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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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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2014. 4. 6 주일 오전 예배설교 http://cafe.daum.net/st888 |
성경 : 요일5:3-4
제목 : 계명은 윤리적인가?
요일5:3-4‘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갈3: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롬3:20), 약2: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했으니 무슨 수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구약 시대에도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를 통하여 자녀로 삼으시고(창17:10)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된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신7:7)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된 것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유월절의 기원이 된 양피를 문설주에 바른 결과로 출애굽하게 된 것입니다.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정도의 간단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신약성경에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스럽게 보이는 교훈과 명령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서 <계명은 윤리적인가?> 라는 주제로 주의 뜻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랑은 목적이고 계명은 그 방식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22:36-40‘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갈5:14,롬13:8)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도 우리는 보통 사랑하는 순서를 하나님보다 사람이 먼저인 줄 착각합니다. 또한 그 사랑하는 방법까지 오해합니다. 바로 규모 없이 사랑하는 태도들입니다 고전13: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불의=비진리, 인본적, 세속적, 상황적). 사랑은 목적을 띤 신앙인의 목표이고 그 아가페사랑의 방식은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 했습니다.
혹 성도들이 요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을 토대로 신약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할 계명부터 챙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보십시오. 요15: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이1:6‘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
계명이라는 말은 사랑의 도리라는 뜻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규모없이 사랑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계명이라는 말, 엔톨라스(ἐντολὰς)는 복수형태로 여러 행위 조항들을 뜻합니다. 계명은 구원 얻는 조건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이다는 결론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계명따라 살아야 하는데...
2. 계명을 지키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의 의무로 생각할 이유도 없고 그런 마음은 무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씩 지킬 수도 있습니다.
마11: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본문, 요일5: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여기에는 게을러서 스스로 만든
1)영적 태만의 결과로 영과 몸이 무거울 수 있지만
2)복음의 인식을 잘못하므로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잃어버렸던 부모를 찾게 된 사연이면 더더욱 날마다 감사함과 흥분으로 부모님 모시기를 다하지 않겠어요? 이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이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키지도 않았습니다(막7:7-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요7:19 ’..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
*형식적이었습니다(마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기독교인도 복음을 원리로만 알고 본질을 깨닫고 감동받지 못하면 그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신약 표현은 계3:1‘사데교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조건을 받았다 해도 예수께서 다 지키셨고 율법의 요구, 사망까지 담당하셨습니다(마11:13,마5:18).
롬8:1-4‘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형식적인 율법적 행위, 그 모든 윤리 도덕주의로 구원을 논하거나 판단할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정진하도록 권면해야 하고 진정 사랑으로 아낀다면 믿음으로 잘 되게 때로 경고와 꾸짖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법칙을 벗어난 형제들을 경계하고 서로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약2: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윤리도덕 교훈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말씀 역시 형식주의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질책입니다. 믿으면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께 대한 열심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요한1서 2: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요한의 큰 기쁨은, 요한3서 1: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이웃을 위한 삶을 위해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요일5:4‘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는 말씀도 결국 주의 계명과 여러 교훈들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요, 믿음으로 순종할 신령한 도리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계명을 윤리도덕적으로 생각지 말고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법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지키려 할 때 더욱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혹은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분별은 그의 계명을 잘 따르려고 하는가를 반성하면 됩니다. 율법주의니 어쩌니 하면서 생활을 규모없이 살면서 은혜를 받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사랑하는 맘으로 하는 일은 본래 즐거운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 주님의 교훈을 잘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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