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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돈짱이 재채기를 했을 때,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야라가세 패거리 4인조.
˝에이, 더러워! 박테리아 세례에 대한 보답을 해 주마.˝
그게 시작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 .
어휴, 야라가세 패거리가 또 돈짱을 괴롭히기 시작하는군.
˝어이, 돈짱!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냐?˝
˝그림 그리기 대회는 끝났어. 끝났다구.˝
˝주스나 좀 사 오지 그래.˝
˝그렇지만, 난, 아직 다 못 그렸는데. . .˝
˝와우, 이거 대단한데!˝
˝야, 이거 대단한 예술 작품이야!˝
나랑 세이야랑 요칭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척했다.
말참견이라도 했다가는 우리까지 당할 테니까.
그런데 돈짱, 용기는 다 어디 갔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그만두지 못해!˝ 하며 대들어 버려.
´눈에는 눈!´ 야라가세 얼굴에
물감을 쳐발라 버려!
어? 내가 마음 속으로 외친 소리를 들었나?
때마침 담임 선생님이 왔다.
˝어머나, 그림이 이 지경이 되다니.˝
돈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들이 도망치는 것도 못 봤나?
선생님도 정말 둔하군.
다음 날 아침, 운동장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앞을 지나가는데,
˝짠짜라 짠
박테리아 춤
짠짜라 짠. . .˝
이상한 노래가 들려 왔다.
무슨 소릴까. . .
살짝 엿보는 순간,
˝아하, 손님이 오셨군. 이리와서 마음껏 구경하고 가시지 그래!˝
돈짱이 춤을 추고 있었다.
˝짠짜라 짠짜라
자, 손님께서도 같이!˝
˝아, 아니 난 그냥. . .˝
그 때였다.
˝안녕!˝
아, 세이야 목소리다!
˝안녕!
정말 때맞춰 잘,
아니, 좋은 아침이야!˝
휴, 위기 일발, 탈출 성공!
그 날 수업이 끝난 뒤에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혹시 여럿이서 떼지어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겠지?˝
슬쩍 돈짱을 쳐다본 순간,
야라가세와 눈이 딱!
이크, 이거 큰일났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나빠요.˝
어휴, 선생님. 그러면 누가 손을 들고 일어서서,
˝저기, 야라가세가 말이죠. . .˝ 하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걸요. 절대 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야라가세 패거리가 무섭게 째려보고 있단 말이에요.
기분 나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야라가세 패거리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러바친 거, 너지?˝
˝일러바치다니, 뭘?
아, 아침에 그 일?
그게 뭐 남을 괴롭힌 거라구.
안 그래? 하하하. . . ˝
얼렁뚱땅 둘러대며 발뺌은 했지만, 나를 바라보던 돈짱의 눈빛.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한, 원망이 가득 찬 눈빛.
언짢은 기분이 사방에 가득 차 오르는 것 같았다.
˝이놈의 도둑 고양이 새끼!˝
돈짱 때문이야.
˝이노옴!˝
어디선가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고양이랑 놀려면 재롱을 부리게 하든가 나무타기를 시킬 일이지.˝
포장 마차에서 오뎅을 파는 아저씨였다.
˝뭐 짜증나는 일이 있나 본데, 잘 됐다. 이리 와서 이거나 도와 주거라.˝
영차, 영차, 내가 왜 이런 일을,
에이씨, 이것도 모두 그놈 때문이야.
˝한 열흘 장사를 안 나왔더니 그새 이 꼴이 되었구나.
여긴 강변이지 쓰레기장이 아닌데 말이다. 안 그러냐?˝
그렇긴 해도, 어째서 오뎅 파는 아저씨가 쓰레기를 치운담?
아저씨가 어묵 한 접시를 주었다.
˝다른 때는 강둑에서 채소를 가꾸는 할아버지들하고 쓰레기 청소를 하는데.˝
강변 가운데 조그만 밭이 있었다.
˝오늘은 네가 도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아저씨가 포장마차에 불을 밝히는 걸 보면서,
나는 어묵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학예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세이야와 요칭은 소품 준비, 나는 지장 보살 역을 맡았다.
대사가 ˝좋아, 좋아, 훌륭해.˝라는 말 한 마디뿐이니까,
뭐, 괜찮겠지.
야라가세 패거리는 자기들이 먼저 돈짱과 함께 다섯 마리 원숭이 역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건 연극 연습이야.˝
야라가세 패거리는 드러내 놓고 돈짱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담임 선생님이 달려와 뜯어말리면,
˝야아! 우리 연기가 진짜 같았나 봐.˝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돈짱의 이마에서 피가 났을 때도,
운동장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서 떨어져서 그렇다고 야라가세 패거리가 우기는 바람에
진실을 밝혀 낼 수 없었다. 돈짱이 그 큰 나무에 올라갈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역시 다친 사람을 괴롭히기는 어려웠나 보다.
모처럼 돈짱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즈음 기분 나쁜 사건이 생겼다.
치카코의 돈이 없어진 것이다.
˝학교에 돈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물 살 시간이 학교에서 돌아갈 때밖엔 없단 말이야.
오늘이 할머니 생신이라 선물을 사 드리려구. . .˝
치카코는 절대 기죽는 법이 없는 계집애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어요.
짐작이 가는 데가 있는 사람은 선생님에게
살짝 귀띔해 주세요.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쉬는 시간이 되자, 곧바로 탐정 놀이가 시작됐다.
˝체육 시간에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나간 사람. . .
옳거니,
저기 저 4인조로군요.˝
˝점심 시간에 혼자 교실에. . ., 아하,
바로 돈짱 아닙니까?˝
˝범인은 놀랍게도 훔친 돈을 붕대 속에 감춰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치 텔레비젼의 추리극을 보듯이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선생님이 치카코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어 주었다.
˝학교에 돈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지 않아서, 제가 치카코 지갑에서 돈을 살짝 빼놓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어휴 열받아.˝
˝재수없어!˝
˝미안해요,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치카코, 덜렁쟁이 계집애.˝
˝왠 소동이야!˝
˝집안일을 학교에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구!˝
˝순 저질!˝
˝피해만 끼치고!!˝
˝속터지네.˝
˝웃기지 마.˝
˝열받아 !˝
그 날 수업이 끝난 뒤에 치카코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 교과서랑 노트 감춘 사람, 누군지
어서 돌려 줘.˝
그러자,
˝너네 엄마가 범인 아니냐!˝
누군가 말하는 바람에 모두가 낄낄대며 웃었다.
˝어제 일로 너희들 모두를 기분 나쁘게 했던 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몰래 심술 부리는 것은 너무 비겁해.
할 말 있으면 정정 당당하게 말해 주면 좋겠어.˝
그러자 이번엔 야라가세가 일어섰다.
˝우리를 도둑으로 몬 건 비겁한 게 아니고?
왜 나쁜 일이라면 뭐든지 우리야?˝
교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녁 때 나는 슈퍼로
심부름을 갔다.
계산대 앞에서 떨어뜨린 백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따라가니, 돈짱이 있었다. 돈짱은 선반에서 물건을 집어 얼른 옷 속에 감추었다. 순간 나는 못 본 척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 .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계산대 뒤의 가시 거울을 힐끗 보니, 야라가세 패거리 4인조와 돈짱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 뒤에 가게를 나왔는데도 바로 앞 어둠 속에서 4인조와 돈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도 한 자루 가져.˝
느닷없이 샤프 한 자루가 내 손에 쥐여졌다.
˝피, 필요없어.˝
˝가지라고 했잖아!˝
그러고는 내 팔을 비틀어 올렸다.
˝우리들을 도둑놈이라고 부르고 싶었겠지?
그 보답이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도망치지도,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 다음 날부터 야라가세 패거리는 이따금씩 내게 다가와서는 샤프를 힐끔거리며 보곤 했다. 너도 물건을 슬쩍한 놈이야. 씨익 웃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이야와 요칭에게는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세이야와 요칭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큰일인데, 샤프를 돌려 줘야겠어.
˝이거. . .˝
야라가세에게 샤프를 내미는 순간,
내 목에 팔이 휙 감기더니 그들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이거야말로 누가 봐도 사이좋은 6인조다.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려는 거지?
안다니까. 우리가 친구라는 징표잖아.˝
그러고는 내 귓가에 섬뜩하게
날카로운 샤프 끝을 들이댔다.
찰칵, 찰칵, 찰칵. . .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토요일 밤, 그 때 그 슈퍼에서 기다리겠어.˝
팔이 풀려 돌아다보니, 거리 있던 모두가 내게서 눈을 돌렸다.
세이야와 요칭은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가 돈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모르는 척했던 것처럼.
꽈앙!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분하고 비참하다.
그런데도 내 얼굴은 스마일 배지처럼 웃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돈짱하고 똑같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행동했을 뿐인데.
이대로 가다간 나도 돈짱처럼 야라가세 패거리의
먹이가 되고 말 거야.
찰칵, 찰칵. . .
그 소리만 떠올리면 명치끝이 찌르르 아파 온다.
학원 따윈 아무려면 어때.
집에 가기도 귀찮아.
어느 새, 강변에 와 있었다.
저녁 해가 강물 위에 반짝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 .
푸득 푸득 푸드득. . .
돌아보니, 까마귀들이 날아간 자리에 돈짱이 서 있었다.
˝고양이 발에 낚싯줄이. . .˝
˝고양이고 뭐고 간에, 샤프 어떻게 할 거야!˝
돈짱의 얼굴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고양이를 확 집어던져 버렸다.
˝어이, 꼬마양반.
오늘도 기분이 무척 안 좋은가 보지?˝
˝그래, 고양이를 괴롭히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니?
오히려 더 나빠졌을걸.˝
포장 마차 아저씨가 말한 대로였다.
˝그래 봤자 또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어질 거야.
그러니 그러면 그럴수록 네 속만 더 상하겠지.˝
˝얘가 날 많이 도와주고 있어. 쓰레기도 치워 주고,
접시도 닦아주고 그렇지?˝
돈짱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돈짱 너, 이 아저씨하고 친구였구나. 학교에서 당한 안 좋은 일을 여기 와서 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께 말씀드려 봐야지.
그러나. . .
˝그러면 샤프만 돌려주면 되잖니.
그런 녀석들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게 가장 좋아.˝
그것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아버지의 피곤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마디 더 보탰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그런 애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 않겠니?˝
돌려 줄 수 있으면 벌써 돌려 줬죠!
내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라구요!
벽을 걷어 차자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누나는 지금 시험 기간이란 말이야.˝
만화책을 구겨 던졌다.
˝아버지 쉬실 때 조용히 못 하겠니!˝
으아아!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생각한 순간, 배가 아파 왔다.
´아프다고 하면 야라가세가 봐 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점심때가 좀 지나서 돈짱이 찾아왔다.
˝그 샤프 돌려 줘.˝
슈퍼에 돌려 주고 잘못을 빌겠단다.
˝그랬다간 걔네들이. . .˝
˝해 보겠어. 걱정 마.˝
포장 마차 아저씨한테 좋은 방법이라도 얻어 들었나?
월요일이다.
돈짱의 눈 주위에 멍이 들어 있었다.
˝어이구야, 판다인 줄 알았더니 돈짱이네.˝
˝돈판다, 돈판, 돈판. . . ˝
야라가세 패거리가 마구 놀려 댔다.
덕분에 녀석들이 내 쪽은 포기 한 것 같다.
휴우, 한숨 돌린 나는 세이야와 요칭에게
착 달라붙어서 웃을 수 있었다.
청소 시간에 게으름을 피우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야라가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돈짱네 엄마다.˝
˝뭐 하러 온 거야. 너네 엄마?˝
˝돈짱이 불렀잖아. 오줌 쌌다고.˝
˝아하, 그래! 그럼 기저귀 갈아 줘야지.˝
4인조는 돈짱을 바닥에 깔아 뭉갰다.
˝야, 그만둬, 너희들!˝
치카코가 목청을 높였다.
˝정말 저질이라니까!
얘, 거기 남자애들, 너희들이 어떻게 좀 해 봐!˝
치카코가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치, 치카코 말이 맞아!
바보 같은 짓 좀 작작 하라구!˝
이렇게 마음 속으로 호통치는 순간,
˝꺅!˝치카코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구 저런, 돈짱의 바지가 흘러내려와 있었다.
치카코가 담임 선생님을 데리고 왔을 때는 이미
돈짱이 사라진 뒤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라.˝
˝그 녀석이 보여 주겠다고 그래서. . ., 났다고 그러면서. . .˝
˝나다니, 뭐가?˝
그 때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야라가세의 앞가슴 주머니에서 샤프를 빼 들었다.
˝너희들한테 물어 볼 게 있다. 따라와.˝
다음 날, 돈짱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부터 연극 총연습이 시작되었지만
돈짱은 여전히 결석이었다.
학예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일요일이었다.
나는 소푼 준비를 맡은 세이야와 요칭을 따라
강변으로 갈대를 꺾으러 갔다.
˝어이, 꼬마야!˝
포장 마차 아저씨가 내게 손짓을 했다.
으이구, 또 쓰레기 치우라고요?
오늘은 참아 주세요.
˝손님 바람잡이 좀 부탁하자. 일요일인데도
아주 형편없구나. 옜다, 여기 아르바이트 삯.
따끈따끈한 어묵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아이 요새 통 안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니?˝
˝돈짱 말씀이세요? . . . 학교에도 계속 안 나와요.˝
˝히히, 바지 벗겨진 일로 충격을 받았나 봐요.˝
요칭의 말에, 아저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 . ´
우리는 먹던 어묵을 가만히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 애가 괴롭힘을 당해도 너희들은 모두
언제나 모르는 척했다지?˝
˝. . . . . ˝
˝왜 안 도와 줬니?˝
˝그랬다가는 우리까지 당하는 걸요.˝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 그 애를 괴롭히게 도와 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여럿이서 한 아이를 아프게 하는 거라구.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 . . . . ˝
때마침 한 쌍의 젊은 손님들이 와서 우리는
도망치듯 포장 마차를 빠져 나왔다.
˝우리 물수제비뜨기 시합하자.˝
˝좋아, 그러자.˝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벗어 던지기라도 하듯
작은 돌멩이를 강물 위로 힘껏 던졌다.
통, 통, 토토토 . . . .
돌멩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물 위를 달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 기뻐하다 또 던지고 ˝좋았어!˝ 하면서
펄쩍펄쩍 뛰다가 또 힘껏 던지고. 우리들은
유치원 아이들처럼 마냥 신이 나서 웃고 떠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돈짱과 마주쳤다. 돈짱은 까마귀들과 싸우고 있었다.
퍼덕퍼덕 . . . . 한 마리가 떨어졌다.
˝에이,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돈짱은 그놈을 치고 치고 또 쳤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까마귀가 움직이지 않자, 그제야 돈짱은 강 쪽으로 걸어갔다.
물가에 저번의 그 고양이가 까마귀한테 심하게 쪼였는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학예회에는, 나오지 그러니 . . . . ˝
요칭이 말을 걸었지만 돈짱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학예회 날이 되었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돈짱은 긴장한 탓인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 역시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막이 올랐다. 원숭이 네 마리가 지장 보살에게 바친 감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그 때 대장 원숭이가 나타나 힘으로 차례차례 그것을
빼앗는데. . . . 어, 빼앗아야 되는데, 어어. . . .
다섯 번째 원숭이가 쓰러뜨리면 일어나고 쓰러뜨리면 또 일어나서
대장 원숭이한테 사납게 달려들었다.
돈짱이 야라가세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다른 원숭이들은 연극이 각본과 다르게 돌아가니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대장 원숭이도 진지해졌다. 엉겨붙은 두 마리 원숭이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다섯 번째 원숭이가 넘어지면서 내 발에 부딪쳤다.
˝아야!˝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면 벗겨졌어!˝
내 속삭임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돈짱은
다시 대장 원숭이에게 달려들었다.
대장 원숭이가 몸통박치기를 당하고 웅크렸다.
돈짱은 대장 원숭이의 등 뒤로 돌아가 바지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나는 돈짱이 뭘 하려는지 알았다.
˝이 멍청아, 그만 둬, 그만두라니까!˝
야라가세가 소리치는 순간, 하양 엉덩이가 불쑥 드러났다.
´옳지, 단숨에 해치워!´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휘익! 바지가 날아오르자 와아! 하는
웃음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잘했군, 잘 했어. 훌륭해.˝
연극 마지막에 해야 할 대사를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2주 뒤,
돈짱은 전학을 갔다.
2학기 마지막 날이었다.
˝갑자기 전학을 간 아이가 있는데요. . . . ˝
오랜만에 아버지가 집에 일찍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학부모 회의에서 들은 얘기를 꺼냈다.
˝전학 간 이유가 도둑질 때문이래요.
우리 애가 샤프를 억지로 떠맡았던 일 있죠?
그것말고도 네댓 번 더 있었나 봐요.˝
˝그런데 그 앨 괴롭히던 아이가 도둑질을 시킨 것 같다고
담임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그 몹쓸 애가 누군지 이제 모든 부모가 다 알게 되었죠.
그러니까 야라가세 씨가 갑자기 얼굴색이 싹 변해서는 . . . ˝
˝그 애가 우리 아이를 부추긴 겁니다!
우리 애는 용돈이든 뭐든 부족한 게 없어요!
걔가 슬그머니 전학을 가 버린 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글세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는. . .˝
어머니는 내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 아이한테 아무 문제 없이 끝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든 게 끝났다.
내 머릿속까지도.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바람 좀 쐬면 나아질까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렇다! 돈짱은 우리에게 절망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도움을 청했었는데.
그랬는데도 우리들은. . .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극이 끝난 뒤, 평가회는 남을 괴롭히는 것에 대한 토론으로 바뀌어 버렸다.
무대 위의 사건이 자아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많은 의견이 나왔다.
˝야라가세 패거리가 돈짱, 아니, 도바시에게
호스로 물을 뿌리는 걸 봤습니다.˝
˝그것은 장난이었어요. 절대 괴롭히려 했던 게 아니라구요.˝
˝급식 시간에 도바시의 국에다가 화장지를 집어 넣고 먹으라고 한 적도 있죠?˝
˝기억이 안 납니다.˝
˝도바시도 싫어했고. . . 그건 분명히 돈짱을 괴롭히는 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식의 대답이 되풀이되자 우리들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도바시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까?
싫다는 말을 확실히 하지 않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치카코의 이 한 마디에 우리 토론은
꼬리 잘린 잠자리처럼 끝나버렸다. 그 뒤로 돈짱은 전학 갈 때까지 학교 안에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차역 화장실에서 4인조와 돈짱이 나왔다.˝든가,
˝4인조와 돈짱이 오락실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 .
˝어이, 우리 기운 센 꼬마가 또 도와 주러 왔구나!˝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또 포장 마차 아저씨에게 붙들려 있었다.
˝저, 아니. . . . 그게 아니고. . . ˝
˝기분 좋군, 역시 우리 나라 장래는 밝단 말야.
올해의 마지막 대청소. 장, 힘껏 일합니다.!˝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들도 기운이 넘쳐 보였다.
엉겁결에 강변 쓰레기 청소에 말려들어간 나는,
˝이영차!˝ ˝으이가!˝ ˝으차차!˝ ˝여엉차!˝
땀 흘리며 즐겁게 일하는 사이에, 한 사람의
산타 클로스가 되어 있었다.
˝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했구나.˝
˝힘도 덜 들고 아주 가뿐하게 끝냈어.˝
˝우리들이 밭에서 키운 고구마란다.
실컷 먹어라.˝
˝그 애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포장 마차 아저씨가 말했다.
˝물벼룩이라는 생물에 푹 빠져 있다더구나.
장차 물벼룩 박사가 되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유도부에 들어가겠다면서
아주 의욕이 대단하더구나.˝
뿌직뿌지직, 타오르던 장작불이 탁 튀면서 불꽃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 애도 너도 십 년 뒤에는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있겠지.˝
봄학기가 시작되자 하루하루 다가오는 졸업 탓에 반 전체가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모든 일에 ´초등학교 마지감´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돈짱에 대한 생각이 손톱 끝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돈짱을 잊어버린 걸까.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서 강가에 갔다.
˝이제부터 대목인데, 망할 녀석들이 이 지경을
만들어 놓았단다.˝
포장 마차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어제 이 곳에서 중학생 패거리들이 한 아이를 때리고 있지 않겠냐.
내가 말리려니까, 당신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하고 대드는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녀석들을 한방에 쓰러뜨려 놓고는,
할 말 있으면 부모님 모시고 다시 와! 그랬지.˝
그리고 좀 전에 와 보니 이꼴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걸 보고 모르는 척하면 안 되지.
그러면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아.˝
˝하지만 그 대신 이 모양이 됐잖아요. . . ˝
˝그렇다고 해도 역시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되는 거야.˝
마음 속에 간직한 등불이 꺼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니?˝
˝어, 어제 그 아이로군.˝
둑 위에 야라가세가 서 있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
그러자 야라가세는 모르는 척하고 가 버렸다.
˝저 아이도 중학생과 한패였어요?˝
˝아니, 재가 맞고 있던 아이라니까.˝
통 통 통. . .
쿵 쿵 쿵 쿵 . . .
겨울 하늘에 망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강변 밭의 할아버지들이다.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전보다 더 멋진
포장 마차가 되겠는걸!˝
˝그렇구 말구, 목수에, 함석장이, 간판장이.
다 예전에 익힌 솜씨들이지.˝
˝덤으로 오뎅 냄비도 하나 새로 만들어 줄까?˝
철물점 하던 할아범도 데리고 올 테니까.˝
그러는 동안 포장 마차는 차츰차츰
제 모양을 갖춰 갔다.
야라가세가 그런 꼴을 당했다니.
학교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립 중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강가 저 편이 소란스럽다.
까마귀 떼에 덤벼드는 검은 물체. . .
그 도둑 고양이다!
강가 저 편에서 고양이가 달린다. 뛰어오른다.
˝와아!˝
나도 달린다. 뛰어오른다.
갑자기 멈춰 선 도둑 고양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살아 있었구나. 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나는, 나는 . . .
어쩌면 좋을까!˝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교생이 체육관에 줄을 맞춰 앉아
졸업식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내 초등학교 생활도 끝이다.
˝자, 그럼 6학년, 아니, 졸업생 여러분, 일어나서
퇴장해 주세요.˝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는 . . . .
˝자, 잠깐만, 제 . . .˝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의자 위에 서 있었다.
체육관 안의 모든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 . . ., 저는 . . . ˝
˝6학년 1반 덜렁이입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와아!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
다시 주저앉고 싶었지만 돈짱을 생각하며 참았다.
˝저는, 용기가 없어서 . . .,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 . .˝
˝친구는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전학 갈 수밖에 없었는데 . . .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 .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서 졸업을 하게 되는 게. . . , 이런 기분을
가지고 중학생이 되는 게 싫어서. . . , 그래서. . . ˝
그 때, 내 바지가 살짝 잡아당겨지며,
˝지퍼!˝ 하는 소리가 드렸다.
˝어?˝
내 바지의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체육관을 뛰쳐나온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눈을 맞고 있었다.
박수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웅성거림이 아직도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꼴불견이 되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하다.
그런데 가슴은 후련하다. 이걸로 된 거야.
˝정말 잘 해냈어, 너. . .˝
발 아래로 데구루루 내 신발이 구러 왔다.
돌아보니 야라가세가 서 있었다.
˝나도 말야. . . . . .˝
야라가세가 내게 말을 거는 순간,
세이야와 요칭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 중학교에 가서. . .˝
야라가세는 뭔가 아쉬운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뒤돌아섰다.
나는 마음껏 심호흡을 했다.
오싹하도록 차가운 눈이 입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끝.(나한테는 시작!) (*)
˝에이, 더러워! 박테리아 세례에 대한 보답을 해 주마.˝
그게 시작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 .
어휴, 야라가세 패거리가 또 돈짱을 괴롭히기 시작하는군.
˝어이, 돈짱!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냐?˝
˝그림 그리기 대회는 끝났어. 끝났다구.˝
˝주스나 좀 사 오지 그래.˝
˝그렇지만, 난, 아직 다 못 그렸는데. . .˝
˝와우, 이거 대단한데!˝
˝야, 이거 대단한 예술 작품이야!˝
나랑 세이야랑 요칭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척했다.
말참견이라도 했다가는 우리까지 당할 테니까.
그런데 돈짱, 용기는 다 어디 갔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그만두지 못해!˝ 하며 대들어 버려.
´눈에는 눈!´ 야라가세 얼굴에
물감을 쳐발라 버려!
어? 내가 마음 속으로 외친 소리를 들었나?
때마침 담임 선생님이 왔다.
˝어머나, 그림이 이 지경이 되다니.˝
돈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들이 도망치는 것도 못 봤나?
선생님도 정말 둔하군.
다음 날 아침, 운동장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앞을 지나가는데,
˝짠짜라 짠
박테리아 춤
짠짜라 짠. . .˝
이상한 노래가 들려 왔다.
무슨 소릴까. . .
살짝 엿보는 순간,
˝아하, 손님이 오셨군. 이리와서 마음껏 구경하고 가시지 그래!˝
돈짱이 춤을 추고 있었다.
˝짠짜라 짠짜라
자, 손님께서도 같이!˝
˝아, 아니 난 그냥. . .˝
그 때였다.
˝안녕!˝
아, 세이야 목소리다!
˝안녕!
정말 때맞춰 잘,
아니, 좋은 아침이야!˝
휴, 위기 일발, 탈출 성공!
그 날 수업이 끝난 뒤에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혹시 여럿이서 떼지어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겠지?˝
슬쩍 돈짱을 쳐다본 순간,
야라가세와 눈이 딱!
이크, 이거 큰일났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나빠요.˝
어휴, 선생님. 그러면 누가 손을 들고 일어서서,
˝저기, 야라가세가 말이죠. . .˝ 하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걸요. 절대 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야라가세 패거리가 무섭게 째려보고 있단 말이에요.
기분 나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야라가세 패거리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러바친 거, 너지?˝
˝일러바치다니, 뭘?
아, 아침에 그 일?
그게 뭐 남을 괴롭힌 거라구.
안 그래? 하하하. . . ˝
얼렁뚱땅 둘러대며 발뺌은 했지만, 나를 바라보던 돈짱의 눈빛.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한, 원망이 가득 찬 눈빛.
언짢은 기분이 사방에 가득 차 오르는 것 같았다.
˝이놈의 도둑 고양이 새끼!˝
돈짱 때문이야.
˝이노옴!˝
어디선가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고양이랑 놀려면 재롱을 부리게 하든가 나무타기를 시킬 일이지.˝
포장 마차에서 오뎅을 파는 아저씨였다.
˝뭐 짜증나는 일이 있나 본데, 잘 됐다. 이리 와서 이거나 도와 주거라.˝
영차, 영차, 내가 왜 이런 일을,
에이씨, 이것도 모두 그놈 때문이야.
˝한 열흘 장사를 안 나왔더니 그새 이 꼴이 되었구나.
여긴 강변이지 쓰레기장이 아닌데 말이다. 안 그러냐?˝
그렇긴 해도, 어째서 오뎅 파는 아저씨가 쓰레기를 치운담?
아저씨가 어묵 한 접시를 주었다.
˝다른 때는 강둑에서 채소를 가꾸는 할아버지들하고 쓰레기 청소를 하는데.˝
강변 가운데 조그만 밭이 있었다.
˝오늘은 네가 도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아저씨가 포장마차에 불을 밝히는 걸 보면서,
나는 어묵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학예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세이야와 요칭은 소품 준비, 나는 지장 보살 역을 맡았다.
대사가 ˝좋아, 좋아, 훌륭해.˝라는 말 한 마디뿐이니까,
뭐, 괜찮겠지.
야라가세 패거리는 자기들이 먼저 돈짱과 함께 다섯 마리 원숭이 역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건 연극 연습이야.˝
야라가세 패거리는 드러내 놓고 돈짱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담임 선생님이 달려와 뜯어말리면,
˝야아! 우리 연기가 진짜 같았나 봐.˝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돈짱의 이마에서 피가 났을 때도,
운동장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서 떨어져서 그렇다고 야라가세 패거리가 우기는 바람에
진실을 밝혀 낼 수 없었다. 돈짱이 그 큰 나무에 올라갈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역시 다친 사람을 괴롭히기는 어려웠나 보다.
모처럼 돈짱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즈음 기분 나쁜 사건이 생겼다.
치카코의 돈이 없어진 것이다.
˝학교에 돈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물 살 시간이 학교에서 돌아갈 때밖엔 없단 말이야.
오늘이 할머니 생신이라 선물을 사 드리려구. . .˝
치카코는 절대 기죽는 법이 없는 계집애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어요.
짐작이 가는 데가 있는 사람은 선생님에게
살짝 귀띔해 주세요.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쉬는 시간이 되자, 곧바로 탐정 놀이가 시작됐다.
˝체육 시간에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나간 사람. . .
옳거니,
저기 저 4인조로군요.˝
˝점심 시간에 혼자 교실에. . ., 아하,
바로 돈짱 아닙니까?˝
˝범인은 놀랍게도 훔친 돈을 붕대 속에 감춰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치 텔레비젼의 추리극을 보듯이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선생님이 치카코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어 주었다.
˝학교에 돈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지 않아서, 제가 치카코 지갑에서 돈을 살짝 빼놓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어휴 열받아.˝
˝재수없어!˝
˝미안해요, 여러분 정말 미안합니다.˝
˝치카코, 덜렁쟁이 계집애.˝
˝왠 소동이야!˝
˝집안일을 학교에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구!˝
˝순 저질!˝
˝피해만 끼치고!!˝
˝속터지네.˝
˝웃기지 마.˝
˝열받아 !˝
그 날 수업이 끝난 뒤에 치카코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 교과서랑 노트 감춘 사람, 누군지
어서 돌려 줘.˝
그러자,
˝너네 엄마가 범인 아니냐!˝
누군가 말하는 바람에 모두가 낄낄대며 웃었다.
˝어제 일로 너희들 모두를 기분 나쁘게 했던 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몰래 심술 부리는 것은 너무 비겁해.
할 말 있으면 정정 당당하게 말해 주면 좋겠어.˝
그러자 이번엔 야라가세가 일어섰다.
˝우리를 도둑으로 몬 건 비겁한 게 아니고?
왜 나쁜 일이라면 뭐든지 우리야?˝
교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녁 때 나는 슈퍼로
심부름을 갔다.
계산대 앞에서 떨어뜨린 백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따라가니, 돈짱이 있었다. 돈짱은 선반에서 물건을 집어 얼른 옷 속에 감추었다. 순간 나는 못 본 척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 .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계산대 뒤의 가시 거울을 힐끗 보니, 야라가세 패거리 4인조와 돈짱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 뒤에 가게를 나왔는데도 바로 앞 어둠 속에서 4인조와 돈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도 한 자루 가져.˝
느닷없이 샤프 한 자루가 내 손에 쥐여졌다.
˝피, 필요없어.˝
˝가지라고 했잖아!˝
그러고는 내 팔을 비틀어 올렸다.
˝우리들을 도둑놈이라고 부르고 싶었겠지?
그 보답이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도망치지도,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 다음 날부터 야라가세 패거리는 이따금씩 내게 다가와서는 샤프를 힐끔거리며 보곤 했다. 너도 물건을 슬쩍한 놈이야. 씨익 웃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이야와 요칭에게는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세이야와 요칭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큰일인데, 샤프를 돌려 줘야겠어.
˝이거. . .˝
야라가세에게 샤프를 내미는 순간,
내 목에 팔이 휙 감기더니 그들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이거야말로 누가 봐도 사이좋은 6인조다.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려는 거지?
안다니까. 우리가 친구라는 징표잖아.˝
그러고는 내 귓가에 섬뜩하게
날카로운 샤프 끝을 들이댔다.
찰칵, 찰칵, 찰칵. . .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토요일 밤, 그 때 그 슈퍼에서 기다리겠어.˝
팔이 풀려 돌아다보니, 거리 있던 모두가 내게서 눈을 돌렸다.
세이야와 요칭은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가 돈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모르는 척했던 것처럼.
꽈앙!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분하고 비참하다.
그런데도 내 얼굴은 스마일 배지처럼 웃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돈짱하고 똑같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행동했을 뿐인데.
이대로 가다간 나도 돈짱처럼 야라가세 패거리의
먹이가 되고 말 거야.
찰칵, 찰칵. . .
그 소리만 떠올리면 명치끝이 찌르르 아파 온다.
학원 따윈 아무려면 어때.
집에 가기도 귀찮아.
어느 새, 강변에 와 있었다.
저녁 해가 강물 위에 반짝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 .
푸득 푸득 푸드득. . .
돌아보니, 까마귀들이 날아간 자리에 돈짱이 서 있었다.
˝고양이 발에 낚싯줄이. . .˝
˝고양이고 뭐고 간에, 샤프 어떻게 할 거야!˝
돈짱의 얼굴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고양이를 확 집어던져 버렸다.
˝어이, 꼬마양반.
오늘도 기분이 무척 안 좋은가 보지?˝
˝그래, 고양이를 괴롭히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니?
오히려 더 나빠졌을걸.˝
포장 마차 아저씨가 말한 대로였다.
˝그래 봤자 또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어질 거야.
그러니 그러면 그럴수록 네 속만 더 상하겠지.˝
˝얘가 날 많이 도와주고 있어. 쓰레기도 치워 주고,
접시도 닦아주고 그렇지?˝
돈짱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돈짱 너, 이 아저씨하고 친구였구나. 학교에서 당한 안 좋은 일을 여기 와서 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께 말씀드려 봐야지.
그러나. . .
˝그러면 샤프만 돌려주면 되잖니.
그런 녀석들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게 가장 좋아.˝
그것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아버지의 피곤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마디 더 보탰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그런 애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 않겠니?˝
돌려 줄 수 있으면 벌써 돌려 줬죠!
내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라구요!
벽을 걷어 차자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누나는 지금 시험 기간이란 말이야.˝
만화책을 구겨 던졌다.
˝아버지 쉬실 때 조용히 못 하겠니!˝
으아아!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생각한 순간, 배가 아파 왔다.
´아프다고 하면 야라가세가 봐 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점심때가 좀 지나서 돈짱이 찾아왔다.
˝그 샤프 돌려 줘.˝
슈퍼에 돌려 주고 잘못을 빌겠단다.
˝그랬다간 걔네들이. . .˝
˝해 보겠어. 걱정 마.˝
포장 마차 아저씨한테 좋은 방법이라도 얻어 들었나?
월요일이다.
돈짱의 눈 주위에 멍이 들어 있었다.
˝어이구야, 판다인 줄 알았더니 돈짱이네.˝
˝돈판다, 돈판, 돈판. . . ˝
야라가세 패거리가 마구 놀려 댔다.
덕분에 녀석들이 내 쪽은 포기 한 것 같다.
휴우, 한숨 돌린 나는 세이야와 요칭에게
착 달라붙어서 웃을 수 있었다.
청소 시간에 게으름을 피우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야라가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돈짱네 엄마다.˝
˝뭐 하러 온 거야. 너네 엄마?˝
˝돈짱이 불렀잖아. 오줌 쌌다고.˝
˝아하, 그래! 그럼 기저귀 갈아 줘야지.˝
4인조는 돈짱을 바닥에 깔아 뭉갰다.
˝야, 그만둬, 너희들!˝
치카코가 목청을 높였다.
˝정말 저질이라니까!
얘, 거기 남자애들, 너희들이 어떻게 좀 해 봐!˝
치카코가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치, 치카코 말이 맞아!
바보 같은 짓 좀 작작 하라구!˝
이렇게 마음 속으로 호통치는 순간,
˝꺅!˝치카코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구 저런, 돈짱의 바지가 흘러내려와 있었다.
치카코가 담임 선생님을 데리고 왔을 때는 이미
돈짱이 사라진 뒤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라.˝
˝그 녀석이 보여 주겠다고 그래서. . ., 났다고 그러면서. . .˝
˝나다니, 뭐가?˝
그 때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야라가세의 앞가슴 주머니에서 샤프를 빼 들었다.
˝너희들한테 물어 볼 게 있다. 따라와.˝
다음 날, 돈짱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부터 연극 총연습이 시작되었지만
돈짱은 여전히 결석이었다.
학예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일요일이었다.
나는 소푼 준비를 맡은 세이야와 요칭을 따라
강변으로 갈대를 꺾으러 갔다.
˝어이, 꼬마야!˝
포장 마차 아저씨가 내게 손짓을 했다.
으이구, 또 쓰레기 치우라고요?
오늘은 참아 주세요.
˝손님 바람잡이 좀 부탁하자. 일요일인데도
아주 형편없구나. 옜다, 여기 아르바이트 삯.
따끈따끈한 어묵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아이 요새 통 안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니?˝
˝돈짱 말씀이세요? . . . 학교에도 계속 안 나와요.˝
˝히히, 바지 벗겨진 일로 충격을 받았나 봐요.˝
요칭의 말에, 아저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 . ´
우리는 먹던 어묵을 가만히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 애가 괴롭힘을 당해도 너희들은 모두
언제나 모르는 척했다지?˝
˝. . . . . ˝
˝왜 안 도와 줬니?˝
˝그랬다가는 우리까지 당하는 걸요.˝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 그 애를 괴롭히게 도와 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여럿이서 한 아이를 아프게 하는 거라구.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 . . . . ˝
때마침 한 쌍의 젊은 손님들이 와서 우리는
도망치듯 포장 마차를 빠져 나왔다.
˝우리 물수제비뜨기 시합하자.˝
˝좋아, 그러자.˝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벗어 던지기라도 하듯
작은 돌멩이를 강물 위로 힘껏 던졌다.
통, 통, 토토토 . . . .
돌멩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물 위를 달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 기뻐하다 또 던지고 ˝좋았어!˝ 하면서
펄쩍펄쩍 뛰다가 또 힘껏 던지고. 우리들은
유치원 아이들처럼 마냥 신이 나서 웃고 떠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돈짱과 마주쳤다. 돈짱은 까마귀들과 싸우고 있었다.
퍼덕퍼덕 . . . . 한 마리가 떨어졌다.
˝에이,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돈짱은 그놈을 치고 치고 또 쳤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까마귀가 움직이지 않자, 그제야 돈짱은 강 쪽으로 걸어갔다.
물가에 저번의 그 고양이가 까마귀한테 심하게 쪼였는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학예회에는, 나오지 그러니 . . . . ˝
요칭이 말을 걸었지만 돈짱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학예회 날이 되었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돈짱은 긴장한 탓인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 역시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막이 올랐다. 원숭이 네 마리가 지장 보살에게 바친 감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그 때 대장 원숭이가 나타나 힘으로 차례차례 그것을
빼앗는데. . . . 어, 빼앗아야 되는데, 어어. . . .
다섯 번째 원숭이가 쓰러뜨리면 일어나고 쓰러뜨리면 또 일어나서
대장 원숭이한테 사납게 달려들었다.
돈짱이 야라가세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다른 원숭이들은 연극이 각본과 다르게 돌아가니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대장 원숭이도 진지해졌다. 엉겨붙은 두 마리 원숭이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다섯 번째 원숭이가 넘어지면서 내 발에 부딪쳤다.
˝아야!˝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면 벗겨졌어!˝
내 속삭임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돈짱은
다시 대장 원숭이에게 달려들었다.
대장 원숭이가 몸통박치기를 당하고 웅크렸다.
돈짱은 대장 원숭이의 등 뒤로 돌아가 바지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나는 돈짱이 뭘 하려는지 알았다.
˝이 멍청아, 그만 둬, 그만두라니까!˝
야라가세가 소리치는 순간, 하양 엉덩이가 불쑥 드러났다.
´옳지, 단숨에 해치워!´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휘익! 바지가 날아오르자 와아! 하는
웃음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잘했군, 잘 했어. 훌륭해.˝
연극 마지막에 해야 할 대사를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2주 뒤,
돈짱은 전학을 갔다.
2학기 마지막 날이었다.
˝갑자기 전학을 간 아이가 있는데요. . . . ˝
오랜만에 아버지가 집에 일찍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학부모 회의에서 들은 얘기를 꺼냈다.
˝전학 간 이유가 도둑질 때문이래요.
우리 애가 샤프를 억지로 떠맡았던 일 있죠?
그것말고도 네댓 번 더 있었나 봐요.˝
˝그런데 그 앨 괴롭히던 아이가 도둑질을 시킨 것 같다고
담임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그 몹쓸 애가 누군지 이제 모든 부모가 다 알게 되었죠.
그러니까 야라가세 씨가 갑자기 얼굴색이 싹 변해서는 . . . ˝
˝그 애가 우리 아이를 부추긴 겁니다!
우리 애는 용돈이든 뭐든 부족한 게 없어요!
걔가 슬그머니 전학을 가 버린 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글세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는. . .˝
어머니는 내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 아이한테 아무 문제 없이 끝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든 게 끝났다.
내 머릿속까지도.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바람 좀 쐬면 나아질까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렇다! 돈짱은 우리에게 절망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도움을 청했었는데.
그랬는데도 우리들은. . .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극이 끝난 뒤, 평가회는 남을 괴롭히는 것에 대한 토론으로 바뀌어 버렸다.
무대 위의 사건이 자아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많은 의견이 나왔다.
˝야라가세 패거리가 돈짱, 아니, 도바시에게
호스로 물을 뿌리는 걸 봤습니다.˝
˝그것은 장난이었어요. 절대 괴롭히려 했던 게 아니라구요.˝
˝급식 시간에 도바시의 국에다가 화장지를 집어 넣고 먹으라고 한 적도 있죠?˝
˝기억이 안 납니다.˝
˝도바시도 싫어했고. . . 그건 분명히 돈짱을 괴롭히는 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식의 대답이 되풀이되자 우리들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도바시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까?
싫다는 말을 확실히 하지 않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치카코의 이 한 마디에 우리 토론은
꼬리 잘린 잠자리처럼 끝나버렸다. 그 뒤로 돈짱은 전학 갈 때까지 학교 안에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차역 화장실에서 4인조와 돈짱이 나왔다.˝든가,
˝4인조와 돈짱이 오락실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 .
˝어이, 우리 기운 센 꼬마가 또 도와 주러 왔구나!˝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또 포장 마차 아저씨에게 붙들려 있었다.
˝저, 아니. . . . 그게 아니고. . . ˝
˝기분 좋군, 역시 우리 나라 장래는 밝단 말야.
올해의 마지막 대청소. 장, 힘껏 일합니다.!˝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들도 기운이 넘쳐 보였다.
엉겁결에 강변 쓰레기 청소에 말려들어간 나는,
˝이영차!˝ ˝으이가!˝ ˝으차차!˝ ˝여엉차!˝
땀 흘리며 즐겁게 일하는 사이에, 한 사람의
산타 클로스가 되어 있었다.
˝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했구나.˝
˝힘도 덜 들고 아주 가뿐하게 끝냈어.˝
˝우리들이 밭에서 키운 고구마란다.
실컷 먹어라.˝
˝그 애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포장 마차 아저씨가 말했다.
˝물벼룩이라는 생물에 푹 빠져 있다더구나.
장차 물벼룩 박사가 되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유도부에 들어가겠다면서
아주 의욕이 대단하더구나.˝
뿌직뿌지직, 타오르던 장작불이 탁 튀면서 불꽃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 애도 너도 십 년 뒤에는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있겠지.˝
봄학기가 시작되자 하루하루 다가오는 졸업 탓에 반 전체가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모든 일에 ´초등학교 마지감´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돈짱에 대한 생각이 손톱 끝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돈짱을 잊어버린 걸까.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서 강가에 갔다.
˝이제부터 대목인데, 망할 녀석들이 이 지경을
만들어 놓았단다.˝
포장 마차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어제 이 곳에서 중학생 패거리들이 한 아이를 때리고 있지 않겠냐.
내가 말리려니까, 당신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하고 대드는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녀석들을 한방에 쓰러뜨려 놓고는,
할 말 있으면 부모님 모시고 다시 와! 그랬지.˝
그리고 좀 전에 와 보니 이꼴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걸 보고 모르는 척하면 안 되지.
그러면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아.˝
˝하지만 그 대신 이 모양이 됐잖아요. . . ˝
˝그렇다고 해도 역시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되는 거야.˝
마음 속에 간직한 등불이 꺼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니?˝
˝어, 어제 그 아이로군.˝
둑 위에 야라가세가 서 있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
그러자 야라가세는 모르는 척하고 가 버렸다.
˝저 아이도 중학생과 한패였어요?˝
˝아니, 재가 맞고 있던 아이라니까.˝
통 통 통. . .
쿵 쿵 쿵 쿵 . . .
겨울 하늘에 망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강변 밭의 할아버지들이다.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전보다 더 멋진
포장 마차가 되겠는걸!˝
˝그렇구 말구, 목수에, 함석장이, 간판장이.
다 예전에 익힌 솜씨들이지.˝
˝덤으로 오뎅 냄비도 하나 새로 만들어 줄까?˝
철물점 하던 할아범도 데리고 올 테니까.˝
그러는 동안 포장 마차는 차츰차츰
제 모양을 갖춰 갔다.
야라가세가 그런 꼴을 당했다니.
학교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립 중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강가 저 편이 소란스럽다.
까마귀 떼에 덤벼드는 검은 물체. . .
그 도둑 고양이다!
강가 저 편에서 고양이가 달린다. 뛰어오른다.
˝와아!˝
나도 달린다. 뛰어오른다.
갑자기 멈춰 선 도둑 고양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살아 있었구나. 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나는, 나는 . . .
어쩌면 좋을까!˝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교생이 체육관에 줄을 맞춰 앉아
졸업식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내 초등학교 생활도 끝이다.
˝자, 그럼 6학년, 아니, 졸업생 여러분, 일어나서
퇴장해 주세요.˝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는 . . . .
˝자, 잠깐만, 제 . . .˝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의자 위에 서 있었다.
체육관 안의 모든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 . . ., 저는 . . . ˝
˝6학년 1반 덜렁이입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와아!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
다시 주저앉고 싶었지만 돈짱을 생각하며 참았다.
˝저는, 용기가 없어서 . . .,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 . .˝
˝친구는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전학 갈 수밖에 없었는데 . . .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 .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서 졸업을 하게 되는 게. . . , 이런 기분을
가지고 중학생이 되는 게 싫어서. . . , 그래서. . . ˝
그 때, 내 바지가 살짝 잡아당겨지며,
˝지퍼!˝ 하는 소리가 드렸다.
˝어?˝
내 바지의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체육관을 뛰쳐나온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눈을 맞고 있었다.
박수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웅성거림이 아직도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꼴불견이 되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하다.
그런데 가슴은 후련하다. 이걸로 된 거야.
˝정말 잘 해냈어, 너. . .˝
발 아래로 데구루루 내 신발이 구러 왔다.
돌아보니 야라가세가 서 있었다.
˝나도 말야. . . . . .˝
야라가세가 내게 말을 거는 순간,
세이야와 요칭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 중학교에 가서. . .˝
야라가세는 뭔가 아쉬운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뒤돌아섰다.
나는 마음껏 심호흡을 했다.
오싹하도록 차가운 눈이 입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끝.(나한테는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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