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열하6:6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10.28 주일설교 http://sungamch.net |
물 위로 떠오르는 도끼의 연금술이 필요한 시간
열하6:6
엘리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예언자였습니다. 반면 엘리사는 권력의 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던 예언자였습니다. 당연히 엘리야에게는 가난한 민중이 많이 모여들었고, 엘리사는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두 사람의 인기를 생각할 때에는 그들의 다른 지향점에 따른 정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엘리사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기숙할 거처가 상대적으로 비좁아 졌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커다란 새집을 짓자고 건의합니다. 요르단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 가지고 들보도 만들고 서까래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의도는 순수했고 어느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속셈도 엿보입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도 동행할 것을 요구하고, 엘리사도 기꺼이 제자들과 같이 요르단으로 떠납니다. 이제 그들은 요르단에서 나무를 베고 자르고 다듬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제자가 그만 나무를 찍다가 도끼날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제자는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 도끼는 빌려온 도끼였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도끼가 어디에 떨어졌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집어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에 빠졌던 도끼날이 그 나무 가지에 걸려서 물위로 올라왔습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에게 태연스럽게 도끼날을 건져 올리라고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엘리사가 기적의 사람이라는 걸 말하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람의 정열적인 행위, 사람의 열심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먼저 커다란 집을 지으려는 제자들의 꿈을 봅시다. 그들의 꿈은 순수하였고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을 행해 가야 하는 것이고, 도끼로 나무를 찍고 다듬는 일은 모두 실천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나무를 베고 다듬을 때 흥분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도 대부분 이런 꿈들을 쫓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꿈을 향해 나아갈수록 성취감도 생깁니다. 사업을 하거나, 취직을 하거나, 가게를 새로 시작하거나 하는 인간들의 일상사는 모두 제자들의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작고 큰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들 같습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이런 꿈과 그 꿈에서 비롯되는 성취감의 에너지로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도끼자루가 빠지는 것입니다. 힘찬 의욕의 도끼질에 도끼날이 빠지는 이미지, 더군다나 빌려온 도끼가 물에 빠지는 이미지는 인간의 정열과 행동이 어느 순간 무위가 될 수 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죠. 많이 배운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려 죽고, 열심히 벌었는데 그만 불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될 때, 돈 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 돈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 인간의 모든 순수한 열정과 실천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사는 꿈과 현실의 모순속에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도끼날이 빠지는 경험과 함께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실패가 성공의 어미가 된다’는 말에서도 그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고, ‘실패’와 ‘성공’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실패’거나 ‘성공’이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 성숙이 그 본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실패’나 ‘성공’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는 나의 아버지가 무력하고 무식한 고집쟁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삼십대 후반이 되고 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셨는지를 알았다.” 여기서 변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입니다. 마크 트웨인 자신이 도끼날이 빠지는 경험을 통해 성숙해졌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도끼라는 게 뭡니까? 엘리사의 제자들처럼 빌려온 게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이나, 기회, 지식과 같은 것들은 부모에게서 빌려오거나, 남에게서 빌렸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 아닙니까? 이 빌려온 도끼라는 표상어는 인간의 성공에 대한 욕망의 최대 이미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끼날이 빠져서, 그것도 지척을 분간 할 수 없는 강물에 빠졌을 때, 그 허탈감과 무력감은 어떻겠습니까? 흥분과 기대의 도수만큼 허탈과 좌절의 감정은 크지 않겠습니까? 두려움도 몰려올 것입니다. “아, 이것은 빌려온 것인데”하는 외마디는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스승인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자기로서는 이제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스스로 자기의 생에 앞에 놓인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자신의 문제를 꺼내 놓고 방법을 구할 수 있는 존재, 스승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말하기를, 두겹 줄은 끊어지지 않고 둘이 누우면 따스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올바른 선생이 필요한 것이고 올바른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인생의 의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동행하고 있던, 여기서 엘리사가 그들과 동행했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승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고 처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대목에서 엘리사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이 붙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단순히 동행자가 아니라,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엘리사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고, 스승에게 요청을 한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의욕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던 사람과 그와는 반대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은 항사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고 겸손히 물었습니다. 인생의 도끼날이 물에 빠질 때, 우리는 누구와 상의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곁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간구합니까?
자, 이제 엘리사의 행동을 봅시다. 엘리사는 제자에게 “어디서 도끼를 잃어버렸느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도끼를 잃어버렸는지를 모르면 도끼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한문에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칼을 잃어버린 지점을 배에다가 표시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부두에 닿자 표시해 둔 뱃전의 밑에서 칼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헛일이겠지요.
요한계시록에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어디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라.”(2:5)고 합니다.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문제가 나에게 있는데 남에게 찾는다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말해야 온전한 의사의 처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업의 문제가 어디에 있고, 가정의 문제가 어디에 있고, 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그 누구도 가라앉은 도끼를 건져 올리지 못합니다.
제자는 정확하게 자신이 도끼날을 잃어버린 지점을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잘라 강물에 던집니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그 하찮은 나뭇가지가 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꿈이요, 삶인, 빌려온 도끼날을 건져 올렸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013년 한 해를 살았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욕적으로 살았습니다. 물론 모두 빌려온 도끼날을 휘두르며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도끼날은 여전히 쓸 만합니까? 당신의 욕망과 꿈을 실현해 줄 거 같습니까? 아니면 삶이 엉망 되어 그만 도끼날이 물에 빠진 형국입니까?
좋습니다. 어떻든 우리가 휘두르던 도끼날이 지금쯤 성할 리 없습니다. 어떤 이는 빈 도끼자루만 덩그러니 움켜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겸손히 도움을 청할 시간입니다. 인간의 의욕과 꿈만 가지고 삶이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물에 빠진 도끼날을 건져 올리는 연금술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니 겸손히 빈 도끼자루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빌려온 도끼날이 어디에 빠졌는지 주님께 고합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연금술을 기대합시다. 겸손히 나아가 자신을 알릴 시간입니다. 11월이니까요.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