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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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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752602 |
예수 부활 이후
요20:19-29, 부활절 둘째 주일, 2014년 4월27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 부활을 건성으로 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활을 그저 소문 정도로만 여기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을 감당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온갖 귀찮은 일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세상에서 살기에 예수 부활을 가깝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에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이들도 모든 삶의 에너지를 거기에만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조류가 극심한 바다 속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부활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뭐지?’, 또는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하고 반응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마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요 20:25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도마의 주장은 도마만이 아니라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요즘도 가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들리기는 하나 그것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임사체험입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을 뿐이지 죽은 거는 아닙니다. 죽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두 사실 사이에 끼여 있는 겁니다. 하나는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을 실제로 다시 만났다는 제자들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배격합니다. 어느 한쪽이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딜레마에서도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사실을 깊이 있게 아는 게 그 대답입니다. 이어지는 도마 이야기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과 깊숙이 연관됩니다.
본문 설명에 따르면 팔일이 지나고 도마를 비롯한 열 한 명의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였습니다. 팔일 전 도마가 없을 때도 문이 닫혀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팔일 전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평화를 인사를 한 뒤에 도마에게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대한 이야기는 요 20:20, 25, 27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체로 나타난 그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란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되었고,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뒤에 그의 말씀을 제자들이 생생하게 기억한 것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제자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난 것이지 예수가 살아난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초기 정통 기독교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 자국이 있는 손과 창 자국이 있는 옆구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든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으로 믿든지 별 차이가 없는 거라고, 그러니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로 성실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각각 작은 예수가 되어서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 자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체를 믿습니다. 이 사실이 흔들린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는 부활의 주님이 실제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본문은 말이 없습니다. 요 20:17절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아직 승천 이전이니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아마 도마도 예수님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활체로 현현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니 손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고 고백합니다. 도마의 영적인 눈이 열린 겁니다. 그의 고백은 도마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모든 사람들의 고백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은 도마를 향한 책망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아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격려이자 인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인 베전 1:8절이 말하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라는 말씀도 당시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어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기원후 100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즉 제 1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때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최소한 두 세대가 흘러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2 세대, 또는 제3 세대 기독교인의 말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은 그런 편지를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서 듣는 거와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전해 듣는 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점점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신자들마다 다 달랐을 겁니다. 크게 보면 두 종류의 신자들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니 믿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의 관계를 잘 알아야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직접 보아야만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인도를 가서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도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다릅니다. 그렇지만 가서 본다고 해서 늘 그 대상을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인도의 겉만 보고 와서 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실제로 아는 거와는 다릅니다.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인도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에 대한 책을 잘 읽고 생각을 깊이 한 사람이 인도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는 훨씬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구약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갈맬산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기적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믿음이 무조건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기적과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말할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기적과 표적은 일시적인 겁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이벤트만으로 사랑을 확인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되도다.” 도마나 제자처럼 보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는 거가 아니라 믿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제야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보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과 소수의 추종자들만 경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변화된 생명으로 현현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고, 또한 제자들의 말을 직접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과 상관없습니다. 인격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은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얼마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광신이나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부활 이후의 시대를 살기에 그 부활을 직접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복은 마 5장의 팔복에서와 같이 구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본 제자들이나 1세기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영적 지위를 인정하기는 해야 하나 부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복과 구원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예수님을 도마의 고백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이 세상에서 그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부활 이후를, 즉 예수 부활을 보지 못한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할 부활 신앙의 열매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초기 기독교 당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도미티안은 이것을 황제 칭호로 사용했습니다. ‘dominus et deus noster’, 즉 로마 황제는 ‘우리들의 주이시며 신’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게 신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마 16:1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사도 바울은 롬 10:9절과 고전 12:3절도 예수님을 주라는 뜻의 퀴리오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고백합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과 통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예수님 밖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고백이 당연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이걸 고백하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불편한 게 많습니다. 이 고백대로 살려면 거부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은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퀴리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21세기 오늘도 황제숭배를 강요받는 로마 시대와 똑같습니다. 자본을 절대적인 능력으로 섬기라고 강요받습니다. 그런 강요와 타협하지 않으면 실제로 사는 게 불편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교회에 와서는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신에게 절하면서 삽니다. 거기서 몸부림치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오늘이 벌써 열 이틀째입니다. 배가 전복되었다는 첫 소식이 들렸을 때만 하더라도 소수의 인명 피해가 생길지 몰라도 대부분의 승객들이 구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망망대해도 아니고 야밤중도 아닌 때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이는 후진국 형 사고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번 일은 후진국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사고입니다. 시스템도 작동되지 않았고, 관계된 분들의 직업의식도 없었고, 사고 후 정부의 대처도 미숙하기가 짝이 없었고 진정성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뛰쳐나온 이들 외에 구조대가 선체에 진입해서 구조한 이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단적인 예입니다. 화재가 났을 때 소방대원들이 불길로 뛰어들듯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침몰 사고 당일 생존자 구조를 시도했어야만 합니다.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이 대참사 앞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망연자실입니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 기독교의 한 이단 종파인 구원파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단은 정통의 이면이기에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총체적 부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대재난은 현대판 황제숭배가 몰고 온 저주가 아닐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 이후의 현실 역사는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를 주눅 들게 하기도 하고, 망상에 사로잡히게도 합니다. 이 혼란은 예수 부활 이후와 그것의 완성인 종말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요한복음 기자가 전해주듯이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의 복과 사명에 충실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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