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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에 관해 몇 가지 알게 되었다. 그 하나는 의외로 공감할 줄은 모르면서 책임회피는 잘한다는 사실이다. ‘순수 유가족’ ‘70년 적폐’ ‘유언비어’. 이 용어만으로도 세월호 참사를 보는 시선이 보통 시민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70년 적폐론은 ‘세월호 참사는 70년 전부터 쌓인 결과다. 내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의미다. 그는 주요 회의 때마다 유언비어로 사회가 불안하다고 주장한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민심이 흉흉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유언비어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는 핵심을 파악할 줄 모르거나 정직하지 않다.
우리는 그가 정쟁 유발로 국면을 유리하게 이끄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원내수석부대표 자리를 내놓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NLL 포기라며 1년 내내 소모전을 이끌던 이가 알고 있던 걸 박 대통령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쟁 그만두기를 바랄 때 박 대통령이 싸움을 거들고 은근히 부추긴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이미지 정치에 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장관 여럿을 모아 놓고 가르치거나 잘못을 지적하며 고쳐주는 장면을 자주 노출했다. 어떻게 혼자 빛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순발력과 즉흥성이 뛰어나야 한다. 그는 그것도 잘한다. 어느 신문이 국가개조론을 제기하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그걸 받아서 반복했다. 공직사회를 질타하던 날에는 그날 아침 신문에 실린 ‘관피아’ 기사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개혁가 이미지로 바꾸고 책임 전가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관료에 의존해 국정을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상황에 맞게 대사를 고치고 연기할 수 있느냐가 문제 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국제무대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핵안보가 의제였을 때다. 북핵 문제로 핵의 위험성을 부각하면 모양이 좋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영변 핵이 폭발하면 체르노빌 원전 폭발과 같은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이 근거 없는 폭로에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그에게는 국제회의에서 주목받는 게 우선이었다. 지난해에는 한 여론조사를 인용하면서 학생들이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잘못 알고 있다며 역사교육 강화를 위해 역사를 수능 필수 과목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지도자가 뭔가 보여주는 그럴듯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건 성인도 헷갈리기 쉬운 남침·북침 용어를 사용한 엉터리 여론조사였다.
우리가 몰랐던 것도 있다. 그는 무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침몰 다음날 신속히 현장을 방문하고 직접 지휘했다. 그것까지는 모양이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잘 알다시피 아무것도 없었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꿀 때도,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고 할 때도 그랬고, 창조경제와 공기업 개혁을 내세울 때도 그랬다. 깃발만 나부낄 뿐 제대로 한 게 없다. 그 높은 지지율은 무엇에 쓸모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자주 정치적 적대, 당파적 비판을 위해 동원하느라 본래의 의미를 잃은 오염된 언어가 됐지만 그것 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표현력이 부족해도 어쩔수 없다. 무능한 건 무능한 거다.
그가 이미지에는 능하면서 현실에서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현실과 직접 부딪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현실이란 우아하지도 않고, 멋지게 말하고 행동할 기회도 좀처럼 주지 않는 불친절한 공간이다. 그래서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가공된 현실, 무대가 필요하다. 배우는 준비되어 있다. 통치 행위가 연극적일수록 현실과 괴리되었고, 그럴수록 그는 무능해졌고, 그 무능 때문에 더욱 연극적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능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소비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그의 이미지와 현실의 충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충돌로 찢긴 곳을 메우기 위해 그도 달라지기는 했다. 부하로부터 사과받는 대신 부하 앞에서 사과하는 정도로는 변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위기 상황에서도 지지율은 40%대다. 여전히 거품이 끼어 있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그가 아직도 두 다리로 현실을 딛지 않고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이유다. 거품이 더 커져 40%대를 넘으면 그는 다시 극장으로 들어갈 것이고, 거품이 빠져 30%대가 되면 완전히 극장 밖으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박근혜를 원하는가.
<이대근 논설위원>
경향신문 201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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