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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2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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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최후의 만찬 - 성찬을 받을 때
마가복음 14:22-25
12. 4. 1(종려주일)
고난주일에 성찬의 의미를 새기며 최후의 만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시인 김지하씨는 "밥이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빵을 들고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하신 것은 곧 "빵이 나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빵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입니다. 만약 최후의 만찬이 한국에서 이루어졌다면 예수님께서는 밥을 놓고 "내가 곧 밥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호흡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부류의 구체적인 신관(神觀)입니다. 밥을 입에 넣을 때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즉 생활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호흡 속에서, 밥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구체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년에 십여 차례씩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자주 받는 성찬, 성찬의 의미는 아마 다 알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간단히 새겨봅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과 한몸이 되는 예식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먹었기 때문에 그 생명이 내안에 있습니다.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구약의 유월절 사건으로서 어린양 예수님의 피흘림을 통해 죽음의 재앙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주님이 제정하신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만찬을 누리게 될 것을 이곳에서 기념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예식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성찬식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때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잔을 받아 입에 넣을 때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주장합니다. 루터교에서는 공재설로서 떡과 잔속에 예수님의 몸과 피가 함께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에서는 기념설을 믿습니다.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기념하는 예식으로 지켜야 합니다만 항상 이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사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전날 밤에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여 제자들과 나눌 때는 이미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진 것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돌리시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그 길을 기꺼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는 사명을 알았기 때문에 성찬예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식은 불과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 위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명감이 성찬이 되어 주셨다는 것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함께 깨달아야 하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사명 감당함의 충성됨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성찬을 받을 때마다 주님께서 사명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얼마나 잘 감당했는가를 느껴야 하고, 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도 생명을 걸고 준행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어야 되어야 합니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협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한창 젊음을 발산하는 27세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두메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뱅귀울루 부근의 마을에서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당신도 아름다운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둘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혹 친구를 위하여 내어주는 사랑도 있습니다. 혹 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의로운 마음으로 뛰어들었다가 남은 살리고 자신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의를 가지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은 사람을 '의사자의 죽음'이라고 해서 정부에서 보상을 하고 그의 죽음을 높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런 죽음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살과 피를 내어준 것은 모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 주는 것으로서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어떻게 깨닫고 있습니까? 성찬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아픔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하였고, 죄 용서함을 받고 다시 태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정 아픔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아픔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찬을 받을 때 막연한 사랑이 아닌 고통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면서 찾아오는 아픔은 기꺼이 받아 넘겨야 합니다. 진짜 사랑은 아픔과 죽음이 요구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살을 찢고 생살 속에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데 어찌 아픔이 없겠습니까? 성찬을 받을 때마다 아픔의 사랑을 깨달으시고 그 아픔의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의 자리로 다가가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도 십자가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죕니까? 왜 이렇게 고통이 따릅니까?"라고 반문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진짜 사랑은 아픔이 있고 아픔의 사랑 속에 달콤한 꿀 같은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할 때 아픔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당신의 것을 찢어 보셨습니까? 생명을 내어주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당신이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만찬은 사랑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성찬입니다. 이 사랑의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항상 주님의 고통의 사랑을 느끼며, 또한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나에게 다가오는 아픔을 극복할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오늘도 떡과 잔을 받을 때 아픔의 사랑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찬으로 주신 떡과 잔은 곧 주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최근까지도 백인들이 흑인들을 법에 의하여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겨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수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획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에 백인 판사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판사로서 대법원장에 내정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올리버 판사입니다. 시온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의 흑인 여종 마르다 포트윈의 발을 씻겠다고 신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내 아들딸들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소식이 퍼지자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은 물론 판사직도 박탈당했습니다. 시온 교회 목사가 올리버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때, 올리브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이 있겠습니까?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아픔의 사랑을 깨달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아픔은 바로 희생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 자기 것을 손해보는 희생, 자기의 재물을 찢겨져 나가고 자기의 권력과 명예가 찢겨져 나가고, 인관 관계가 찢겨져 나가는 희생의 아픔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찬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희생은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당신의 작은 희생이 한 생명을 살 릴 수 있습니다. 희생의 가치를 깨닫는 성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참된 용서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영국교회에서 뉴질랜드에 헌신적인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몇 해 동안 힘써 일하고 성공한 후에 그는 어느 안식일에 야만인 생활로부터 개심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지방에서 성찬식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가 성찬식을 인도하고 있을 때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막 무릎을 꿇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교회의 반대편으로 황급히 갔습니다. 그러더니 곧 돌아와서 조용히 제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성찬식이 끝난 후 목사가 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그 이상한 행동을 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막 무릎을 꿇으려고 할 때 나의 아버지를 죽여서 그 피를 빨아먹은 이웃 종족의 추장이 바로 내 다음 사람임을 알아챘습니다. 나는 모든 신에게 그 사람을 처음 만날 때에 죽이기로 서약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처음에는 복수해야겠다는 충동이 거의 나를 압도하여 선교사님이 보다시피 그 힘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돌진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십자가상에 달리실 때 자기를 못 박은 자를 위해서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시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나는 나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옆 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찬을 받을 때는 반드시 주님의 용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큰 용서를 베푸셨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성찬을 받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잔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받는 잔입니다. 용서의 떡이 바로 우리가 받는 떡입니다. 혹시라도 당신은 주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아놓고도, 오히려 당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는 이 잔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면 마음에 용서를 먼저 하시고 이 떡과 잔을 받으시고 떡과 잔을 받는 순간에 모든 미운 마음과 증오의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성찬을 받을 때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교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성찬을 베푸실 때 열두 제자가 한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공동체의 지체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성찬을 받을 때 공주 세광교회의 지체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공동체의 지체는 지상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까지 가서라도 갖는 영원한 교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혈맹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먹고 마신 자들입니다.
1972년 우루과이에서 칠레로 향하던 비행기가 눈 덮인 안데스산맥에 추락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4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사고 후 67일이 지난 후 16명이 살아 있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죽어간 동료들을 눈속에 묻어놓고 그 살을 배어먹으며 생명을 유지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살아남은 호세라는 청년이 목사에게 고백하기를, 성찬식 때 습관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을 뿐이었는데 막상 친구의 살을 먹으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한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서로 나누어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말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아멘. 오늘 이 성찬식을 받을 때 한 사람의 사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으십시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용서를 깨달아야 합니다. 끝으로 성찬을 받을 때마다 천국에서의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생각하십시오. 영원한 즐거운 자리에서 아름다운 잔치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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