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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3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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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753744 |
회개, 세례, 성령
행2:36-41, 부활절 셋째 주일, 2014년 5월4일
예수 십자가 사건 후에 흩어졌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 부활 이후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20명쯤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농사 절기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행 2:1절 이하에 따르면 갑자기 바람 소리와 불길 같은 현상이 방 안에 가득했고,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사용하던 아람어가 아니라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위 방언입니다. 오순절에는 일종의 성지 순례를 위해서 유대와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외국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놀라며 당황했습니다.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해서 저런 추태를 보인다고 조롱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 내용이 행 2:14-35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결론은 행 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너희’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물론 유대교 집권층과 유대인들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너희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예루살렘 주민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뭔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리셨는데, 그들은 죽인 겁니다. 물론 당시에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한 유대교 최고위층인 산헤드린 회원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에 의해서 부정된 것입니다. 본인들은 정의라고 생각하고 행한 일인데 오히려 불의한 일로 드러났으니, 얼마나 꺼림칙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사형수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숫자가 무죄라고 합니다. 판사는 고심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오히려 억울한 생명을 죽인 겁니다. 그런 오판이 실제로 드러날 때 판사의 심정이 어떨지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3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첫째는 회개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회개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도덕한 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즘처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클 때는 선교전략적인 차원에서도 윤리 도덕 갱신 운동을 펼칠 필요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복음의 중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휴머니즘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런 정도로 여긴다면 기독교가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아니면 근본적인 전환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에 주목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벼락부자가 되거나 효행효부상을 받았다고 해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것을 뚫어보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줄기차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외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완성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믿으라는 겁니다. 거기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어떤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 남의 이야기로 남습니다. 신앙이 매너리즘으로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부모의 강요나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또는 교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열정에 마음이 더 예민하게 움직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리얼리티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만 중요하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냐, 신앙생활과 세상살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예수만 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저는 지금 교회와 세상, 믿음과 실제 삶의 관계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방향 전환이 바로 회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그 중심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둘째, 세례입니다. 세례는 회개의 종교의식입니다. 회개를 내용이라고 한다면 세례는 그 형식입니다. 회개와 세례는 똑같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회개나 세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식 세례를 베풉니다만 원래는 세례 받는 사람이 몸 전체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 형식이었습니다. 세례 받는다는 헬라어 ‘밥티조마이’는 물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우리가 일단 죽어야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연인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죽음으로부터, 또는 죽음과 함께 시작됩니다. 살아있는 한 구원을 받은 건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습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불안하고, 미움과 시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어야 율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바울의 진술처럼 구원도 근원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당장 실제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우리가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다시 나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도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죽음을 가리키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세례를 받으라고 한 뒤에 이어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 본문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아마 방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시작된 이유는 성령 임재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방언 현상을 보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라고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방언이 성령의 가장 특징적인 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각주에서 볼 수 있듯이 사본에 따라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도 결국은 성령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이 오늘 철저하게 기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사회에 몸을 완전히 담고 사는 우리에게 낯섭니다. 세상살이에 성령이 아무 상관없어 보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래도 친숙하게 느끼지만 성령은 뭔가 이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귀신 비슷한 어떤 존재쯤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로 은사주의에 빠진 이들인데, 성령을 도구처럼 이용할 수 있는 어떤 신비한 능력 비슷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산 기도를 다니기도 합니다. 성령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능력은 악령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자본주의라는 악령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지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령과 예수님이 직결됩니다. 성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세례 교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에게는 성령을 받은 확신도 없고, 그런 증거도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성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방언을 하거나 병 고침을 받거나 특별한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그런 것들은 성령의 문제에서 다 사소한 것들입니다. 방언은 해봤자 자기에게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병 고침도 잠시 뿐이지 사람은 다시 병들고 아픕니다. 기도의 응답도 일시적이지 골치 아픈 문제는 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겁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을 진리로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일어난 사건들, 그리고 그의 운명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영적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령이 하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까마득한 세월인 2천 년 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복 받아 부자로 살아라,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어라, 마음의 힐링을 받으라,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사는 게 세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는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출발이자 모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들의 삶과 영혼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이 기록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제1독서인 행 2:36-41절은 2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이며, 정치적으로 반역에 해당되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겁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신앙의 원형입니다. 십자가, 예수, 하나님, 주,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차례대로 나옵니다. 십자가는 저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저주받았습니다. 그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뒤집었습니다. 저주받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주의 대상으로부터 찬양의 대상이 되게 한 겁니다. 그것은 곧 부활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영생으로의 변화입니다. 저주로부터 찬양으로의 엑서더스(해방)입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건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당연한 것 같지만 드믑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사람들은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가능한대로 끝까지 그걸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걸 인정하는 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확신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합리화가 더 강합니다. 사이비 이단의 경우에 교주의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도 추종자들은 가능한대로 그걸 합리화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은 사람들도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겁니다. 소수일망정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그런 찔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실천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28절입니다.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너무 단순해서 별 거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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