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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16: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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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3.11.17 높은뜻씨앗이되어교회 |
가장 큰 감사.
시116:12-14.
지금 미국 솔트레이크에서는 스피드 스케이트 월드컵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제 우리나라 선수인 이상화선수가 세계신기록을 기록했습니다. 며칠 전 경기에서도 세계신기록을 세웠었는데 어제 다시 그 기록을 갱신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신기록이란 세계 일등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세계 신기록이란 지금 현재 세계 일등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경기하였던 모든 선수들 중 세계 일등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들도 감격스럽고 행복한데 본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정말 인생 최고의 환희와 기쁨과 감격을 맛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세계신기록을 작성했을 때 이상화 선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감사합니다.'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화 선수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나름 최고의 기쁨과 절정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 튀어나오는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행복과 감사는 같은 감정입니다. 행복하면 감사하고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우리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감사할 줄 몰라서 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일이 없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할 일만 많아서 자신의 삶이 늘 우울하고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고 원망할 일만 많아서 우리의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고 늘 우울한 까닭은 우리가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영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감사'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감사'라는 감정을 갖기 어렵습니다. '감사'는 철이 들어야만 생기는 매우 성숙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철이 들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감사를 알게 됩니다.
성숙과 미숙함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은 감사입니다. 감사를 알면 성숙한 것이고 감사를 모르면 미숙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사를 모르고 사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미숙한 까닭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의 뿌리를 욕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아멘.
그런데 이 욕심과 감사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욕심이 많으면 많을 수록 감사가 어려워집니다. 욕심이 적으면 적을 수록 감사가 쉬워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를 잊고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크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만족이 없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놓치고 사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고 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와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는 욕심이 클 뿐 아니라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려야 할 것을 욕심 부리지 않고 쓸데 없는 것과 하찮은 것을 늘 욕심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에게 하찮은 것보다 귀한 것은 먼저 그리고 많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귀한 것을 모르고 하찮은 것만 압니다. 그래서 귀한 것은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하찮은 것을 주시지 않으신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찮은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보다 나은 가치를 알게 되어야만 하찮은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막내가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배운 말 중에 하나는 '100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출근을 하기 위하여 나서는데 막내가 팔을 벌리고 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더니 '100원'을 웨쳤습니다.
100원 짜리가 없고 500원 짜리가 있어서 500원을 막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막내가 500원 짜리를 내 던지며 100원을 웨쳤습니다.
큰 아이가 그것을 보고 '정열아 그거 500원이야. 100원짜리 다섯 개야'를 안타깝게 웨쳤지만 우리 막내는 그 말을 못알아 들었습니다. 그냥 저에게 '100원'만 웨쳤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면 100원에만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500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쉽게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음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면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가장 고상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하찮은 세상의 가치가 우스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의 욕심이 세상적인 '이'에서 '의'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익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가 아니라 '의'입니다. 그래서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있던 없던, 우리에 양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상화 선수 이야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화 선수가 지금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이상화 선수처럼 세계신기록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난 눈으로 우리를 보면 우리는 모두가 다 이상화 선수의 세계신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욕심이 부자되는 것과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만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감사할 줄 모르고 행복할 줄 모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다 부자가 되지는 않지만, 다 출세하고 성공하지는 않지만 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미 얻었습니다. 그 죄 사함과 구원의 복은 세상의 그 어떤 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은 비록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이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윗도 시편 32편에서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다윗의 속죄와 구원의 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했고 그래서 그는 늘 행복했었습니다.
저는 세상적인 하찮은 복도 참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이유 때문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가장 큰 감사는 속죄와 구원입니다. 저는 제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제일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것은 이상화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을 때 것보다 더 큰 축복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의 고백도 똑같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갚으리로다.> (시116:12-14) 아멘.
이 시편을 읽으면 기자가 얼마나 행복한 상태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런데 도대체 이 시편 기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기에 단서가 있습니다. 그의 넘치는 감사의 이유와 조건은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구원의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철이들지 못해서 밤낮 하찮은 100원 짜리만 생각하며 사느라 하나님이 주시는 보다 낫고 귀한 축복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땅에 내 던지며 불평과 불만과 원망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사는 우리가 아닌가 오늘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가장 큰 감사와 기쁨과 행복은 '속죄와 구원'입니다. 저도 시편 기자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모든 서원을 하나님께 갚으며 살겠다고 웨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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