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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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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Loneliness and Solitude(1)
본문/ 마14:23
1. 들어가는 이야기
12월은 외로운 사람들(독거 노인-노숙자-소년 소녀 가장-장애인-수감자-해외 근로자-국군장병-내 주변의 불우한 이웃 등)을 새삼 기억하고-기도하고-위로하고-도움의 손길을 펴야하는 달입니다. 이 특별한 계절에 Paul Tillich의 설교집 The Eternal Now(영원과 맞닿은 지금)에 실린 설교문(외로움과 고독-loneliness and solitude)을 중심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After he had dismissed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by himself to pray. 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마14:23)”
2.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혼자(alone)입니다
“예수께서 거기 혼자 계시더라(He was there alone)”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도 혼자입니다. 나무-새-밤 하늘에 빛나는 별-그리고 사람.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살아 있는 존재와 분리 되어 있다는 뜻이고 각자 혼자라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 각 사람은 자기가 혼자일 뿐아니라,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 사건에서 보이듯 살 중의 살이요-뼈 중의 뼈로써-둘이 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 혼자였습니다(창2-3장).
누군가, 저들이 성적 절정(the ecstasy of love)에 이르렀을 때는 둘이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루지 않았을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절정의 순간은 잠시 뿐 그들은 전보다 더욱 각자의 벽을 쌓고, 심지어 암논이 보여 주듯 서로를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라 삼하13:15).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는 물론이요, 남녀 관계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성을 맺고 있는 순간에서조차 각자는 혼자(alone)입니다. 이 세상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도 사람은 상대방 내면의 가장 깊숙한 존재의 중심(innermost center)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矛盾(모순)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은 서로 도울 수 있고-인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존재의 중심을 갖추고 있음으로 이 세상-타인-이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사랑하고-변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혼자(alone)라는 사실이 바로 각 사람의 위대성(the greatness)이며, 각 사람이 책임져야 할 부담-짐(burden)이기도 합니다.
3.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alone)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예로부터 동서양의 지혜로운 스승-賢者(현자)들은 각 사람이 혼자(alone)라는 엄연한 사실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각 사람이 혼자라는 사실의 부정적 측면을 표현할 때는 loneliness(외로움-서글픔-쓸쓸함 등)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각 사람이 혼자라는 사실의 긍정적 측면을 표현할 때는 solitude(홀로 있음-독거-고독-견고한 내공-텅빈 내적 충만 등)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이유 때문에 외롭습니다(loneliness).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재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 하늘에서는 날개를 나란히 하여 나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뿌리는 떨어져 있지만 가지가 연결되는 연리지 되기를 원하노라) 했던 사랑이 깨어진 사람은 외롭습니다. 부러진 놋숟가락을 물고나온 사람도 외롭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외롭습니다. 금 숟가락을 물고 나온 사람-출세한 사람-성공한 사람-잘 나가는 사람-죄 지은 사람-늙은 사람-임종을 맞은 사람도 외롭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혼자(ultimate alone)이기 때문입니다.
秋夜獨座(추야독좌-가을 밤 홀로 앉아, 王維)
獨座悲雙鬢(독좌비쌍빈: 늙어 홀로 앉았으니 외롭고 서글프다)
空堂欲二更(공당욕이경: 빈 방, 한 밤중인데)
雨中山果落(우중산과락: 빗소리, 산열매 떨어지는 소리)
燈下草蟲鳴(등하초충명: 희미한 등잔 아래 풀벌레 소리)
2013년 12월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주변-내 교회 안을 따뜻한 마음으로 잘 살펴볼 일입니다. 날이 저물면 외로움은 더욱 짙어집니다. 추워지면 서글픔이 더욱 깊어집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쓸쓸함은 더욱 가슴 저리게 합니다. 주머니가 비면 먹고 싶은 것이 더욱 많아집니다. 돕자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치가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꼭 기억하는 올 12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solitue” 하여야 충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겪는 loneliness(외로움)은 오늘 본문 “예수께서 거기 혼자 계시더라-he was there alone” 하시는 solitude(견고한 홀로 있음)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徐子曰 仲尼極稱於水曰 水哉水哉 何取於水也 孟子曰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서자왈 중니극칭수왈 주재주재 하취어수야 맹자왈 원천혼혼 불사주야 영과이후진 방호사해 유본자여시 시이취이: 서자왈 공자께서 자주 물을 찬탄하셨는데 왜 입니까? 맹자왈 근원이 좋은 샘물에서 용솟음치는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나와 웅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사람은 물의 이런 성질과 닮았기에 공자께서 그토록 물을 찬탄한 것이다-맹자). 이것이 바로 “solitude(견고한 홀로 있음)”입니다.
Loneliness and Solitude(2)
본문/ 마14:23
1. 들어가는 이야기
웹스터 영어사전에 의하면 “loneliness”는 존재의 외로움-서글픔-섭섭함-쓸쓸함-허전함-허망함 등의 감정 상태(the quality or state of being lonely)를 의미합니다. “solitude”는 스스로-자발적으로-참을 수 없는 열망으로 일상의 통속적 인간관계-잡다한 사회적 연결망을 단절하고 끊어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고요하게-견고하게 따로 혼자 있음 입니다(a condition of being apart from all human beings or of being cut off by wish or compulsion from one's usual associates).
2. 예수님은 어떻게 "solitue" 하셨는가?
*광야(desert) 40일 금식 기도와 마귀의 시험(마4:1-11, 막1:12-13, 눅4:1-13).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눅3:21).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a solitary place)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 하셨다(막1:35, 눅4:4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 가셨다(막3:7).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6:12). *예수께서 홀로 계셨다(막4:10).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빈들에 가셨다(막6:32, 마14:13)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따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다 저물매 예수는 홀로 뭍에 계셨다(막6:46-47).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막8:1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막9:2, 마17:1, 눅9:28).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lonely place)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6).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눅9:18).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로 기도하셨다(막14:32-42) 등.
위에 열거한 말씀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광야 40일 금식 기도와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것을 뺀 나머지 기록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이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니까 꼭 기록해 두어야겠다” 하는 의식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예수님의 일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런 비의도적 기록이야말로 예수님의 "solitude"를 진솔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마음을 집중하여 진지하게 읽어보도록 합시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After he had dismissed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by himself to pray. 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마14:23)”
3. 우리는 어떻게 "solitude" 할 수 있는가?
첫째. 예수님은 자연의 침묵(the silence of nature)과 더불어 함께 계시면서, 나무-새-꽃-흙-날씨-바람-농사짓는 일-출렁이는 바다 등 자연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눈여겨보시며 "solitude"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비유와 말씀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들의 백합화를 보라-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가라지의 비유-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몰래 조용히 자라는 씨앗의 비유 등이 그러합니다.
나태주 시인(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 우리들은 왜 이리 산만한가, 왜 이리 경망스러운가!
둘째. 예수님은 모세오경-선지자의 글-시편 등을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穿鑿(천착) 하심으로 "solitude"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간음-헛 맹세 등을 하지 말라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리 이리 하라(마5:21-48)-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눅4:15-30) 등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뉴스-스포츠 등에는 달통하면서도,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줄도 읽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solitude" 하겠는가!
셋째. 앞에 열거한 말씀대로 예수님은 수시로 산-광야-빈들-바닷가-한적한 곳 등에서 혼자(alone)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말씀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After he had dismissed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by himself to pray. 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마14:23)”
예수님의 기도는 필요한 것을 줍시사 하는 간구가 아니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안에-하나님 앞에-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가운데-고요하게-견고하게-홀로 있음이었습니다. "거기 혼자 계시더라-he was there alone" 이것이 진정한 "solitude" 이며-바로 여기가 "永遠(영원)과 맞닿는 자리(The Eternal Now)"입니다.
Loneliness and Solitude(3)
본문/ 마14:23
1. 들어가는 이야기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After he had dismissed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by himself to pray. 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마14:23)”
2. 거기 혼자 계시더라-he was there alone(마14:23)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solitude(하나님 앞에-하나님 안에-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가운데 고요하게-견고하게 홀로 있음)"의 내적 정서를 잘 드러낸 강명숙의 시를 보았습니다.
<들꽃>
공평한 하늘 아래 하찮은 배역은 없다
비중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각자는 수줍은 대로 신이 선택한 배우
가장자리에 놓여 호되게 짓밟히다가
세찬 바람 앞에 철썩 무릎을 꿇더라도
새벽이슬에 기어코 소생하고야마는
질기디질긴 생명
아파도 용케 참아내며
슬플 떼 대신 울어주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는 그 대
"solitude"는 각 사람이 처한 그 자리가 아무리 권태로운-괴로운-하찮은 실존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자리에 "거기 혼자 있는 것-he was there alone"입니다. 나와 내 이웃 그리고 나의 상황에 대한 나의 느낌-생각-흐름을 비판-평가-판단-규정-비교-정죄-비난함이 없이 그냥 거기 있는 것-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의미-쓸 데 없는 시간 낭비-공허함-졸음-온갖 잡생각-重言復言(중언부언)하는 넋두리 등의 세찬 바람이 불어와 철썩 무릎 꿇고 짓밟히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용케 참아내며 하나님 앞에-하나님 안에-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가운데 고요하게-견고하게-질기디 질기게-거기 혼자 있는 것이 "solitude"입니다.
"solitude" 는 하루-한 달-일 년...어떤 일정한 기간 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평상시 수시로 “거기 혼자 계신 것”처럼, 각 사람의 실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어나는-자라나는 존재의 내적 성장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의 실존-거기 혼자 있을 때-견딜 때-참아 낼 때-샘터에 물고이듯,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재의 의미-존재의 충만-존재의 기쁨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3. 각 사람의 존재 중심에서 솟아나는 “solitude”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각 사람이 각자의 실존에서 거기 혼자 있음으로 “solitude”가 피어나고-자라나면, 어느 결정적 순간에 神聖(신성)의 중심(The divine center)-존재의 중심(innermost of being)에 이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체험을 “내가 하나님 안에서 쉼-평안을 얻기 전에는 그 어느 것(재물-섹스-학문적 성취...)에서도 쉼-평안을 얻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이 평안이 바로 예수님의 평안이라고 이해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둘째. 사람은 언제나 혼자이며-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신 짐이며 영광입니다(It is his destiny to be alone and to be aware of it. Not even God can take the destiny away from him).
그러므로 각 사람이 각자의 실존 거기 혼자 있음으로 "solitude"가 피어나고-자라나면,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혼자가 아닌 고요하고-견고한 존재의 홀로 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It is the experience of being alone but not lonely).
셋째. 또 다시 각 사람이 각자의 실존 거기 혼자 있음으로 “solitude"가 피어나고-자라나면, 각 사람이 선 자리가 곧 거룩한 자리-신성한 자리가 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매일매일 양떼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타도 타지 아니하는 숲을 보았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40년 동안 매일매일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던 숲이었는데, 모세의 "solitude"가 피어났을 때-자라났을 때, 그 숲은 거룩한 땅이 되고-신성한 땅이 되고-영원과 맞닿은 땅(The Eternal Now)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이 세상 모든 하찮은 것들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한 번 닿으면 그 하찮은 것들이 기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Everything is miraculous to man of faith insofar as it is touched by the hand of God!).
하찮은 나의 실존-아무 이룬 것 없는 내 인생-그저 부끄럽기만 내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는 영원과 맞닿는 역사가 일어 날 것을 나는 믿습니다. 너도 그러합니다. 그것이 "solitude"의 신비입니다.
Loneliness and Solitude(종합)
본문/ 마14:23
1. 들어가는 이야기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After he had dismissed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by himself to pray. 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마14:23)”
2.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
(1) 2013년 12월 15일(일) 아침, 육군 56사단 노고산군인교회(이광오 목사 시무-한영숙 사모님이 주신 하얀 크리스마스 트리 선물에 큰 감사 드림) 성탄절 축하 예배 설교를 위하여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이 많아 바로 내 앞에서 동두천 최전방부대 휴가병 두 명(작대기 3-상병)이 대화를 나눕니다.
A 왈, “지난 번 휴가 때, 내 여동생(고3) 방에 들어가니 소주 냄새가 확 풍기는 거야, 너 뭐 하냐? 하니, 공부 해 하는 거야, 넌 술 먹고 공부하냐? 하니, 왜? 술먹고 공부하면 안돼? 오빠가 나한테 보여준 게 뭐 있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걸 확! 하려다가 참았어, 사실 나도 고등학교 때 술먹고 집에 가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였을 때 ‘아이-시바...’ 하였거든, 난 이미 망했으까 이번 휴가 때 동생을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해야겠어, 사실 동생은 중학생 때만 해도 참 괜찮은 아이였는데 고등학교에 와서 나쁜 애들과 어울려서 그렇게 된 것이거든...” 합니다. B 왈, “야, 초-중학교까지는 때려서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고등학생이면 때려서 될 일이 아니래, 그러면 반항하고 더 삐뚜로 나간다더라...” 합니다. A와 B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A는 자신이 부닥친 삶의 실존 앞에 어찌할 줄 몰라 답답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2) 어느 목사님이 고모님으로부터 “나 처럼 전문 직종에서 일하던 6-70대 많은 사람들이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비 걱정은 없지만 실존적으로 고통 받고 있어, 여행도 가고-산에도 가고-친구도 만나고-골프도 치고-이런저런 일도 하지만 삶 자체가 재미없고-심심하고-공허하고-각종 의료 혜택으로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아 고민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3) 인터넷에서 어느 60대 부인이 70대 남편을 위하여 “현제명의 고향생각 가사”를 알려달라는 부탁의 글을 보았습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리,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1)-(2)-(3)-(어찌, 이 경우뿐이겠는가?), "Solitude"기 필요한 대목입니다.
3. 어떻게 "solitude" 하는가?
첫째.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When evening came, he was there alone”,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저물매-When evening came", 삶에는 남녀노소-빈부귀천과 아무 상관없이 “저물 때”가 있습니다. 20대 팔팔한 대한민국 최전방 육군 장병에게도-남들 보기에는 아무 걱정할 것 없어 보이는 고액의 연금을 받는 사람들에게도-젊었을 때는 전세계 지구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던 사람에게도, 아무 예고 없이-어느 날 갑자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의 삶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저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이, 하는가? 만사 퉁치고 그냥 "거기 혼자 있어야 합니다-he was there alone"
둘째. 어떻게 “거기(there) 혼자-alone-홀로” 있는가?
각자의 자리에 "거기 혼자 있는 것-he was there alone"입니다. 하나님 앞에-하나님 안에-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가운데 고요하게-견고하게-혼자-alone-홀로 존재하는 것(being)입니다.
다만, 나-내 이웃-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나의 느낌-생각-흐름을 비판-평가-판단-규정-비교-정죄-비난함이 없이 그냥 거기 있는 것-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때 강조할 대목은 “이런 지경에 이른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비난함이 없이” 라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비난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홀로-alone-혼자로써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비난-좌절-실망-비교-정죄 등)이 이리저리-중언부언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상가들에 의하면 “거기 혼자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나 자신을 “그저,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지켜보는 것(seer)이라고 합니다.
셋째. 그렇게 홀로 있으면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는가?
나옵니다!
누군가 “고요에 갇히면 외로움이다. 고요를 즐기면 기쁨이다-자유다-견고함이다! ” 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자기의 실존-거기 홀로 있는 것만으로 존재의 기쁨-존재의 충만-존재의 평안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마치, 숯불불고기+소주+담배 집에서 나온 사람과 정갈하고 그윽한 찻집에서 나온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거기” 홀로 있으면,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비를 볼 수 있는 神眼(신안)-靈眼(영안)-審美眼(심미안)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요8:12-59)의 결론-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하신 그 존재의 신비에 눈 뜨기 시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하나님 안에-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가운데 고요하게-견고하게 혼자-alone-홀로 있는 것이 "solitude"이며, 바로 그 자리가 영원과 맞닿는 자리(The Eternal now) 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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