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2:42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10.23 주일 http://sungamch.net |
더 이상 가난한 여인의 '두렙돈'을 들먹이지 말라.
막12:42
두어 주 전 주일 저녁에, 춘천에 있다가 서울의 규모 있는 교회에 부목사로 간 후배가 방문을 했습니다. 저 말고도 여러 명의 목사들이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요. 그 자리에서 그 후배가 춘천에 온 이유를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런데 그 서울의 후배 목사네 교회는 한 달 전부터 모든 설교는 ‘추수감사’에 맞춰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목회자들이 한 달 전에 한달 분의 월급을 추수감사헌금으로 미리 교회에 내야 하는데, 그 후배는 달달이 타는 돈이 모두 생활비며 교육비에 들어가서 남은 게 없기 때문에 돈을 빌려서 헌금을 해야 한답니다. 서울서는 잘못 빌렸다가 담임목사에게 들킬까도 염려되고 해서, 춘천의 와이신협에서 한 달 봉금만큼 꿔다가 매년 추수 감사주일 한 달 전에 ‘추수감사헌금’으로 낸답니다. 그래서 춘천에 온 거라는 거죠.
개콘 버전으로 ‘왜 이러는 걸까요?’
추수감사주일 이전 한 달 동안 내내 감사설교만 해야 하고, 한 달 이전에 목사들이 먼저 자기 봉급의 한 달 치를 미리 교회에 내야 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가 듣게 될 말씀의 본문에 대한 이해도 이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가난한 여인이 정성을 다해 바친 두렙 돈’에 대해서 들어왔습니다. 적어도 이 여인처럼 정성을 다해, 가능하면 많이 하라는 거죠. 그러나 제목으로 전제된 바에 의하면 이는 성서를 잘못 해석한 경우며, 남용하는 경우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가난한 여인을 팔아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서 본문에서 은근히 이 여인을 칭찬하는 것처럼 하면서 대중들을 선동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마5:26, 눅 12:59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두 돈의 단위를 [호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호리는 화폐 단위입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우리로 치면 1원짜리 같은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호리는 ‘마지막 고드란트’이고, 누가복음의 호리는 ‘마지막 렙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 남은 고드란트, 하나 남은 렙돈’이런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서는 왜 ‘마지막 고드란트’고 누가복음은 왜 ‘마지막 렙돈’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것은 그 사람의 경제 형편에 따라서 ‘잔돈’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 잔돈은 ‘만 원 짜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잔돈의 개념은 ‘백 원짜리’입니다. 그러니 마태공동체의 잔돈개념이 ‘고드란트’였던 거고, 누가공동체의 잔돈 개념이 ‘렙돈’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서의 본래 뜻을 변질 시키지 않습니다.
막12:42에 보면 ‘고드란트’는 ‘렙돈’의 두배 가치가 있었으므로 렙돈 보다는 약간 단위가 높은 것입니다. 1원에 상응하여 5원짜리 정도 될까요? 여하튼 고드란트나 렙돈을 모두 거스름돈입니다.
고드란트는 ‘앗사리온’이라는 돈의 단위에 1/4입니다. 마10:29에 보면 한 삿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5마리는 두 앗사리온이면 삽니다. 그러니 한 고드란트로는 참새 반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가난한 여인이 바친 돈 렙돈 두 개는 ‘참새 반 마리’를 살 수 있는 화폐의 단위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그게 어디냐. 그 귀한 참새를 반 마리씩이나 살 수 있으니 아주 하찮은 금액은 아닌 모양이다’하겠지만, 당시엔 참새가 아주 싼값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뭐 우리 옛날에 비지떡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물건을 하나도 아니고 반을 겨우 살 정도의 돈이라는 겁니다. 그건 그 여인의 생활비였다는 겁니다. 엄청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인 것이죠. 그걸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리고 성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거나 들으면 ‘생활비 전부’를 드린 여인을 칭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서울의 큰 교회 목사님도 이런 근거에 따라 자신과 부목들, 그리고 교우들을 채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이야기의 핵심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헌금 사건 직후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이 거물들이 어떠하나이까?”(막13:1)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 무너진다.”합니다. 왜 여인의 헌금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바쳐야 하는 여인의 모습, 성도들의 모습, 부목사의 모습에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읽어야 합니다. 앞의 ‘헌금’사건은 ‘칭찬’에서 출발 하는 게 아니라 ‘분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분노를 왜 느끼는 걸까요?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 속에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넉넉하여 많은 연보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드나드는 다른 교우들은 겨우 참새 반마리 값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자기 생존과도 같은 돈을 헌금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걸 알려면 오늘 본문의 앞 장, 12:40절 언저리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과부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과부의 재산을 삼켰는지는 다만 추정이 필요합니다. 맨슨 이라는 이는 눅2:36절에 나오는, 성전에서 일생을 보낸 안나와 같은 과부들의 재산을 서기관들이 맡아서 함부로 관리한 게 아니냐고 합니다. 이걸 확대해 보면 당시의 과부들은 재산을 힘 있는 자(당시에는 종교와 관계된, 오늘날에도 우리는 재산을 힘 있는 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부자들입니다.)에게 맡긴 다음에 또 성전에서 봉사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자신의 재산은 몽땅 부자가 운영하는 기관에 맡기고, 그런데 결국 그것은 부자를 배불려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또 성전에 온몸과 인생을 착취당하면서도 불쌍히 여김을 받기는커녕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이 너무 가슴 아팠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구절에서 과부의 정성스런 헌금이라는 말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여인처럼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강요받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건 주님의 마음과는 별개의 행위입니다. 주님을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통한의 아픈 마음을 갖고, 차라리 서전이 무너져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의 압박 받는 헌금이 아니라, 부유한 서기관, 부자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려한 성전이 거룩한 곳이라는 명목으로 세워져 있지만 그 속에는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안 받고 회당의 상좌에 앉는 서기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막12:38-40).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섬겨야 할 가난한 이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미 같은 존재들이 ‘거스름 돈’조차 긁어 먹어 버립니다. 그들이 바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자들입니다.
여인의 헌금은 아름답긴 하지만 아픈 현실입니다. 그 피눈물 나는 연보를 받아 외양을 치장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그 시스템 속에서 호위호식하던 종교인들, 권력자들, 부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다”(막12:40)라고 선언하시며 동시에 그런 자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성전을 향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뜻은 ‘참 새 반 마리로 살아야 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연보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