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빌4:4-7 |
---|---|
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빌4:4-7
12. 3. 18, 오후
* 염려는 인간의 무서운 적
염려는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우리의 믿음을 뺏고 타락시키는 원수 마귀의 무서운 무기입니다. 염려한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아 뫼오'인데 이 말은 갈라버린다는 뜻의 메리죠와 마음이라는 뜻의 노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란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염려는 자신과 남을 원망하고 탄식하며 비난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신앙을 불신앙으로 몰아넣습니다.
* 감사로 기쁨을 더하는 삶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하는 훈련이 소극적이라면 기뻐하고 감사할 조건을 찾는 것은 적극적 자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환경과 조건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히 찬란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생활의 경건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잠언 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도 자기 마음을 지키는 자는 복과 생명을 얻지만, 평탄하다 생각할 때도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끝내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지만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염려하는 마음으로 실패의 삶이 되고 맙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한입니다. 빌립보서는 4장밖에 안되는 짧은 내용이지만 빌립보서 안에는 놀라운 진리와 교훈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의 특징은 기쁨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든지 기쁨에 관한 말이 17번 나오고 있습니다.
빌립보서가 이처럼 기쁨의 서한인데도 그 배경을 살펴보면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의 신앙과 인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옥중에서 영어의 몸으로 쓰고 있습니다. 자유를 뺏겼고 그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감옥에 있는 분들을 방문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갑니다. 할 수 있는 말은 "용기를 가지라", "기쁨을 잃지 말라", "지난 잘못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향한 꿈을 설계하라",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옥중에 갇힌 사람이 감옥 밖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정되고 평안한 자리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위로 받아야 할 자리, 염려를 떨쳐버리기 위해 싸워야 할 환경에서 "기뻐하시오, 염려하지 마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5절에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는 부드러운 마음, 용서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는 '옳은 일보다 무엇인가 더 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관용이라는 덕은 수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세상적인 용서 자비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나 용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은 범죄하여 심판과 저주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사랑입니다. 여기 말하는 관용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덕이라고 하는 너그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과 같이 이 관용도 주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용서를 받았습니까? 지극히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시는 묻지도 않으시고 기억하지도 않으신다는 이 완전한 용서를 받으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과 우리가 우리 인생을 용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무지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함과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공의보다 더 풍성하셔서 죄로 인하여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되 당신이 그 값을 다 치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어디에다 비교하여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만입을 가지고도 그 은혜를 다 찬양하지 못합니다. 이 사랑, 이 용서를 받은 저와 여러분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용서를 받은 우리들도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무조건 용서가 아닙니다. 죄를 미워함이 없이는 죄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관용을 못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자신이 용서함 받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관용합니다. 옳은 것 보다 더 높은 것, 더 큰 것이 사랑입니다. 관용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떤 마음을 품어야합니까? 나는 어떠한 용서를 누구에게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한 달란트라 해도 상당한 돈입니다. 이런데 일만 달란트를 어떤 임금에게 빚을 진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도무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자녀와 처를 판다고 해도 자신이 종이 된다고 해도 평생을 해도 그 얼마라도 갚지 못할 빚을 졌는데, 임금이 가만히 보니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것을 알므로 그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이러한데 이 사람이 옥에서 나와서 자기 친구하나를 만나는데 그 친구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이라는 돈 빚졌습니다. 이 돈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넣었습니다. 이를 안 임금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사람을 도로 잡아서 영원한 옥에다 가두었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대하여 그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았는데 이 놀라운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또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할 죄를 날마다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용서를 받았고, 용서를 받아야할 것을 잊고 우리에게 잘못한 자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이며,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또 용서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관용하라 하시면서 이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라는 조건을 말씀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줄을 잊고 사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그 주장도 주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것인데, 옳은 것을 말하지만 주님의 판단을 피할 의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은 모든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넓힐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좁으면 꿀밤 딱지 만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넓으면 우주를 담아도 채우지 못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됩니다. 이 사람이 용서합니다. 이 사람이 용납하는 사람입니다. 사사로운 것, 세상 것 가지고 다투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도 관용한 것은 주님 앞에 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서 알게하라'고 했습니다.
용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내 자신과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이 있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악수를 해야 합니다. 이해한다는 말을 직접해야합니다. 그래야 그를 용서한 것을 그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용서한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용서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서 만나고 등을 두드려주고 악수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실천해야할 윤리입니다.
특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즉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기도는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은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기도학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는 교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욕구대로 기도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처럼 기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3)
주기도문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쁨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장래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축복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가 될 때 감사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염려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도 마음을 졸이면서 지냅니다. 왜냐하면 언제 감원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며 다 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식이 커가면서 걱정이 점점 늘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내 자식이 사회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회사와 국가에 염려가 쌓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사기도를 해야 합니다.
인천 창녕교회에는 간장장사를 하면서 1남 4녀를 키운 권사님이 계십니다. 외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앞두고 결혼을 하게 된 아들이 결혼식 전 날, 신라호텔에서 예복을 찾아서 오다가 그만 브레이크가 파열된 버스에 치여서 사망하였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할 말을 잊었습니다. 도대체 위로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창녕교회 담임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러나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동안 기도만 하였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권사님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 아들이 결혼해서 미국 유학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을 하늘나라로 빨리 데려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들을 데려간 것입니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기사와 버스회사에 위자료 청구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들의 죽음의 대가로 받는 위자료를 받아서 잘살면 무엇하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90이 넘은 권사님은 아주 정정합니다. 지금도 웃으면서 아들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아들은 하늘나라에 있어요.” “내가 꿈속에서 아들을 봅니다.” “매우 행복하게 지냅니다.” 이러한 것은 전부 감사하는 기도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가난도 이겼습니다. 염려도 이겼습니다. 모든 불안도 이겼습니다. 그분을 주제로 해서 쓴 책이 “절망을 넘어서”라는 책입니다.
끝으로,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6~7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 우리의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2)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십니다.
부부가 살면서 좋을 때도 있고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기분이 나쁠 때마다 마음이 변해서 보따리를 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분이 나쁠 때에는 동지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속이 상해도 혼자서 마음을 지키고 극복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갖고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면서 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