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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2720. 영의정 사직상소 서른일곱 번의 청백리
옛 선비들은 대체(大體, 세상 이치에 따르는 큰 뜻)와 소절(小節, 작고 사사로운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문신 정태화(鄭太和, 1602~1673)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간 시절 승록대부(崇祿大夫, 고려 ·조선시대 종1품 문관의 품계) 유정량을 걸어 논핵(論劾, 잘못이나 죄과를 논하여 꾸짖음)했습니다. 유정록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사간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정록에게 미안했던 나머지 사과하러 찾아갔지요. 하지만, 유정록의 아들이 문전박대를 해서 그는 유정록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찾아갔던 정태화는 일곱 번 만에야 유정록을 만날 수 있었지요. “영감,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 정태화가 사과하자 유정록은 “아니오. 내가 너무 결례를 많이 했소. 사간인 영감이 나를 논핵한 것은 옳은 일이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불러 정태화에게 사과하도록 했습니다.
이 정태화는 너그럽고 원만한 사람이었으며 철저히 대체와 소절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험난한 정국 속을 살면서도 남의 원한을 산 일이 거의 없었지요. 또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지만 모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서른일곱 번 사직상소 올려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청백리면서 명재상이었습니다. 또 그의 아우 정치화도 사화 속에서도 화를 입지 않은 청백리로 열한 번의 사직상소 끝에 좌의정을 물러난 대단한 인물이었지요. 이렇게 청백리로 존경을 받은 정태화, 정치화 형제는 정말 그 형에 그 아우였습니다.
정태화의 묘갈명에는 “아! 문익(文翼, 정광필(鄭光弼)) 이후로 대대로 충정(忠貞)이 독실하여, 공에게 이르러 능히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고 모범적인 행실을 따라서 조정 신하들 중에 덕망이 으뜸이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대응하기만 하면 마침내 분란이 해소되었으므로, 마치 산악(山嶽)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은택이 만물에 미치는 것과 같았으니, 위대하도다.”라고 쓰였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인물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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