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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2695. 조선의 쌀을 착취하던 군산 쌀창고는 지금 갤러리로 변신
“소작면적이 증가하면 그 만큼 생활이 좋아져야 하는데 금일의 생활은 빈궁이 깊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5월 18일치 동아일보에 나온 군산발 기사 내용입니다. “소작지는 증가하되 생활은 더욱 빈궁”이라는 제목으로 군산 옥구 농민의 생활 실태를 알리는 기사지요. 속된 말로 뼈 빠지게 일해 봐야 빚만 늘어간다는 이런 기사는 일제강점기에 흔히 보는 기사로 특히 식민지 조선의 쌀을 착취하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군산은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전국의 쌀 집산지였습니다.
1925년 일제에 의해 출간된 《군산개항사》에 보면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길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곳곳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 … 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라는 글이 넘칩니다.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1934년에는 당해 생산된 1,672만 석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1만 석이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그 가운데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300만 석 이상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어 일본인의 배를 불렸지요.
국운이 기울어 가던 1907년, 이미 군산에는 일본인이 2,956명으로 한국인 2,903명보다 53명이나 더 많이 살았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쌀이 곧 황금이었던 당시에 군산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와 살면서 착취한 쌀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와 현금 거래를 위한 은행, 세관 등 각종 건물도 들어서게 되는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시설들이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침략자들을 위한 시설이었다는 것이지요. 쌀을 생산해도 늘 빚만 지고 허기에 찾던 조선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군산에는 지금도 여전히 당시의 쌀창고가 남아 그때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옛 건물을 새로 리모델링하여 음식점 장미고(藏米故)니, 장미(藏米) 갤러리 같은 새로운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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