야 돼요. 자칫 잘못하면 속아 넘어가고 망한단 말이요.
우리가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박해와 탄압에서 넘어갔습니까, 호응에서 넘어가 버렸습니까? 호응에서 넘어가 버린 거지요. 그러니 호응이 무섭단 말이요. 박해 탄압 이것보다 호응이 더 무섭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되겠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역사 속에서 호응 같으나 박해가 있고, 박해 같으나 호응이 있는데, 저희들이 사건을 보고 절대로 진리만음 굽히지 말고, 설령 일이 좀 못되더라도 진리 굽히지 않고 나갈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참 옳은 신앙을 가진 당신의 종들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어떤 환난 핍박이 오더라도 진리만은 놓지 않고 진리를 굽히지 않는 당신의 옳은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함께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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